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19화 (119/200)
  • ◈119화

    전초기지로 돌아온 안나는 즉각 상황을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현재 전투 이후의 결과와 병력들의 손실, 그리고 앞으로 욘마곤에서의 이 전초기지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물자들 등,

    안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고 각 팀의 지휘관급 플레이어들에게 협력을 요구했다.

    마침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보수 팀원들이 차원 문을 통해 속속들이 욘마곤으로 도착하는 중이었다.

    안나는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드웨이크가 회복하고 있는 임시 치료 병동으로 향했다.

    하늬안이 드웨이크의 상태를 살피다가 홀로 돌아온 안나를 보고 정혁을 찾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안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 어떤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하늬안은 자신의 분을 풀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운 모양으로 다시 드웨이크를 살피는 데 집중했다.

    드웨이크는 여전히 데미지를 입은 부분으로부터 천천히 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확산세를 최대한 잡아 놓았지만 그뿐, 녹턴도 결국 포기하고 물러섰다.

    붕대를 감아 놓은 어깻죽지가 처량해 보였다.

    안나는 바깥으로 나와 전초기지의 광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창수를 발견했다.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낯선 여자도 그와 함께 있었다.

    안나는 그녀가 즉사의 화살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궁사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랭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젤리나와 김창수는 안나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대화를 멈추었다.

    “여기는 안젤리나일세. 알겠지만 랭커지.”

    “아, 반갑습니다. 제논 연합에서 참모로 일하고 있는 안나 에이드윈입니다.”

    “…아, 네. 반가워요. 안젤리나라고 합니다.”

    안나와 안젤리나는 웃으며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잠시, 사령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안나가 정중히 묻자 안젤리나는 당연히 괜찮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물러났다.

    그녀도 김창수와의 대화를 막 끝낸 참이었다.

    룬다나와 녹턴을 만나 욘마곤이 앞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확실히 답을 들어야만 했다.

    “나쁘지 않은 싸움이긴 했네만, 아무리 우리가 상대적으로 작은 대륙에 있었다곤 하나 그 대악마라는 작자를 몰아세웠던 남자의 위용을 떠올리면 아직도 오금이 저리네. 자네, 혹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나?”

    김창수가 방금 전의 전투를 회상하는 눈살을 작게 찌푸리면서 안나에게 물었다.

    안나는 자신도 잘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반응에 아쉽다는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던 김창수가 정혁에 대해서 물었다.

    “마스터는 어디 갔는가?”

    “당분간은 얼굴을 볼 수 없을 겁니다.”

    “…알 만하군.”

    김창수 역시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라면 상당히 구겨진 자존심을 욱여 쥐고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다. ‘한’이었던 시절이 가슴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테지.

    이번 전투가 자신에게도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대륙의 차이가 컸다.

    김창수는 그들이 마냥 카탈에만 있었다면 결국 욘마곤은 타이런의 어떤 국가에 의해 무너졌거나 혹은 악마 군단의 침공을 끝끝내 막아 내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욘마곤에 온 이상 그만큼 제논 역시 성장해야 한다.

    명백한 차이,

    그 차이를 느낀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확이다.

    병력들의 사기는 자신감 그 이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쩌면 교만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과한 흥분이었다.

    너무도 강한 지도자와 너무도 강한 무기로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랭커들이라도 된 마냥, 악마 군주 따위는 그저 썰어 버릴 수 있을 것 마냥 대화하고 행동했었다.

    지금, 그들의 교만은 땅 밑으로 꺼졌고 사기 역시 축 늘어진 어깨만큼이나 바닥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김창수는 알고 있다.

    쓴 약이 몸에 좋듯 이번 경험 역시 제논의 플레이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더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스스로 능력과 자질을 키우는 데 노력하며 무리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기보단 자신의 기본을 더 갈고닦아 전체에 도움이 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데 일조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렇게 이들을 훈련시켜야만 다음 단계의 전투에서도 무리 없이 힘겨루기를 해낼 수 있다.

    김창수는 오랜만에 전신을 휘감고 도는 이 익숙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전쟁이라는 것은 결국 머리와 머리의 싸움이다.

    현실의 전쟁과 이 게임 속 오아시스의 전쟁은 다르다.

    아무리 많은 병력들이 집결하고 싸운다고 해도 그들 사이에 압도적으로 강한 한 사람이 있다면 전세는 늘 역전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강한 자와 강한 자 간의 싸움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상의 병력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 전선을 유지하고 힘겨루기를 지속해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강자들 간의 싸움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은 해내야 한다는 말이다.

    김창수 역시 스스로 강자의 싸움에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못내 씁쓸한 사실이지만 너무도 잘 안다. 대악마 아크는 결코 김창수가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랬기에 그는 정혁에게 모든 것을 걸었고 힘겨루기에 적극 동참했었다. 이번 전투는 변수가 많아 어렵게 마무리되었지만 거듭 그는 이번 전투가 제논에게 좋은 약이 되었다고 결론지을 뿐, 그 이상의 아쉬움은 없었다.

    딱 하나.

    아쉬움보다 더 큰 슬픔, 하나는.

    현재 드웨이크의 상태였다.

    “그가 죽기 전에 아크를 소멸시킬 수 있을 거라 보나?”

    김창수의 물음에 안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안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크는 숨었죠. 아마 마계로 내뺐을 겁니다. 그가 다시 군단을 모으고 타이런에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 사이 녹턴과 우리가 걸어 놓은 여러 마법들이 그의 저주로 인한 괴사를 막아 준다고 해도 언제 나타날지 모를 아크를 기다리며 그의 끔찍한 고통을 반복적으로 방치한다는 것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너무 괴로운 일 아닐까요?”

    “그렇담 죽게 두는 것이 났겠나? 아니면 빨리 죽여서 로그아웃시키는 편이….”

    김창수가 말을 계속 하다 말고 안나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나?”

    안나의 얼굴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드웨이크는 지금 죽으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안나는 손톱을 깨물며 작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죠.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요.”

    그녀 역시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하나의 묘수가 남아 있긴 했기에 이번 정혁의 마나석 동굴 원정이 끝나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힐 것 같았다.

    “마스터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가 돌아오기 전에 마쳐 놔야 하지 않겠나?”

    “그렇죠, 아무래도. 이곳에서 우리가 입지를 잘 다져 놔야겠죠?”

    “하늬안을 다시 돌려보내야겠네. 그 편에 드웨이크도 함께 보내야 할 것이고. 나는 정령왕들과 살아남은 이곳의 여러 부족장들, 그리고 나이트 엘프 장로들을 만나 욘마곤에서 제논이 터를 잡는 것에 대해 논의해 보겠네. 자네는 이 부탁을 하려고 했던 것이지?”

    안나는 간지러운 구석을 정확히 긁어 주는 김창수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럼 자네는 이 전초기지의 각 구역을 넓히고 필요한 부분을 파악해 주게나. 저들이 우리의 요구를 얼마나 들어줄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모르쇠하지는 못할 게야. 우리가 한 일도 있거니와 우리에겐 마스터도 있지 않나.”

    “웬만하면 당당하게 나가세요. 우린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김창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 뒤에 고정된 도끼 자루를 단단히 고쳐 맸다. 그리곤 바삐 움직이는 병력들 사이로 들어가 사라졌다. 안나는 큰 숨을 몇 번 들이 쉬었다가 내쉬면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보수 팀의 리디안이 그녀에게 다가와 몇 가지 정황들을 보고하고 결재를 요구했다. 그녀는 나무판자에 새겨진 여러 리스트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리디안의 의견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말을 멈춘 안나가 잠시 손에 들려있던 차트판을 리디안에게 건네주었다.

    [겨……ㄹ계가… 어서… 그, 그자…가 시…심상…찬ㅎ… 보…복…귀…해 주…!]

    제논에서 보내온 불길한 전음이었다. 안나는 급히 리디안에게 이것저것을 추가적으로 지시한 뒤 열려 있는 차원 문으로 달려가 안으로 들어갔다.

    ***

    “죄송해요.”

    한참을 날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던 정혁과 에트론.

    이 무겁고 짓눌리는 것만 같은 불쾌한 기분을 깨기 위해서 에트론은 정혁의 눈치를 살피며 먼저 한마디 건넸다.

    “뭐가?”

    퉁명스러운 그의 대답이 에트론을 더 위축시켰지만 그럼에도 정적 속에 다시 파묻히고 싶진 않아서 에트론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냥, 제가 더 좋은 무기들을 열어 드렸다면 좋았을 텐데요.”

    정혁은 저 멀리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면서 고삐를 아래로 당겨 쳤다. 까마귀가 까악거리며 짧게 울더니 고도를 낮췄다.

    “네가 뭘, 내가 약해서 결국 그 정도밖에 였던 거잖아.”

    이런 식의 분위기를 원하던 것이 아니었던 에트론은 떨어지는 고도만큼이나 더 아래로 처박히는 것 같은 이 분위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만 같아 에트론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려던 것을 꾹 참아 냈다. 까마귀는 숲속의 높이 솟은 여러 나무들을 지나쳤고 그중에서 굵은 가지 위에 날개를 펄럭이며 앉았다.

    정혁은 안장에서 내려 고생한 까마귀의 등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까마귀는 다시 어딘가로 날아갔다.

    꽤 크고 높은 나무였다.

    엘라가 엔트였을 때만큼의 두께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정혁이 하나의 나뭇가지 위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쉴 정도만큼은 되었다.

    인벤토리에서 불쏘시개를 꺼내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운다.

    숲으로 내려오자 주변은 금방 어둠에 가득 찼고 정혁은 피운 불 뒤로 자신이 자고 쉴 때 필요한 것들을 보기 좋게 진열해 두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에트론이 금방 주위를 돌아보곤 아무런 위협 요소도 없었노라 보고해 주었다.

    가벼운 집기들을 꺼내 차를 한 잔 타기 위한 물을 올리며 정혁은 상처들이 많았던 팔을 살폈다.

    어느새 찢어진 상처들을 장기 회복 마법 덕분에 치유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드웨이크가 자꾸만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하드린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어요.”

    에트론이 조용히 그의 곁에 다가와 일곱 살 꼬마 정도의 크기로 몸집을 키우곤 따뜻한 불에 손을 쬐며 말했다.

    녀석에게도 이번 전투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을 만들어 낸 뒷손을 녀석도 어떻게든 찾고 싶었겠지.

    저번에도 대화를 통해서 에트론과의 친밀도가 올라갔었다.

    에트론과는 전투보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의 시간들이 더 효과적인 것 같았다.

    “어땠어?"

    정혁의 물음에 에트론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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