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18화 (118/200)
  • ◈118화

    정혁과 함께 전초기지를 나와 걸으면서 안나는 다양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직은 무리였던 것일까? 물론 일전에 정혁이 카탈에서 보여 준 힘은 그 자체로 대단했다.

    누가 감히 그렇게나 많은 악마들과 상당한 힘을 가진 군주를 상대하면서도 안정적으로 기세를 유지하며 강대한 군주마저 쓰러트릴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제논의 피해조차 거의 없었던 대승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결과가 나쁘다고 할 순 없다.

    그날에 비하면 월등히 많은 수의 적과 부딪치고 상당히 많은 군주들과 무려 대악마 아크와의 결전도 피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생각보다 상대적으로 아군들을 잘 지켜 냈다.

    하지만,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멀었다.

    자신의 추측이 틀렸던 것일까? 아직은 무리인 걸까?

    안나는 답답했다.

    정혁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E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는 더 깊은 혼란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바이러스,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들을 돕는 그 프로그램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들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는 정혁을 뜬금없이 만들어 놓고 사라진 걸까?

    그라면 모든 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걸까? 무슨 근거로?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전쟁이, 이 격돌이 그 실마리를 알려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잠적했던 그를 유르겐이 찾아냈고 정혁에 대한 흥미를 유도해서 겨우 전쟁터에 끌고 나왔기 때문에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지 그가 아니었다면 정혁을 잃을 수도 있었다.

    오히려 드웨이크만 저런 꼴이 된 것에 안도하게 된다.

    불의 정령왕 라테.

    천계의 천사 에트론.

    만 년 된 고대 엔트 엘라.

    정혁이 가진 최고의 전력 3명으로도 힘든 전투였다니.

    그래, 엘라가 없었다고 한들 아크와의 전투 레코드를 보면 정혁은 그에게 치명타조차 안겨 주지 못했다.

    아직, 아직은 그들과 싸우기에 한참 멀었다는 말이다.

    E의 말대로라면 리안을 저 꼴로 만든 자들은 곧 재생성될 것이다.

    E를 대체할 자 역시 생성되어 우리에겐 거대한 위협이 되겠지.

    리안은 회복되려면 멀어 보이지만 그들은 언제 다시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

    이미 시작된 리사이클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고 규정에 맞는 절차를 이행하기 위해서 돌아가고 있는 오아시스의 타이머가 지금 어느 위치에서 정체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 알 수 없는 위협이 자꾸만 안나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다.

    정혁이 키라고 했으면서 아직은 너무 멀었고 또 이른 타이밍에 리사이클이 시작됐다.

    해법이, 해답이.

    모르겠다.

    안나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그리곤 축축하고 짭짤한 바다 내음을 깊이 들이마셨다.

    “기분이 개 같아.”

    흠칫. 안나는 마치 자신의 기분을 대변해 주는 것 같은 정혁의 말에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그제야 안나는 정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겉옷은 이미 여기저기 찢어지고 갈라졌다.

    전신은 악마의 피와 자신의 피, 그리고 그 외의 오물들이 뒤섞여 더러웠다.

    양손부터 팔뚝까지 성한 곳이 없다.

    신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이마에는 길게 상처가 나 있다.

    명색이 한 길드의 수장이자, 한 연합의 지도자이며 대륙의 초신성인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정혁은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곤 파도에 몸을 맡겨 전신을 씻어 냈다.

    정혁의 주변으로 붉고 검게 염색된 바닷물이 주변으로 퍼져갔다.

    정혁은 짠 물에 머리를 담갔다가 치켜들었다.

    머리카락을 털고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안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치스럽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에 자신이 일개 대장장이로서 전쟁을 참여했다면 이런 기분은 사치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신에게 감사했겠지.

    하지만 분명 아크를 압도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자신의 병력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의 기준에 있어서 생각보다 많은 수를 잃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못해 역겨웠다.

    또한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준, 제논을 구해 주고 욘마곤을 보호한 그 남자의 존재 자체가 불쾌했다.

    허공에서 자신을 내려다봤다.

    그러곤 유유히 사라졌다.

    완벽한 무시.

    정혁은 그가 결코 대악마 아크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거만한 태도는 정혁의 기분을 상당히 상하게 만들었다.

    유르겐에게 그따위 조언을 들었다는 것도 싫었다.

    이제까지 마나라는 개념 자체를 잊고 성장해 왔던 자신이 한없이 멍청해 보였다.

    분명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옆에 젓가락을 두고 숟가락으로만 모든 것을 집어 먹으려 했던 것 마냥 사리 판단을 못했던 자신을 스스로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드웨이크는 죽을까?”

    정혁이 뭍으로 걸어 나오며 안나를 향해 물었다.

    안나는 대답을 주저했다.

    솔직히, 솔직히 말하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죽음을 끝으로 그는 한없는 어둠 속에 침전하게 될 것이다.

    이젠, 돌아올 수 없다. 이 세계로는 돌아올 수 없다.

    이미 시작된 리사이클의 과정에서 죽은 자들은 세계가 정리되고 다음 세대가 시작될 때까진 돌아올 수 없다.

    그에겐 이제 다음이 없는 것이다. 이 사실까지 그에게 말할 순… 없다.

    “알고 있잖아. 오래가진 못할 거야.”

    “…그렇겠지.”

    “자책하지는 마. 희생을 치르지 않곤 승리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안나의 이성적인 대답이 정혁의 마음을 조금 더 깊이 베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가야 할 곳이 생겼어.”

    “어디?”

    안나는 조용히 정혁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모습이 왠지 측은하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다.

    “마나석 동굴.”

    “마나석 동굴? 거긴 왜? 혼자서 가긴 힘든 곳이야.”

    “그곳에 젠트라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젠트라. 그래, 정혁에게는 아직 그 목표가 남아 있다.

    안나도 나름의 인맥을 총동원해 젠트라의 흔적을 찾곤 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마나석 동굴에 대해서 듣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도 마나석 동굴이 얼마나 위험한 공간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을 재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그곳을 정혁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혼자서는 위험해. 정말이야.”

    “에트론만 데리고 갈 생각이야. 네가 말려도 소용없어. 통보니까.”

    “…에트론 님만 데리고 가겠다고?”

    안나는 이 남자가 진심으로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어떻게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나석 동굴에 대해 들었다면 자연스럽게 그 위험성도 함께 인지했을 텐데.

    지금 그의 결단이 감정에 의한 객기인건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정혁은 그곳에서 에트론과의 친밀도를 올리고 자신의 신체 능력과 그 한계를 테스트해 볼 심산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마나에 대한 흐름을 조금이나마 그곳에서 깨닫고 싶었다.

    리안이 어서 회복해서 자신에게 마나에 대한 활용적 측면의 교육을 해 주면 좋겠지만 그가 언제 깨어날지도 아직은 미지수였기 때문에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 여유가 얼마나 이어질지 몰랐다.

    아크가 다시 욘마곤을 밀고 들어올 때 유르겐과 그 남자가 또 다시 도와줄 거라는 확신도 없다.

    아니,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다.

    다시 치욕스러운 감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두 번은 결단코 사절이다.

    “안나, 혹시 드웨이크가 죽기 전에 아크를 제거한다면 드웨이크의 몸을 갉아먹고 있는 저 끔찍한 저주 마법도 사라지지 않을까?”

    “…가능한 이야기긴 한데… 글쎄, 그때까지 드웨이크가 버틸 수 있을까? 아크가 그 전에 모습을 나타낼까?”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정혁이 이빨을 갈며 말했다.

    목표는 인간에게 무엇이든 도전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다.

    정혁은 자신의 나약한 모습과 한쪽으로 치우쳐졌던 사고를 깨고 자신을 다시 한번 연마하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나석 동굴에서 어떻게든 한 번 더 성장하고 가능하다면 젠트라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힌트를 얻어 내야 한다.

    못내 아쉽다. 빠르게 전개되는 여러 사건들 때문에 젠트라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는 것 같았던 엘라에게 자세히 뭔가를 더 캐물어 보지 못했다.

    처음 도돈치아를 거쳐 은행나무 엘프의 왕국까지 긴 여정의 갈피를 잡았던 것도 다 젠트라의 초대장, 그 토큰의 재질이 은행나무였기 때문이었는데 엘라가 자신의 에고 무기가 되고 지금까지 본질적으로 물어봐야 했던 젠트라에 대한 정보를 끝내 완벽히 물어보지도 알아내지도 못했다.

    전음을 보내기엔 너무 멀리 있거니와 엘라는 지금 그의 곁으로 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대장간을 통해 그녀를 부르거나 혹은 무기화해서 그녀를 이곳으로 강제 소환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정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안나, 이곳에서 전초기지를 중심으로 욘마곤을 천천히 수복시켜 줘. 아마 곳곳에 저들의 악마 성채들이 있을 거야. 아크의 말론 그가 모든 악마 군주의 힘을 소멸과 동시에 흡수했다고 했으니 아마 남은 군주는 없을 거고 안젤리나와 김창수의 힘, 그리고 정령왕들의 힘이라면 무리 없이 욘마곤 전역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겠지. 그 사이 나는 마나석 동굴에 다녀올게. 어떻게든 그곳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드웨이크도, 그리고 욘마곤도 좀 잘 지켜 줘.”

    “다른 국가들이 혹시나 우리를 견제하려고 한다면 어떡할까?”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듯한 정혁의 표정에 안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디 건드려 보라지. 벌집을 쑤신 격이 될 테니. 보여 줘, 제논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정혁이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는 휘파람을 불어 까마귀를 불렀다.

    여느 때처럼 까마귀가 허공을 가르고 해안가를 향해 날아왔다.

    그가 뭔가를 중얼거리니 그의 곁으로 밝은 구체 하나가 갑작스레 등장했다.

    에트론이었다.

    그는 에트론을 데리고 까마귀에 올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안나는 그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초기지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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