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17화 (117/200)
  • ◈117화

    안젤리나와 현재 랭킹 10위 안의 플레이어들은 비슷한 시기에 용족을 만났다.

    각자 다른 용 군단의 남아 있는 용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용의 가호를 받았다.

    그들은 세계의 균형과 질서를 원했고 그에 걸맞은 사람들을 찾아 각각의 힘을 나눠 주고 떠났다.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으레 그렇듯 용들은 아마 어디선가 돌이 되고 어디선가 산맥이 되어 잠들었을 것이다.

    당시 김창수를 뺀 9명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판단했다.

    세계의 균형과 질서를 무너트리는 자. ‘한’밖에 없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을 무너트리기로 결의했지만 결국 그 결의는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해 무색해졌고 ‘용의 가호’를 받은 플레이어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대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용은 그들에게 세계의 균형과 질서를 유지해 달라고 힘을 주었지만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과 힘의 중심에서 그 특별한 힘을 사용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위했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 힘을 준 용들이 의도한 바라고 말이다.

    결국은 그들에 의해서 균형과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압도적인 폭력과 권력의 그늘 속에서라고 할지라도.

    안젤리나도, 그리고 안타깝게 사망한 전 랭킹 6위의 남자도 이런 행태가 싫어 욘마곤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현실에서조차 이골이 난 권력 싸움을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하게 즐겨하고 있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욘마곤은 그나마 평화로웠고 그들 역시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의미 있는 싸움을 종종 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영향력을 펼치진 않았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오만이 웃겼다.

    랭킹을 정하는 것은 어떤 프로그램도 아니다. 그저 오아시스 세계 속에서 얼마만큼의 사건 사고, 그 중심에 있었느냐. 그리고 힘을 펼쳤느냐.

    데이터로 증명되는 강함이 아니라 구설수로 인정되는 강함이 랭킹을 정해 주는 것이다.

    숨은 강자가 있을 수 있고 그 강자에 의해 언제든 랭킹은 바뀔 수 있다.

    김창수만 봐도 그렇다. 그가 과연 랭킹 10위일까?

    글쎄, 안젤리나는 그라면 충분히 자신을 뛰어넘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한’이라는 남자 말고는 그렇게 오랜 시간 홀로 랭킹 1위의 명성을 지닌 자는 없었다.

    그는 워낙 넘사벽이어서 보통 바로 아래라고 생각하는 랭킹 2위의 전투력을 거의 압도했었다.

    그에겐 압도적인 힘과 주변을 압살하는 살기 그리고 잔혹함이 있었다.

    그 모든 힘들이 실제로 그를 겪은 사람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졌고 그의 행위와 행태들이 워낙 엄청난 수의 플레이어들을 괴롭히고 살해했기 때문에 누구나 함부로 그의 권위에 의문을 가질 수도 없었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지금은 과연 지금의 랭킹이 그때만큼의 위용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용의 가호라는 이 특별한 힘을 소수가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물론 용의 선택을 받은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긴 하지만 안젤리나는 아크를 물리친 그 남자의 존재 자체만 봐도 가히 ‘한’을 보는 것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역시나 다시 한번 랭킹 시스템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듣고 있어?”

    “…아?”

    안젤리나가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렸다.

    정혁이 용을 만나고 싶다고 한 말을 듣고 랭킹까지 장황하게 현재를 돌아보고 있던 그녀는 현실로 돌아와 정혁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 이면에서 폐부를 찢어 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용의 존재는 그날이 마지막이었어요. 우리에게 용의 가호를 전해 준 용 군단은 그 날을 기점으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생각했죠. 그들이 그들의 임무를 우리에게 쥐어 주고 시대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세계 균형의 존재들 중에 한 부류가 세계에서 사라진 것이죠.”

    “아니.”

    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안젤리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혁을 다시 보았다. 그는 까마귀의 고삐를 쥐고 담담히 정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용은 아직 남았어.”

    안젤리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복기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어처구니없는 단어가 떠올라 피식 웃음을 토해 냈다.

    그러나 곧 이런 자신의 행동이 정혁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곤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정혁은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안젤리나는 숨을 고르고 그에게 물었다.

    “혹, 혹시 고대룡을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젠…트라라고 했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긍정일까, 부정일까?

    안젤리나는 그가 부정하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고대룡이라. 사실 안젤리나가 욘마곤에서 몇 달간 그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다.

    안젤리나는 욘마곤에서 두 정령왕을 만났다.

    그녀는 플레이어들이 오아시스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며 쉽게 만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들을 어떻게 보면 한 번씩 만나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용을 만나고 바람과 물의 정령왕을 만났다.

    어쩌면 용의 가호 덕분에 그들이 자신에게 모습을 비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쩌면 용들의 시초 고대룡 젠트라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 뒤로 욘마곤에서 살아가는 여러 고대 종족들과 부족,

    그리고 엘프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젠트라에 대해서 물었지만 모두들 고개를 저을 뿐 직접적인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다만.

    “…작은 흔적은… 글쎄요, 이걸 흔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안젤리나가 말을 하며 옆을 돌아보니 그가 없었다.

    안젤리나는 급히 전진하던 양탄자의 속도를 줄였고 뒤로 돌아 공중에서 멈춰 있는 까마귀와 정혁을 보았다.

    정혁은 복잡한 표정으로 안젤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젤리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정혁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흔적?”

    “…예, 욘마곤에는 마나석 동굴이 하나 있거든요. 이 땅이 오랫동안 자정하며 만들어 낸 엄청난 양의 마나석이 매장되어 있죠. 많은 마나들이 요동치는 만큼 마나석을 채굴하려고 몰려드는 채굴 꾼들과 마나석을 지키는 트롤, 고블린, 엘프, 마나 골렘들 그들의 격돌이 끊이지 않는 곳이죠. 마나석 동굴 속에는 끔찍하게 뒤틀린 마나 지렁이가 수천 마리 있고 제일 깊숙한 곳에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어떤 괴이한 생명체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마나석 동굴….”

    가 본 적 있다.

    과거 ‘한’이었을 때 강철 망치에서 조 패더럴이 특별한 마나석을 좀 구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고생이라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정혁이었기 때문에 그는 노련하게 근처에 은밀하게 위장하고 가려진 불법 채광장의 마나석 창고를 털었다. 그곳에서 조가 원하는 여러 마나석들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채광장의 모든 플레이어들과 다른 부족들은 모두 그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한 후였다.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마나석 안엔 진귀한 것들이 잔뜩이지만 그만큼 불쾌하고 괴랄한 생명체들도 많다고. 더구나 마나석 안에서는 마나석의 공명 때문에 개인이 사용하는 마나에 부딪쳐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을 뿐더러 신체 능력이나 개인의 칭호 능력 역시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이다.

    구태여 불편한 경험을 할 필욘 없으니 정혁은 그렇게 몇몇의 불법 채굴장을 몽땅 털어서 조 패더럴에게 가져다주었고 조는 특유의 금니가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수확에 감사했었다.

    “고대룡을 이야기할 때마다 종종 ‘마나석 동굴이라면’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것 같긴 해요. 그와 마나석 동굴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 끝에 다다르면 어떤 힌트가 있지 않을까요?”

    정혁은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기뻐했다. 이 정도라면 다음 갈피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마나석 동굴이라는 곳을 가 보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시죠?”

    안젤리나가 조심스럽게 정혁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마나석 동굴에서는 개인의 힘이 엄청나게 제한돼요. 그러나 그곳에서 살고 자란 생명체들은 오히려 마나석의 공명에 익숙해져 그 독특한 마나의 흐름에 반응하며 동굴 안에서만큼은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불법 채굴자들도 일정 구역 이상은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엄청난 수의 파티를 맺어 한꺼번에 들어갔다가 한꺼번에 나옵니다. 혼자서 그곳에 가실 생각일랑은….”

    그러나 안젤리나는 이내 말끝을 흐렸다.

    정혁은 분명 그곳에 혼자 갈 요량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둘은 말이 없이 공중을 함께 비행했다.

    그 사이에 전쟁터로 활용됐던 넓은 땅은 오염이 걷히고 자연이 숨 쉬는 욘마곤의 대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제논의 모든 병력들은 부상자를 옮기고 부서진 장비들과 악마들이 떨어뜨린 귀한 아이템들을 주워서 전초기지로 완전히 복귀했다.

    욘마곤의 병력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음 싸움이 이어질까?

    정혁은 아마도 한동안 이 이상의 전면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크가 후퇴한 곳은 이 타이런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다시 마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이를 갈고 있겠지.

    인간을 발아래 두고 있다고 여겼을 그가 인간에게 두들겨 맞고 호각으로 싸우다가 물러났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는 남자의 존재뿐 아니라 정혁이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남자의 공격에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때 정혁마저 가세해 버리면 후일을 도모할 수조차 없었을 테니 말이다.

    군주들을 아무렇게나 희생시켜 그들의 모든 힘을 흡수해 한 번에 욘마곤을 집어삼키려던 그의 교만한 계획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아마 당분간은 마계에서 후일을 도모할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에 정혁은 이 타이런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끝내야 한다.

    나머지 두 거대한 국가의 옆구리도 한번 찔러 봐야 되거니와 마나석 동굴도 한 번 도전해 봐야 한다.

    더불어 유르겐이 이야기했던 자신의 또 다른 무기.

    황금빛 마나에 대한 효율적인 활용 방안도 찾아야 한다.

    웬만하면 리안이 깨어나 그 해답을 건네줬으면 하지만 기약이 없다.

    [정혁!!!]

    정혁은 그만 마음에서 울리는 비명에 가까운 전음에 놀라 고삐를 놓치고 떨어질 뻔했다.

    그는 휘청이는 까마귀 위에서 중심을 다시 잡고 본능적으로 전초기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전음 두 개가 겹쳐서 들렸다 했는데 그곳에는 지금 이 순간 그가 만나기 껄끄럽다 생각되는 두 여자 안나와 하늬안이 동시에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혁은 한숨을 쉬면서 까마귀의 고삐를 끌어 지면으로 향했다.

    아마도 총알에 가까운 잔소리와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정혁은 특히나 하늬안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드웨이크는 하늬안의 전 소속 팀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더욱.

    까마귀의 안장에서 내리자마자 씩씩거리며 달려들려는 하늬안을 김창수가 손으로 막았다.

    김창수만큼은 막 대할 수 없었던 그녀는 마치 라테의 눈동자 마냥 불타오르는 두 눈으로 정혁을 노려보았다.

    시선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욕설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따라와요.”

    안나가 차분히 다가와 옅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왜 웃을까.

    차라리 욕을 하지.

    정혁은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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