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16화 (116/200)
  • ◈116화

    김창수와 안젤리나 그리고 정혁.

    라테와 에트론, 게다가 정혁에게 살해 위협을 받고서야 최선을 다하기 시작한 룬다나까지.

    세계에서 알아주는 랭커들과 강력한 존재들의 일제 공격을 때려 맞은 악마 군단은 처참할 수준으로 전열이 붕괴되었고 기세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완벽한 주종관계로 연결된 그들에게 사기라는 것이 존재할 리 만무했지만 밀리고 있다는 본능적인 느낌은 살아 있는지 점점 주변의 눈치를 보며 싸우기를 머뭇거리는 악마들도 종종 보였다.

    되레 이를 통해 사기를 얻은 제논과 욘마곤의 병력들은 더욱 치열하게 악마들을 밀어냈다.

    공중에서는 아크와 정체불명의 남자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못한 싸움이었다.

    아크는 남자뿐만 아니라 지상의 적들까지 분쇄해 버리려는 의지의 공격들을 계속 펼쳤지만 남자가 그 모든 공격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고 틀어막았다.

    아크는 아크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몇 차례나 귀청을 찢을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반해 정체불명의 남자는 여전히 매끄럽고 부드러운 공격을 이어 가고 있었으며 입은 옷에 찢어짐이나 헤짐 하나 없이 깔끔했다.

    힘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정혁은 유르겐이 사라지며 자신에게 한 말에 대해 조금의 불쾌함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가 뭐라고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리안이고 저 남자고 간에 결국 그들을 밟고 올라서 세계의 정점을 찍을 사람은 자신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보다 낮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지만 결국 힘을 모아 치고 나갈 발판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봐도 유르겐의 말은 자꾸만 저 남자의 태도를 과한 거만함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이는 계속해서 정혁의 기분을 잡치게 만들었다.

    덕분에 악마들의 뚝배기를 깨부수는 데 탄력을 받고 있던 그였다.

    - 꾸웅!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이 부딪치는 듯한 이질적인 소움이 허공에서 매섭게 밀려들어 왔다.

    근원지를 바라볼 여유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 소음이 아크와 남자와의 싸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음과 함께 정혁은 공중에서부터 밀려 내려오는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머리 끝 정수리에서부터 몸을 타고 발아래까지 마치 중력이 더해지는 듯한 불쾌한 압력이었다.

    정혁은 곧 이것이 몇 배는 강해질 것임을 느꼈다.

    또한 이 힘을 이곳의 병력들은 온전히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혁이 급히 주변을 살폈다.

    이미 악마들과 몇몇 병력들은 이 괴이한 압력에 모두 당황해서 다소 느려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정혁은 라테와 눈을 마주쳤다.

    라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룬다나! 라테!”

    정혁이 소리치자 라테가 주변에 거대한 화염 장막을 펼쳤다.

    그의 곁으로 제논의 병력들이 모두 밀집했다.

    화염 장막은 돔의 형태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룬다나 역시 동일한 바람의 장막을 펼쳤다.

    제논과 욘마곤의 병력들도 급히 그 안으로 회피했다.

    정혁은 빠른 움직임으로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병력들을 잡아채 그곳으로 밀어 던졌다.

    악마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지면으로 발부터 박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끔찍한 광경이 곧 펼쳐질 예정이었다.

    […아크의 발악이에요…!]

    에트론이 전음으로 고함을 쳤다.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아크는 숨겨 뒀던 모든 힘까지 완전히 개방한 모양이었다.

    아크와 합을 나눴던 정혁으로서도 아크가 이 정도의 힘을 숨기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남아 있는 병력들을 모조리 장막 안으로 거칠게 집어 던지면서 정혁은 근근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크의 주변으로 검은 마나가 미친듯이 폭주하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아크의 곁에서 호전하고 있었다.

    정혁은 당장이라도 그 싸움에 합류하고 싶었으나 아직 압력에 짓눌리고 있는 병력들이 남았다.

    지금은 그들을 먼저 지키는 것이 무리의 리더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녹턴도 제때 장막을 펼쳤다.

    그는 최선을 다해 드웨이크를 살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장막 안에서 김창수는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 바퀴, 그 넓은 전장을 전부 돌아다니며 최대한 많은 숫자의 병력들을 장막 안으로 위치시키는 데 성공한 정혁은 멈춰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고 있는 듯한 아크와는 달리 남자는 평온 그 자체였다.

    그는 마치 사자가 여유롭게 앞발로 먹잇감을 쥐고 있는 듯한 모양으로 아크를 밀어 붙이고 있었다.

    아크의 악마 군단마저도 갉아먹고 있는 이 광범위한 암흑 마법은 아크가 단순히 힘을 증폭시킨 것만으로 발생한 현상이다.

    그렇다는 건 아크 역시도 자신의 군대가 줄어들 것을 감안하고도 남자를 이기기 위해 발끝의 힘마저 모두 끌어올렸다는 말인데. 생각보다 큰 소득은 없어 보였다.

    지상엔 이미 악마들은 거의 소멸되어 버렸다. 압사에 가까운 비참한 말로였다.

    라테와 룬다나, 그리고 녹턴이 펼친 정령왕급의 원소 마법 장막은 다행히도 아크의 끔찍한 힘의 방출 앞에서 지상의 병력들을 안정적으로 보호해 낼 수 있었다.

    정혁은 알고 있다. 자신이 구태여 저곳에 끼는 것은 아크에게 오히려 기회를 줄 수도 있다.

    남자는 이상하게도 아크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

    왜일까? 정혁은 그자가 마치 보여 주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러다 문득 혹시 자신에게 본인의 힘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불쾌한 추측이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네요. 상대는 대악마인데도 저렇게….]

    에트론이 전투 현장을 넋 놓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부득 갈면서도 모든 싸움의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압도적이진 않아.”

    […네?]

    “아직 멀었단 말이야.”

    […….]

    에트론은 잔뜩 날이 선 정혁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 쿠쾅

    아크와 남자와의 접전에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아크가 남자를 강하게 밀쳐내고 그의 양팔과 다리에 구속구 같은 것을 붙여 행동을 잠시 막은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가뿐히 풀어내며 다시 아크에게 덤벼들 준비를 했다. 그

    러나 아크는 노련하게도 자신의 등 뒤에 뒤틀린 차원 문을 만들어 냈다.

    검은 어둠만이 가득한 차원 문 안에서 여기저기 부패된 길쭉한 손들이 튀어나와 아크의 전신을 감싸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아크가 자리를 피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은 듯 총알처럼 빠르게 차원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크는 자신의 두 대검에 마나를 집중시켜 다시 거대한 구체 두 개를 만들어 던졌다.

    남자가 그것을 피하고 튕겨 내는 사이에 아크는 차원 문 안으로 온전히 빨려 들어갔다.

    남자는 한동안 허공에서 아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힐끔 지면의 정혁을 쳐다본다.

    정혁은 잠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주 멀리 있기에 그의 이목구비가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뭐랄까, 정혁은 본능적으로 그가 정혁을 그리 달가워하진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정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남자의 곁에 유르겐으로 보이는 형태가 갑자기 나타났다.

    유르겐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정혁을 보더니 공중에서 신나게 손을 흔들어 댔다.

    정혁이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는 사이 남자도 유르겐도 공중에서 사라졌다.

    정혁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드웨이크에게 달려갔다.

    그의 상태가 최우선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녹턴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회복 마법을 그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드웨이크는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고 점점 살가죽을 갉아먹어 가는 타락과 저주의 마법은 그 속도만 줄어들었을 뿐 회복 마법에 크게 반응하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정혁은 그의 곁으로 김창수가 다가옴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 김창수에게 말했다.

    “…저는 전열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드웨이크를 돌봐 주세요….”

    김창수는 입술을 깨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혁이 휘파람을 불자 어딘가에서 그의 까마귀가 날아왔다.

    라테는 다시 조그마한 정령의 형태로 변해 정혁의 곁으로 돌아왔고 에트론 역시 빛나는 구체의 형태로 정혁의 근처를 비행했다.

    정혁은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안장에 올라 고삐를 잡아채 공중으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오염된 대지가 욘마곤의 해안가까지 다다랐다.

    악마의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중간 중간 욘마곤 혹은 제논의 병력들이 섞여 쓰러져 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의 대전투였지만 생각보다 잘 버텼고 잘 이겨 냈다.

    배수진의 위치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욘마곤 병력들의 사생결단과 이미 악마들과의 끔찍하고 불결한 전투를 경험해 보고 익숙해진 제논의 병력들의 노련함이 이루어낸 만족스러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녹턴과 룬다나가 대지를 정화하기 위해 나섰다.

    라테 역시 그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곤 정혁의 곁에서 벗어나 지면으로 돌아갔다.

    라테에게는 가이아의 심장이 있다. 가이아의 심장을 지닌 그는 오염된 대지를 다른 이들보다 더욱 빠르게 정화시켜 갔다.

    거무죽죽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땅에서 악마들의 시체들은 걷어지고 초록빛 풀잎들이 돋아나며 생기의 바람이 지면을 감싸고 돈다.

    이는 전쟁이 끝나고 한숨 돌리고 있는 전 병력들에게도 슬프고도 기쁜 승리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무 손해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욘마곤의 병력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줄었다.

    노련한 전사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자들이 많아서 였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잔여 병력들은 다시 해안가 전초기지에 모여 승리를 자축하고 전우의 죽음에 슬퍼했다.

    제논의 병력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긴 했지만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술잔을 서로 기울였다.

    드웨이크는 들것에 실려 전초기지 중앙의 긴급 의료 센터로 보내졌다.

    그에겐 모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회복이나 치유 마법이 쏟아졌지만 최상위라고 할 수 있는 아크의 지독한 공격과 저주의 손아귀에서 그가 회복되기란 어려워 보였다.

    전쟁이라는 것이 피해와 사망자를 낳는 파괴적인 행위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정혁은 무엇보다 드웨이크조차 지키지 못했고 더구나 아크를 결정적으로 물리친 것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좌절했다.

    겉으로는 크게 드러내지 않았어도 고삐를 잡고 있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을 좀 더 벌었네요.”

    정혁의 곁으로 안젤리나가 다가왔다.

    분명 그녀의 양탄자는 찢어져 없어졌는데 어느새 새 양탄자를 타고 있었다.

    안젤리나는 조심스럽게 정혁의 분위기를 살폈다.

    역시나 여러 감정들의 소용돌이에 갇혀 그녀가 한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너무 자책하지는 말세요. 이렇게까지 온 것도 덕분입니다.”

    안젤리나는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정혁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정혁은 그녀의 웅얼거림을 듣고 생각의 늪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안젤리나를 그제야 쳐다보았다.

    “…용.”

    “네?”

    “용을 만나게 해 줘.”

    안젤리나는 뜬금없는 정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긁적였다.

    용…을 만나게 해 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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