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15화 (115/200)

◈115화

아크는 미소를 흘리며 대검을 양손에 쥔 채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뭔가 광범위한 공격이 펼쳐질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안젤리나의 화살이 수십 발 아크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가까이 닿지도 못하고 근처에서 바스라져 사라졌다.

아크는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선 후에 두 자루의 대검에 자신의 힘을 부었다.

대검은 검은 마나와 함께 공명했고 그것은 변칙적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불길해.”

정혁이 짧게 한마디 뱉고는 두 손에 힘을 잔뜩 주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크는 그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것을 분명 보았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정혁이 떠 있는 아크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두 망치로 가격했지만 어떤 막에 막혀 허공만 내려쳤을 뿐이었다.

번쩍거리던 아크의 대검이 이제 완전히 검은 빛으로 물들었을 때 아크가 걸리적거리는 정혁을 발로 걷어찼다.

정혁은 자신의 눈으로 따라가지 못한 그의 발길질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아 지면으로 추락했다.

아크가 이 정도라면 도대체 악마왕은 얼마나 강한 걸까.

정혁은 옅은 피를 토하며 자신으로 인해 패여진 구덩이 안에서 흙을 털고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조금만 더 등급이 높았다면 아크에게 충분히 비벼 볼 만했을 텐데요!]

에트론이 한탄하면서 중얼거렸다.

여전히 정혁의 기운은 강했지만 그에 비해 모든 악마 군주를 흡수한 아크의 힘은 월등히 강했다.

이 욘마곤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힘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저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크는 자신의 대검을 동시에 들어올렸다.

대검과 대검 사이로 모였던 힘이 동그랗게 집중되었다.

그것은 곧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모양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 내부에서부터 괴랄하게 꿀렁이고 있었다.

“…젠장!”

무기력.

정혁이 끔찍이도 싫어했던 감정이었다.

처음 이 본래의 몸으로 강철 망치에 떨어졌을 때 하늬안의 대검 두 자루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던 그때 느꼈던 무기력감이었다.

그것이 죽기보다 싫어 아득바득 이곳까지 올라왔는데, 여전히 태생적인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결국은 대장장이.

‘한’이었다면 펼칠 수 있는 공격의 가짓수와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더 많았을 것이다.

김창수의 투사가 거대한 손을 움직여 아크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아크는 투사 따위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이게 거의 다 모인 그의 힘을 방출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이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레 아크는 자신이 모으고 있던 기운을 다시 자신의 몸으로 흡수시켰다.

그리곤 대검을 고쳐 쥐고 마치 주변을 경계하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정혁은 어디선가 강한 존재가 이곳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공중에서 아크를 향해 낙하하고 있는 것은 어떤 남자였다.

남자는 말 그대로 아크를 조준한 듯 그를 향해 정확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크는 그를 발견하곤 오히려 웃으면서 공중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공격이 가소롭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정혁은 단박에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아크라는 대악마에게 혈혈단신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자는 지금의 랭킹 1위도 뭣도 아닌 안나가 말했던 ‘그 사람’일 것이다.

아크와 그 어떤 남자는 공중에서 강하게 부딪쳤다.

그 부딪침의 파동이 공중에서부터 지면으로 맹렬히 뻗어 나갔다. 수많은 전장의 고함과 함성들을 모두 집어삼킬 만큼 큰 소리와 울림이 함께 전달되었다.

그 모든 기운을 전부 느낀 전장의 전사들은 모두 일순간 싸움을 멈췄다가 다시 격돌했다.

그 찰나의 순간의 정적이 정혁의 오감을 압도하는 것만 같았다.

정체불명의 그 남자는 공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크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자에겐 특별한 무기가 없었다. 갑옷도 입지 않았다. 회색빛 도포를 둘러 싸맨 마치 스님과 같은 느낌의 복장으로 머리엔 회색 비니를 쓰고 붕대를 맨 두 주먹으로 아크와 싸우고 있었다.

“사령관님!”

정혁이 사령관을 급히 불렀다.

“우리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린 이제 남은 악마들을 정리하시죠!”

“…하지만!”

“아니, 아닙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아…알겠네.”

김창수는 못내 아쉽다는 듯이 허공에서 이어지는 상식 밖의 전투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도 정혁도 여기저기 데미지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틈이 생긴 이상 더 피해를 보기 전에 빨리 아군을 지원해야 했다.

정혁은 에트론과 라테의 무기화를 해제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전장 곳곳으로 흩어졌다.

녹턴은 룬다나를 다시 전장으로 보냈다.

그리곤 정혁의 살기 넘치는 표정을 기억하며 사력을 다해 드웨이크를 살려 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 상황에서 제일 자존심 상하는 사람은 정혁이었다.

어찌보면 그는 제논의 지도자로서, 또 욘마곤을 구하기 위한 구원 투수로서 이 땅에 왔고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물론 아크가 이렇게 빨리 전면전에 투입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크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이제까지 승승장구했던 탓일까? 그의 생각은 결국 자신의 오판과 교만에 의한 패착이었다.

아크는 생각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만약 제때 ‘그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분출된 아크의 힘에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억울하고 분해도 지금은 감정보다 전체를 생각해야 할 때다.

정혁은 마음을 고쳐 잡고 전장으로 뛰어나갔다.

악마 군주와 싸워 이겼던 정혁이었다.

하급 악마들은 싸움거리도 되지 않았다.

중급이나 상급 악마들, 혹은 그들의 지휘관 역시도 정혁에게는 식은 죽 먹기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들은 정혁이 전장을 누비는 속도조차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머리가 땅 위를 뒹굴고 있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정혁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러나 정혁은 위의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다. 믿기로 했다. 안나의 말로는 리안은 상상도 못할 강자라고 했다. 정혁이 ‘한’이었을 때조차 자신의 능력을 완벽히 숨긴 자였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강하다고 해 줄 만하다.

그런 그의 뒤를 이었던 두 번째 ‘오아시스’ 칭호를 가진 자.

그자가 지금 아크와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믿음은 충분히 줄 만 하지 않은가?

“대장장이! 오랜만!”

그때 정혁의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악마떼거리들 밖에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 보여, 안 보여! 두리번거리지 말고, 헛수고니까!”

“뭐야! 뭔데!”

정혁이 달려드는 헬하운드의 머리를 박살내며 허공에다 대고 외쳤다.

“나, 유르겐! 기억해?”

이름이 툭하고 튀어나오자 정혁이 유르겐이라는 이름을 곱씹어 봤다.

정혁의 마나를 훔쳐 썼던 그자.

안나가 아마 이 땅에서 ‘그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확실히 저 남자는 ‘그 사람’이 맞다.

정혁은 날아다는 리치의 암흑구를 되받아치며 말했다.

“소기의 성과를 거뒀나 보네?”

“뭐, 보시는대로!”

어디로 어떻게 숨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르겐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정혁의 곁에서 계속 따라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때에 비하면 그리 강해진 것 같진 않은데? 실망이야?”

“야이씨!”

정혁이 허공에다 대고 버럭 고함을 쳤다.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성격 긁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유르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멍청하게 한 분야의 힘만 사용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시간의 주관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금빛 마나! 그걸 단련하라고 바보야!”

모르고 있던 건 아니다. 정혁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마나만큼은 정말 정혁의 영역이 아니다.

‘한’이었을 때도 정혁은 오직 피지컬과 뇌지컬로만 싸움을 이어 갔다.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모두 그곳에 올인했다.

마법이니 마나니 같은 것은 전부 피를 뿜고 흘려야 하는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고집은 마나를 원천으로 힘을 축적하고 싸우는 적들에게 그에 맞는 대비책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아 주었지만 반면 자신은 그 마나를 도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를 낳았다.

개탄스럽지만 전적으로 유르겐의 말이 맞다.

대장장이로서의 능력은 이제 많이 채워졌다.

에고 장비의 활용 역시 뛰어나고 조를 통해 확장된 대장간에서의 장비 생산 역시 수월해졌다.

보수 팀이 들어가서 뚝딱뚝딱 해 버리면 금세 레어 이상의 장비들이 생산되어 쏟아진다.

채광 활성화 스킬을 통해서 압도적으로 증가된 신체 능력을 이용해 적들을 분쇄해 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앞으로 두 자리 남은 에고 장비를 채워 낸다면 더욱 강해진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편협한 시야에 갇혀 성장을 도모했다간 오늘과 같은 한계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리안. 그자가 깨어난다면 어쩌면 더 효율적인 싸움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이 독특한 마나를 사용해서 말이다.

“리안은 어때?”

유르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무아지경에 빠졌던 정혁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생각에 잠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끊임없이 악마들은 처리해 내고 있었다.

그가 멈추자 그의 주변에 제논의 병력들에 의한 방패막이 생겨났다.

긴 싸움 속에서도 잠깐 동안 엄청난 숫자의 적들을 처리해낸 덕에 주변에선 전황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 같았다.

“아직 별다른 소식을 듣진 못했어.”

정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주변에 널브러진 여러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논의 병력들과 욘마곤의 병력들 그리고 악마들의 시체가 뒤엉켜있다.

답답하고 서글픈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금방 털고 일어나야 할 텐데….”

“엘라와 안나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윽. 결국 그 나무한테 또 엮였구나.”

유르겐은 엘라와 그의 관계에 대해서 얼추 아는 것이 있는 듯했다.

‘또’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했다.

문득 정혁은 이 전쟁 통에 그와 만담을 나누고 있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단호하게 말했다.

“돕지 않을 거면 나중에 이야기하지.”

“그래. 하지만 하나만 더.”

“뭔데?”

“저 남자는 아직 너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네? 아크야 어찌 되었건 저 남자 선에서 정리될 거니까 걱정 말고 다음엔 꼭 웃는 얼굴로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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