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14화 (114/200)
  • ◈114화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에 넋을 놓을 법도 하지만 김창수는 그럴 겨를 없이 드웨이크에게 달려갔다.

    그의 오른쪽 어깻죽지와 아래팔은 완전히 없었다.

    주변은 전투가 한창이어서 누구를 어떻게 불러 그를 치료해야 할지 김창수로서는 감이 오지 않았다. 사방에 전음을 보냈지만 모두들 각자의 싸움이 바빠 어디서도 명확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녹턴! 룬다나!”

    정혁의 고함이 쩌렁쩌렁 근처를 울렸다.

    사실 김창수와 안젤리나는 정혁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마나의 힘에 억눌려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은은히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황금빛 마나는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는 그의 마스터가 얼마만큼의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리라.

    “안 튀어 오면 사지를 찢어 놓을 테다!”

    다시 한번 정혁의 살벌한 외침이 난장판인 전장 전체를 울렸다.

    자기 무리의 우두머리를 잃은 악마들의 공세가 잦아들 법도 하건만 악마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안젤리나는 이 광경이 묘하게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날아갈 것 같은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은 채 김창수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정혁의 곁으로 녹턴과 룬다나가 각각 도착했다. 룬다나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정혁에게 소리쳤다.

    “뭔데 오라가라야! 바쁜 거 안…!”

    정혁이 손을 뻗어 룬다나의 얼굴을 쥐었다. 그리곤 살벌한 표정으로 룬다나를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뒤지기 싫으면 아갈머리 여물어.”

    ‘이 빌어먹을 것들이.’

    방관자고 나발이고. 결국 똑같다. 오아시스의 일은 오아시스의 존재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정혁은 그것 역시 일리 있는 말일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자신이 게임을 게임답게’라고 외치며 ‘한’으로서, 그리고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결국 오아시스의 일은 오아시스 안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어떻게든 게임답게 해결해 나간다는 의지 역시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결코 그렇게 용납될 수 없다.

    욘마곤은 녹턴과 룬다나가 대표적으로 보호하고 지키던 구역이었다.

    그런 이 욘마곤이라는 땅이 이만큼 악마들의 공세에 밀려난 것은 어쩌면 그만큼 녹턴과 룬다나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정혁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강하고 생각보다 엄청난 수의 악마들에 그들은 지레 겁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고.

    룬다나는 모르겠지만 녹턴은 전부터 그랬다.

    마치 대의를 위한 것인 양 자신의 힘을 빌려 라테를 잠재워 주기를 원했다.

    결국 세력 다툼을 위한 것이었으면서 그 내면의 어떤 욕망을 선한 것으로 숨기고 세계를 위한 일이라는 둥 헛소리를 해 대며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했다.

    그 모습이 어디 가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힘을 보탰더라면 드웨이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고 마틴에 의해 이만큼 고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결과가 어떤가?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자네, 말이 너무….”

    정혁이 녹턴을 보았다. 그의 눈에 깊이 서린 엄청난 분노를 마주하곤 녹턴 역시 입을 다물었다.

    “만약, 만약에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드웨이크가 죽으면….”

    정혁은 룬다나와 녹턴을 번갈아 보면서 진심을 다해 경고했다.

    “니들 두 놈 다 오늘 저 군주놈들처럼 소멸될 줄 알아.”

    정혁이 천천히 룬다나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룬다나는 그의 건틀릿이 닿은 곳에서 전해지는 섬뜩한 열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정혁의 등 뒤, 정확히는 만타가 쓰러져 소멸되어가던 곳에 원형의 거대한 검은 마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그 기둥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기둥을 중심으로 검은 구름이 생성되어 그 일대를 완전히 가리기 시작했다.

    정혁은 몸을 돌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녹턴과 룬다나를 한 번씩 가리키고는 무언의 경고를 건넸다. 그러곤 천천히 그 검은 기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만타가 거의 힘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것이 그의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흔히 이 정도 수준이 되는 놈들에게는 두 번째 단계, 2페이즈라고 불리는 다음 패턴이 존재할 것이다.

    […어마어마하네요.]

    에트론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트론이라면 더욱 확실하게 그와 반대되는 저 힘의 농도와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혁 역시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가히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빨리, 이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드웨이크의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엘라라면 가능할까?’

    ‘안나는 뭔가를 알지 않을까?’

    ‘아니, 리안 정도는 되야 해결책을 알아 낼 수 있을까?’

    “에트론, 저번처럼 뭔가 획기적인 거 없을까?”

    [저번처럼이면… 종 같은 거 말이에요?]

    “그래. 시간이 없어.”

    [흠… 글쎄요… 제게는 정혁 님의 등급이 보이거든요?]

    등급? 처음 듣는 말이었다. 자신에게 등급이 보이다니?

    [정혁 님이 무기고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수준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은데, 저번에 종은 정말 제 개인적인 아이디어였고 또 무기도 아니어서 사용하실 수 있었지만… 지금 정도의 수준이시면… 아까 그 검과 방패 그 이상의 무기는 없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수준을 어떻게 올릴 수 있는데?”

    […글쎄요…? 전에 한 번 등급이 올라갔었고 그 이후로는 아직 변함이 없는걸요?]

    정혁은 그 등급. 즉, 수준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에트론과의 친밀도와 관련있다고 추측했다.

    전에 그와 나눴던 천계의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그와의 친밀도를 한 단계 높인 정혁이었다. 당장의 전투에서 친밀도를 올리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든 빠르게 한 번에 끝내야만 하는데.

    “돕겠네.”

    “나도.”

    정혁의 곁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김창수와 엄청난 암흑 기둥에 기겁했으면서도 애써 괜찮은 척 하고 있는 것 같은 안젤리나가 다가왔다.

    김창수의 뒤엔 여전히 투사가 마치 그의 분노를 드러내듯 금방이라도 기둥에게 달려들 것처럼 서 있었다. 용기사의 기운이 정혁의 곁에서 따끔하게 느껴졌다.

    [에트론, 고민해 봐 줘. 당장은 내 망치로 싸울 테니 최대한 내가 저 놈을 도륙 내는 데 효율적인 무기를 생각해놔봐.]

    에트론이 끄응 소리를 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사이 정혁의 양 손에는 그의 망치가 각각 쥐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던 기둥의 검은 빛이 뚝 하고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5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존재였다.

    […아크.]

    라테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혁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뭐, 뭔데 저거…?”

    안젤리나가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았고 김창수는 바닥에 침을 한번 뱉곤 도끼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대악마 아크였다. 이는 정혁도 예상하지 못한 등장이었다.

    그래봐야 만타의 두 번째 공격쯤으로 생각했었는데 본격적으로 본게임이 시작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검은 기둥이 거치고 등장한 아크라는 놈의 힘은 겉으로 봐도 군주들에 비해서 월등히 강했다.

    거대한 덩치만큼 아크는 전신을 해골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양손에는 하늬안의 무기처럼 거대한 대검을 각각 쥐고 있었는데 날의 형태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검고 긴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며 여섯 개의 눈과 귀까지 찢어진 입 그리고 코는 없는 괴랄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괜히 그가 공포와 고통의 대악마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고 정혁은 생각했다.

    아크는 정혁과 일행을 내려다보다가 몸집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는 대략 2m 가까이 작아져서 양손의 대검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찔러 넣고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을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그리곤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장 강한 쪽은 네놈이구나. 네놈이 만타를 죽여서 내 마지막 제약을 풀어냈도다.”

    정혁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왜 군주들과 함께 그가 등장하지 않았는지가 이해되었다.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던 거야.’

    “이들에게 네놈을 데려오라고 했건만, 그리하여 네놈의 몸을 통해 이곳에 강림하려 했거늘. 뭐,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도 괜찮다. 되레 군주 놈들이 죽음으로서 그들의 힘과 마나를 온전히 흡수하고 제약이 풀린 지금도 나쁘지 않지. 네놈의 몸은 쓰러트리고 쟁취하면 되니 말이다.”

    “무슨!”

    김창수가 고함을 치며 아크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용의 가호나 받는 나부랭이 주제에.”

    아크는 달려드는 김창수에게 손을 뻗었다.

    김창수는 그대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아크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김창수를 감쌌다.

    다행이 용의 가호 덕분에 그의 몸에 동그란 보호막 같은 것이 발동되었고 가까스로 아크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정혁은 그 틈을 이용해 놈의 하체를 노렸다.

    전광석화나 다름없는 정혁의 일격을 아크는 간단히 피하곤 한 손으로 바닥에 박힌 그의 대검 한 자루를 쥐었다.

    하지만 정혁도 한 번의 공격이 빗나갔다고 해서 멈추진 않았다.

    아크의 자연스러운 움직임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김창수를 묶어 놓고 있는 손을 두 망치로 내리쳤다.

    아크의 손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보단 그의 손 위에 있던 어떤 막을 때린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김창수는 아크의 암흑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사이로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정혁은 그 화살이 아크의 몸을 맞지 않고 앞에서 뭔가에 부딪쳐 부러져 나가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그와 김창수는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사령관님! 죄송하지만 이곳의 전투는 제게 맡겨 주시는 편이…!”

    “아닐세! 아니야!”

    김창수는 분에 받쳐 소리쳤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은 드웨이크의 안위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정혁의 마음 역시 조급해졌다.

    [경고하는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자네, 죽을 수도 있네.]

    라테가 묵직한 목소리로 작게 전음을 전했다.

    정혁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침착해야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에트론?!]

    정혁이 에트론을 재촉했다.

    [아, 아 잠깐만요!]

    에트론 역시 답답하다는 말투로 정혁에게 한마디 쏘아 놓고는 잠적했다.

    “놀러 온 겐가?”

    그 순간 정혁의 귀 옆으로 아크의 얼굴이 쑥 들어왔다.

    정혁이 기겁하며 화염의 망치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그의 주변으로 빛의 오라가 담긴 화염이 지면을 뚫고 솟아올랐다.

    아크는 뒤로 붕 날아 그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총알같이 튀어나가 김창수에게 달려들었다.

    김창수는 그의 첫 일격을 비틀어 막아 냈다.

    하지만 아크의 두 자루 대검과 맞닿은 그의 도끼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정혁도, 김창수도 그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즐거운 자는 아크 혼자뿐이었다.

    “나의 군대는 욘마곤을 결국 삼키고 말 게다. 너희들 덕분에 귀찮은 군주들도 전부 나에게 흡수되었지. 악마왕? 그자가 이 땅에서 눈을 뜨기 전에 나는 이미 이곳의 왕으로 군림하게 될 게다. 그 시작의 자양분이 되어 줘야겠다!”

    아크가 고함을 치며 김창수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투사의 두 손이 대검을 어떻게든 막아 내는가 싶었지만 투사는 아크의 검은 마나에 점점 잠식되어 무너져 내렸다.

    김창수는 재빨리 몸을 굴려 대검을 피했으나 아크는 이미 그가 피한 곳에 서서 자신의 검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 채였다.

    그대로 뒀다간 반 토막이 날 지경이었다.

    정혁이 빠르게 지면을 박차고 달려가 겨우 그의 망치로 아크의 대검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망치는 부서지지 않았을지언정 그의 신체 여기저기로 그의 대검 날 끄트머리가 파고 들어왔다. 정혁은 이빨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바, 방법이 없어요! 저자를 이길 만한 무기는 아직 정혁 님 등급으로는….]

    참담한 보고가 들렸다.

    정혁은 이빨을 깨물며 몸을 일으켜 그의 대검을 튕겨 냈다.

    저절로 깊은 한숨이 앙 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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