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러나 녹턴은 알고 있다.
지금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룬다나의 급습 따윈 간단하게 파쇄하는 저 남자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자신들에겐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녹턴은 씁쓸하게 웃으며 라테를 보았다.
어쩌면 저 망나니가 정혁 앞에서 순한 양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기야, 본래 ‘한’이었던 그 모습이 어디 가겠는가.
지금과 같은 야망, 그리고 냉철한 판단, 잔혹한 품성은 전부터 전 대륙에 파다했던 사실이니 껍데기가 다르다고 해서 속까지 바뀌었을 거라 잠시 착각했던 모양이다.
“알겠네. 자네 뜻에 따르기로 약속하지.”
룬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녹턴을 쳐다보았다.
녹턴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별히 말을 하진 않았지만 룬다나는 무언의 욕설을 정혁에게 뱉어 대는 중이었고 라테는 그 둘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고마워. 그렇게만 해 준다면 우리도 최선을 다해 저들을 밀어내볼게.”
“아마도 쉽진 않을 걸세. 자네들이 물리쳤던 군주 세 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저들이 알고 있을 테고, 그 원흉이 이 땅에 왔다는 것까지 확인 했으니 이제는 전면전으로 치달을거야. 우리도 물심양면으로 돕겠지만 자네 표현대로 저들은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네, 패색이 짙었으니.”
녹턴에 말에 정혁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 한둘의 시선은 우리가 끌 수 있을 걸세. 확인한 바로는 네 명의 군주가 전체 병력들을 통솔하고 있다네. 혼자서 넷을 상대하는 건 무리일 테니 각개로 떨어진 그들을 빠르게 정리하는 쪽으로 해 보세나.”
“오케이.”
“변수는 이번 전면전에 아크가 등장하는가 마는가 일 텐데….”
녹턴이 말끝을 흐렸다.
그놈의 대악마 타령.
정혁은 과연 그가 얼마나 강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처음 제로니막스와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싸웠던 날을 떠올려본다.
사실 그때는 정혁이 그와 싸웠다기보단 엘라와 김창수의 도움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땐 정말 사지가 찢겨 나갈 정도의 공포 속에서 겨우 정신을 붙잡고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격돌 때. 두 군주와 싸워야 했다.
라테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보다 성장한 정혁은 그들과 비등비등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둘 다 무너트렸다.
하지만 정혁도 그 이후에 자신의 회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마지막으로는 데카와의 싸움이었다.
데카는 군주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고 흥분하면 할수록 강해지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피지컬적으로 대등했지만 한 번의 방심과 길어진 싸움의 양상 때문에 정혁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때 만약 정혁이 에트론 덕분에 강해지지 않았었다면 데카를 상대로 완전히 고꾸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와의 싸움으로 정혁은 자신이 이제는 웬만한 암흑 마법엔 완전 면역인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에트론의 무기들이 악마들을 상대로 얼마나 강한 힘을 보여 주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에고 장비들도 덩달아 강해진다.
이는 데카와의 싸움에서도 확실시된 사실이다.
정혁의 힘을 라테는 당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지만 이제는 정혁의 힘을 완전히 받아내 자신의 힘으로 바꿔 낼 수 있을 만큼 적응을 마친 뒤였다.
라테는 이제 약해져 가고 있는 녹턴과 룬다나보다 월등히 강할 것이다.
애초에 그는 가이아의 힘까지 품고 있는 데다 정혁에게 모든 힘을 이어 받고 있기 때문에 건틀릿 상태에서 발현하는 화염의 힘이나 혹은 본연의 모습에서 가지고 있는 힘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에트론은 라테만큼의 힘을 발휘할 순 없겠지만 염구 덕분에 숙달된 정혁의 미세 감각을 토대로 빠르게 악마 군단을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제와 같이 영궁을 사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혁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뻗어 나와 있었다. 아무리 대악마라고 할지라도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부딪쳐 봐야 한다. 뭐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맞닥뜨려 봐야 답이 나오는 법이다.
“오히려 면상이나 한번 봤으면 싶은데?”
녹턴은 정혁의 호쾌한 대답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이런 미소가 부디 오래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욘마곤의 병력이 다가오자 김창수가 녹턴과 룬다나에게 인사를 하고 욘마곤의 병력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고 부대를 나누어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정혁은 그의 머리 위를 높게 비행하고 있던 까마귀를 호출했고 병력들은 곧 전투 대열을 완전히 갖추었다.
***
“…그가 느껴진다.”
깊고 어두운 지하.
빛 한 자락도 들어오지 않는 이 깊은 공간에 넓은 원형 홀이 있다.
누가 몇이나 있는지 제대로 분간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어둠 속에 그 정가운데에서 거대하고 무게 있는 어떤 형태의 존재가 팔을 허공에 들어 올린 채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네 개의 형상들이 보였다.
보인다기보단 그들이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어두운 기운 때문에 흐릿하게 그곳에 있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가운데 있던 존재의 손에 푸르스름한 빛 덩어리가 모이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빛 덩어리는 빛임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칙칙했다.
“아크시여….”
그의 앞으로 전신이 검은 갑주로 뒤덮인 어떤 존재가 걸어 나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전쟁 준비를 마쳤나이다.”
“욘마곤을… 완전히 삼킬 수 있겠는가?”
“이번에야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크의 물음에 무릎 꿇은 자가 굳건히 대답했다.
“…그를 잡아 와라. 반드시. 내가 취할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아크의 네 손에 빛나던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그의 손 안을 타고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의 몸은 그 빛을 흡수하자마자 몇 번 발광하다가 갑작스럽게 그 빛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빛이 닿는 곳마다 폭발이 일어나고 어둠 속에 있던 원형 홀은 그대로 야외로 완전히 드러났다.
원형 홀은 그대로 어두운 하늘의 공중으로 부상했다. 그들의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악마 군단이 응집해 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자 뒤에 있던 악마의 머리를 가진 야수 형태의 거대한 악마가 등에서 뿔 나팔을 꺼내 크게 불었다.
웅장한 뿔 나팔의 소리가 울리자마자 지상에 있던 악마 군단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에 검은빛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역병과 저주가 물든 땅이 점점 주변의 땅을 잠식해 들어가고 악마들의 고함과 비명이 그들끼리의 싸움으로 번졌다가 사그라든다.
이곳이 과연 오아시스인가. 이곳이 과연 자연의 땅 욘마곤인가.
그들은 곧 자신들의 적을 향해 일제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
“곧입니다!”
최전방 경계 위치에서 근무를 서던 병사가 정혁의 앞에 순간 이동으로 나타나며 소리쳤다.
이 플레이어가 있었던 곳은 지금 이 전선으로부터 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달려온다면 10분 남짓일 것이다.
“다른 특이점은?”
드웨이크가 그에게 물었다.
“원형 홀 같은 것이 지면을 뚫고 악마들 사이에서 공중으로 솟아올랐습니다. 엄청 컸고 그 안에 몇몇의 악마들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약간의… 지휘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놈들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건가?”
그때 그들의 곁으로 안젤리나가 등장했다. 공중에서 양탄자를 타고 등장한 그녀는 재빨리 지면으로 착지해 자신의 활과 화살을 정리하고 그들 옆에 섰다. 김창수가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지만 안 본지는 한참 된 사이이기도 했다.
“함께하죠.”
안젤리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정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녹턴과 룬다나가 반갑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안젤리나는 그들의 눈인사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아크가 저 안에 있습니다.”
안젤리나가 허공을 가리켰다. 저 멀리 높은 곳에 검은 어떤 것이 떠 있었다. 홀의 크기가 꽤 큰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도 저렇게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와 함께 악마들이 진군하는 곳에서부터 검은 구름과 역한 냄새들이 바람을 타고 아군의 진영까지 전해지기 시작했다.
“아크와 네 명의 군주가 함께 있는 것을 확인했어요. 그들은 당장에 전면에 나서지 않을 속셈인 것 같네요.”
안젤리나의 말은 김창수의 판단과 맞아떨어졌다. 정혁은 그들의 행동이 조금은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일전에 전투는 기억도 안 나나 보지?’
그는 혀를 차며 인상을 썼다.
“일단 기다려 봐요. 기를 죽여 놓을 테니까.”
정혁은 당당히 그들에게서 벗어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령관님. 하늘에 불꽃이 솟아오르면 그때 전군 진격시키세요. 저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는 만큼의 응징을 좀 해야겠습니다.]
[괜찮겠나?]
[뭐 있겠습니까. 몸 좀 풀겠습니다.]
[알겠네.]
짧은 전음을 끝으로 정혁이 몇 걸음 더 나아가자 지면으로부터 잔진동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곧 저 앞에 먼지구름이 보였고 그 뒤로 여러 괴상한 소음들이 따라왔다.
검은 구름 속에서 빗방울 같은 것이 쏟아지는 것 같다. 정혁은 건틀릿에서 라테를 다시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곤 라테에게 마음대로 날뛰어도 좋다는 듯이 눈짓을 했다. 라테는 가이아의 잔해들로 단단히 결속된 자신의 불타는 양손을 두둑거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에트론이 정혁의 곁으로 날아와 무엇을 원하냐는 듯이 바라보자 정혁은 이전처럼 영궁을 주문했다. 그의 작은 손이 열쇠 꾸러미를 찾다가 하나의 열쇠를 쥐고 허공에 찔러 넣는다. 곧 문이 생기고 빛과 함께 영롱한 영궁의 활자루가 드러난다. 정혁은 그것을 손에 쥐고 강하게 당겼다.
[영궁 아르간티아]
- 조율의 천사장 소유의 활
- 에트론과의 계약으로 임시 대여 가능
- 친밀도 상승으로 대여 시간 증가 ……25:00
정혁은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영궁의 시위를 당겼다.
하나의 거대한 화살이 영궁의 시위 안으로 빛무리가 되어 걸리고 정혁은 당길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당겼다가 허공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거대한 화살이었던 빛무리는 허공에 뿌려지고 이는 곧 화살비가 되어 전방위에 번쩍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수십 번 영궁을 적들에게 쏟아 부었다.
영궁의 시위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을 써야 하지만 정혁은 그들에게 무시당했다는 분노에서부터 그 힘을 모두 끌어낼 수 있었다.
화살이 공중에 뿌려질 때마다 마치 번개가 치는 것 같은 빛이 사방을 밝게 수놓았고 수놓은 빛만큼이나 많은 수의 악마들이 정혁의 앞에 다가와 보지도 못하고 땅 속에 고개를 처박으며 쓰러졌다.
앞 열이 시체로 수북해지자 정혁은 그때서야 영궁을 고쳐 뒤로 맸다.
그리곤 라테와 함께 고함을 내지르며 시체들을 밟고 달려드는 악마들의 중앙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는 라테가 쏘아 올린 불꽃이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것을 신호로 조금 뒤에 물러서 있던 제논과 욘마곤의 연합 병력이 전장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