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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108화 (108/200)
  • ◈108화

    욘마곤에서의 정신없는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정혁이 떠나고 안젤리나는 다시 제논의 전초기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창수는 그를 따라온 드웨이크와 함께 5만의 병력들을 각각 분할해서 그들을 이끌 단기 지휘관을 꾸렸다.

    역할과 목적에 맞게 부대를 분산하고 각각에 부대에 투철한 사명감을 부여했다.

    정혁이 자부했던 대로 제논의 병력들 전체의 분위기는 침울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은 오아시스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들의 이름이 장식되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고 제논과 연합한 여러 종족들과 세력들도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의의 싸움에 뛰어들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들이 욘마곤에 도착했을 때 욘마곤의 피난민들이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 역시 전 병력들의 사기를 돋우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런 분위기는 김창수와 드웨이크에게도 힘이 됐다. 무리한 작전 지시에도 나눠진 부대의 지휘관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정혁은 못내 불안한 마음에 간 밤 전초기지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모두 밝은 웃음으로 정혁에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정혁은 그들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플레이어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다음이 있다.

    물론 죽음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큰 리스크다.

    고통은 실제로 적용되고 그 장면은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다음이 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창조된 여러 종족들은 입장이 다르다.

    그들에게 다음은 없다. 죽으면 그대로 그들의 ‘데이터’는 소멸되는 것이다.

    자율적 시스템이 최고등급인 오아시스에서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판단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어쩌면 정혁이 이들을 부추긴 꼴이 아닌가 싶은 작은 죄책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앞으로의 전쟁에서 손실은 최소화해야만 한다.

    그렇게 그리 길지 않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슬이 축축히 깔리며 파도 소리가 조금씩 커질 무렵 저지선 최전방에 불침번 근무로 파견 나갔던 병력들이 각각 돌아와 급히 전황 보고를 하면서 전초기지 전체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병력들은 즐거이 웃으며 첫 전투를 준비했지만 그 웃음 속에 숨겨진 불안과 공포를 정혁은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일찍 까마귀를 타고 공중을 비행 중이었다. 전초기지 전체를 돌아보던 중 정혁은 욘마곤의 피난민 밀집 지역에 특별한 움직임이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서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녹턴과 룬다나가 욘마곤의 피난민들 사이에서 소규모의 병력들과 함께 제논의 전초기지로 향하고 있었다.

    “녹턴? 전쟁에 참여하려고?”

    정혁이 까마귀에서 녹턴 앞으로 뛰어 내리며 말했다. 그리곤 전날의 일들이 생각나 룬다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자네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녹턴의 대답에 정혁은 안젤리나의 말을 떠올렸다.

    [정혁. 진작 말해 주고 싶었네만 선을 분명히 해야 하네.]

    [선?]

    순간 그의 곁에서 부유하며 녹턴과 룬다나를 번갈아 보고 있던 라테가 전음으로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어제 그 여자가 했던 말 기억하나?]

    [정령왕들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 뭐 그런 뉘앙스의 말?]

    [나 역시 정령왕이지만 우리는 세계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태생적으로 부여된 임무이자 목적이라네. 어쩌면 녹턴과 룬다나도 이 본질적인 존재 의미를 크게 거스를 수는 없을 거야. 내 말은, 그들이 우리를 돕는 것에 대해서 어떤 성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말일세. 나야, 자네에게 귀속된 것만으로도 이미 본질적인 존재 의미를 거슬렀지만 저들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결국 중요할 땐 뒤로 뺄 게야. 게다가.]

    녹턴이 말이 없는 정혁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욘마곤에서 우리가 승리한다고 가정했을 때 분명 적반하장의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네. 욘마곤은 자연의 땅이니 기존의 체제로 복구시키겠다고 하겠지. 자네, 이곳의 악마들을 몰아내려고 왔긴 하지만 더불어 이곳을 타이런을 취하기 위한 첫 발판으로 삼으려는 것이 또 다른 목적이지 않은가?]

    라테의 전음은 정확했다. 명분.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타이런에 발을 들이기 위한 명분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들에게 미리 언질을 하게. 갑작스러운 뒤통수로 정령왕들의 분노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하네. 자네가 저들만큼 강하거나 혹은 저들보다 강하겠지만 저들과 적이 된다면 욘마곤의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 없을 것이네. 이곳은 자네들 같은 인간들보다 자연의 존재들이 월등히 많은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제논의 목적은 어느 정도는 흘려 줘야 할 필요가 있어.]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룬다나가 조금 거친 말투로 말없이 서 있는 정혁에게 툭 한마디 던졌다. 정혁은 굳어 있던 표정을 거두고 활짝 웃으면서 앞으로 함께 가자는 손짓을 했다.

    “피난민들 가뜩이나 힘들 텐데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대형을 갖추고 있는 제논의 병력들을 향해 걸으며 정혁이 룬다나에게 말했다. 룬다나는 정혁을 한번 흘깃 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렸다. 녹턴이 민망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닐세, 우리의 일이니 우리도 도와야지.”

    “그래 준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정혁이 뒤를 따르는 병력들의 얼굴과 행색을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전투 의지는 없어 보이는데.”

    “뭐, 그래도. 그래도, 힘을 보태고 싶네.”

    정혁은 그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느꼈다.

    “룬다나도 나도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네. 세계는 균형이 제일 중요하다네. 가이아가 사라지고 라테는 망나니 같은 기질 덕분에 정령왕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네에게 귀속된 소환수 따위가 되어 버렸지.”

    정혁은 ‘소환수’라는 말에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짐을 느끼곤 라테의 불편한 심경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정령왕에게 소환수라니 이는 직접적인 라테에 대한 모욕이었다.

    라테가 정혁의 에고 장비가 되었던 과정이 녹턴이 원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자신은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노라 하는 뻔뻔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미 균형은 깨어졌는데 이번엔 악마들까지 중간계로 들이닥쳤다네. 그 덕분에 우리의 힘은 줄어들었어. 대륙의 곳곳에서 느껴지던 나의 정령들의 힘도, 규모도 줄어들었고 그에 반해 악마들의 힘과 세력은 불어나기 시작했지.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네. 약해진 힘이라 해도 우리는 정령왕일세. 강하다고 교만 떠는 인간들보다야 훨씬 도움이 될 걸세.”

    정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리사이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안나가 말했듯, 리사이클이 벌써 시작되었다면 세계는 긴 역사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리사이클 자체가 균형을 붕괴시키는 불쾌한 행위이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려는 존재들의 힘은 줄어들고 균형을 무너트리려는 존재들의 힘은 강해지지 않을까?

    그의 추측이었지만 이게 맞다면 녹턴과 룬다나는 본래 모든 플레이어들이 알고 짐작하던 강함보다 못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곳에서 악마들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내고.”

    정혁이 잠시 숨을 고르며 앞을 걸음을 멈췄다.

    “내가 대악마 아크까지 소멸시켜 버린다면. 그 이후에는 어쩔 셈이야?”

    라테가 확실히 해야 한다고 말했던 부분이다.

    정혁이 멈추자 녹턴과 룬다나 역시 걸음을 멈췄다. 녹턴의 미간이 작게 일그러졌다. 룬다나가 거칠게 물었다.

    “어쩔 셈이냐니? 무슨 말이지? 네가 욘마곤에서 악마들을 몰아냈으니 뭐 대가를 바쳐야 한다는 말이야?”

    룬다나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느끼고 녹턴이 팔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그의 푸른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허공에서 움직였다. 푸른 눈동자 역시 가만히 정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럴 땐 자네, 정말 본래의 그 모습 같구만.”

    “수지 타산이 맞아야 장사를 하지.”

    조금 뻔뻔한 정혁의 말에 룬다나가 격분했다. 라테가 덩치를 불리며 룬다나의 분노에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녹턴 역시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 저 인간 나부랭이 따위가 우리하고 건방지게 거래 따위를 하자고 흥정하는 거잖아!”

    룬다나의 두 손에 작은 돌풍이 몰려들었다. 정혁은 작게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거래…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성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불쾌하십니까? 그럼 뭐.”

    정혁이 손으로 조금 멀리 떨어져 그들을 따라오고 있는 욘마곤의 병력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끼리 알아서 해 보시렵니까?”

    룬다나가 분개하며 양손에 모아둔 돌풍을 그대로 정혁에게 날려 보냈다.

    바람의 정령왕답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펼친 공격이라 라테와 녹턴도 어째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혁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소용돌이 돌풍을 양손에 쥔 전력의 망치와 화염의 망치로 가볍게 상쇄시켜 허공으로 흩어 보냈다. 열풍과 번개가 뒤섞인 소용돌이는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사라졌다.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사라진 그녀의 공격에 룬다나는 당황했다. 녹턴이 조용히 말했다.

    “강하다고 교만해 하는 인간들이야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정혁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선을 떠난 지 오랩니다.”

    녹턴의 말에 룬다나가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녹턴이 차분하게 묻자 정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손에 있던 두 망치는 어느새 없어진 후였다.

    “그저 전쟁이 전부 끝났을 때 욘마곤이 제논 연합에 호의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야.”

    “…그 정도라면.”

    “앞으로는 어떤 일이 더 펼쳐질지 몰라. 우리 제논은 적극적으로 타이런의 권력 다툼과 각종 분쟁에 개입하려 해. 그러려면 욘마곤으로부터의 안정적인 지지가 필요하지. 욘마곤의 정신적 지주 격인 두 분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신뢰해 준다면 우리 역시 이곳에서 마음껏 활개 치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 정도까지였군.”

    녹턴이 작게 불쾌함을 표했다. 이는 녹턴에게도 룬다나에게도 꽤 실례가 되는 언행이었다.

    욘마곤에 일반 플레이어들이 많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터줏대감 행세를 하고 있는 두 정령왕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람의 정령왕 룬다나는 늘 바람 속에 숨어서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의 존재감은 욘마곤에 발을 디디는 순간 사방에서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녹턴은 여기저기서 자신의 의지를 조용히, 보이지 않게 욘마곤 내부에 표출했다.

    이 두 거대한 존재가 주무르는 욘마곤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들보다는 오아시스의 각 종족들과 존재들이 활동하기에 훨씬 편하고 안정적인 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은 욘마곤 자체의 근간뿐 아니라 균형을 유지하는 그들의 존재 이유 조차 침범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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