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07화 (107/200)
  • ◈107화

    “솔직히 첫 번째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정혁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정혁은 고개를 까딱하며 ‘그래서?’라는 느낌의 제스처를 건넸다.

    속으로 자신이 되레 거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뭐,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단정 지었다. 어째 ‘한’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직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강하시군요.”

    “상당히라는 표현 자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

    정혁이 거드름을 피며 말하곤 이공간을 열어 그 속에서 자신이 최애 하는 의자를 꺼냈다. 자수로 장식된 나무 의자를 내려놓고 그는 그 위에 편안히 앉았다.

    안젤리나 역시 눈치를 보다가 바위 위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밝은 햇빛이 비춰졌다. 이전에 당당함은 사라졌고 조금 위축되어 있는 그녀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매력적인 느낌을 주는 여자라고 정혁은 생각했다.

    “정령왕들을 믿나요?”

    안젤리나가 정혁에게 물었다. 정혁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에 안착되어 있던 라테를 해제해 그를 정령의 모습으로 등장시켰다. 안젤리나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테는 안젤리나를 보며 말했다.

    “동감이네, 정령왕들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되지, 라테와 가이아를 제외하면 말이야.”

    라테의 말에 정혁이 피식 웃었다. 안젤리나는 무성한 소문들이 정말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가 들은 소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며 그 소문은 모두 허구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그 모든 소문들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그의 거들먹거림이 이해가 된다. 그는 어쩌면 혼자서 군주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강함을 아니, 대 악마와도 겨룰 수 있을지 모른다.

    “…불의 정령왕 라테마저 당신의 무기가 된 건가요?”

    안젤리나가 묻자 정혁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봤잖아?”

    그는 이제 그녀와의 이런 불필요한 대화들이 시답잖다고 느껴졌다. 전선을 밀어내긴 했지만 악마들은 금세 다시 해안가로 밀려들 것이다.

    아마도 그쪽에서 충분히 정혁의 존재와 라테의 기운, 어쩌면 에트론의 기운까지도 감지했을지 모른다. 총공세가 이어질 것이다. 그런 대공세를 앞둔 제논의 병력들에겐 시간이 금이나 다름없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냥 보내 줄 수 없겠는데? 그런 취급이나 당하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거든.”

    정혁이 낮고 차갑게 말하자 안젤리나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분위기를 알아채고 말했다.

    “두, 두 번째는 전황을 알려 드리려고 했어요. 정령왕들에게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실질적인 전선에서 싸우지 않았죠. 녹턴은 오아시스의 일은 오아시스의 존재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고집을 부리는 터라 결국 욘마곤의 최전선엔 욘마곤의 자치 병력들이 그들의 힘으로 막아 내야 했거든요. 룬다나는 원래도 고집불통에 세상 돌아가는 꼴에는 전혀 신경을 안 써서 오히려 지금 이렇게 해안가에서 피난 온 자들을 돌봐 주고 있는 쪽에 감사해야 할 처지죠. 얼마나 자세히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상황은 꽤나 심각합니다. 상대는 대악마 아크를 필두로 다섯의 악마 군주와 연합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병력들로 응집되어 있어요. 그들이 밟고 있는 대지는 이미 타락으로 물들었고 그 타락의 기운을 집어삼키며 놈들은 세를 더 불리고 있고요. 쓰러진 욘마곤의 병사들이 그들의 죽음의 병력들로 이용되고 있는 것 또한 한몫을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절망적이네.”

    정혁이 잠시 그 상황 전체를 그려 보며 중얼거렸다. 안젤리나는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평온한 그의 모습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조금의 안도를 느꼈다. 그는 이미 악마 군주들과 싸워 본 전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이도 소문인 줄 알고 믿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능력을 보면 믿을 수밖에 없다. 악마 군주 셋을 쓰러트린 플레이어. 만약 ‘한’이었다면 가능했을까? 어떻게 이런 이단아가 세상에 등장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악마들의 전선을 뒤로 물렸을 땐 군주들은 없었는데, 그들은 어디 있지?”

    “이미 한 차례 싸우신 겁니까?”

    “응. 그러고 보니 넌 그때 없었네?”

    정혁의 물음에 안젤리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랭커의 죽음을 알리고 다른 국가에 급히 도움을 청하러 갔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냉랭하더군요. 우리에겐 정령왕이라는, 그렇게 자랑하고 떵떵거리던 놈들이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답변이었죠. 우리 속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다들 정이 없구만.”

    정혁의 핀잔을 던졌다. 안젤리나는 그의 핀잔에도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다음 말들을 이어 갔다.

    “제논에서는 얼마의 병력들이 넘어오는 겁니까?”

    “5만 정도.”

    “5만이면 턱없이 부족해요!”

    안젤리나가 고함을 쳤다. 정혁은 그녀의 고함에 고개를 살짝 들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려.”

    “…저들의 수는 10만이 족히 넘어요. 게다가 악마 군주에 대악마까지 있고 우리가 죽으면 저들의 병력이 되죠. 이런 상황에서 수적 열세까지 안고 간다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 될 겁니다. 아무리 정혁 님께서 강하시다고 해도 군주 다섯과 대악마 아크를 혼자서 상대하실 순 없잖아요! 혼자서 상대하신다고 해도 나머지 병력들은 누가 보호하죠? 대책 없이 달려들었다간 욘마곤의 꼴을 그대로 따라가게 될 거예요!”

    “다 말했어?”

    정혁이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안젤리나는 그의 기세에 눌려 마른 침만 삼킬 뿐이었다.

    “지금 이 대륙 전체에서 마계의 악마 군단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이긴 국가가 어디 있어? 마계의 악마들과 싸운 경험이 있는 자들은 몇이나 되고? 너희 랭커들이나 혹은 힘 좀 쓴다는 상위권 플레이어들이라면 모를까 저 바닥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악마들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조차 못 하고 있을 거야. 이 타이런은 각자 이권 다툼 때문에 서로 국경이나 틀어막고 있을 뿐이니 더하겠지. 그러나.”

    정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뒷발로 의자를 걸어 위로 올려 찼다.

    의자는 허공에 열린 이공간으로 빨아들여지듯 사라졌는데 의자가 들어가면서 왠지 조의 짜증 섞인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혁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그들과 두 번 이상을 맞붙었어.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결국 이겼어. 결국 이겼다는 경험이 얼마나 병력들에게 귀중한 것인지 너라면 잘 알 텐데? 5만의 전 병력이 반드시 이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 왔어. 또, 네가 실수한 건 우리 제논에 실력자가 없다는 너의 판단이야. 실력자? 제논에는 넘쳐. 그 작은 대륙을 서로 처먹어 보겠다고 지랄 발광을 했었다고. 빌어먹을 엘프들부터 시작해서 인간들은 끼리끼리 세력을 나누고 어디는 모이고 어디는 흩어지고 누구는 저 밑바닥 황량한 땅에 묶여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도 하고 저 위에는 악마 새끼들하고 결탁한 잔악무도한 제국이 있기도 했지.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인 곳의 환경이랑 이미 갖춰질 대로 갖춰진 체계 안에서 서로 호의호식하면서 군사 자랑이나 해 댔던 이 땅이랑 분위기가 같을 것 같아?”

    안젤리나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정혁이 쏟아내는 말들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게다가 니네들 그 랭커 시스템도 문제지. 용의 가호를 받았다고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 군림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솔직히 니들끼리 속닥속닥해서 순위 매긴 거 아냐? 김창수가 10위라고?”

    안젤리나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김창수라는 이름에 조금 놀랐다.

    “…어…김창수 씨께서도 오셨나요?”

    용의 가호를 받은 뒤 ‘한’을 재공격하기로 다짐한 자들이 모인 자리에 유일하게 참석하지 않은 자.

    무시할 수 없는 강자.

    “거 봐, 너 지금 당황하잖아. 몇 위가 죽어? 6위? 아무리 군주들이 강하다 해도 오아시스의 전체 랭킹 6위가 그들에게 죽었다고? 숫자조차 줄이지도 못하고? 게다가 너도 있었을 거고 그 아래 욘마곤에서 강하다는 플레이어들도 있었을 텐데 그걸 져 가지고 이 지경을 만들어? 낯 뜨거운 줄 알아야지.”

    조목조목 가슴을 찌르는 가시 같은 말들에 안젤리나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한 가지 더. 내 병력들은 모두 내가 만든 최소 레어급 이상의 아이템을 지니고 있어. 5만이 모두. 알지? 무기와 방어구가 전투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장담하는데 제논의 팀장들은 용의 가호 따위가 없어도 너희들과 일대일로 충분히 붙을 만할 거야.”

    정혁이 손가락을 딱 치자 그의 허리춤에서 염구 8개가 튀어나왔다.

    안젤리나는 그의 주위를 배회하는 염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전설급 재료인 동시에 투척류로 분류되는 특별한 장비.

    “우리 팀장들의 무기에는 모두 이 염구의 속성이 부여되어 있지. 어때, 우리 팀장들과 붙어도 너는 여전히 랭커라고 떳떳하게 떠들 수 있을까?”

    안젤리나는 좌절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무기가 빈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활과 화살은 모두 평범하지 않고 강력하며 보증된 장비다.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이 두 무기를 쥐고 세계를 누볐고 많은 적들을 무너트렸다. 그녀의 화살에는 용의 기운이 담겼고 그녀의 활시위는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 명도 아니고 제논의 간부급 인물 모두가 전설급 재료가 벼려진 무기를 착용하고 있다면 이는 상대적으로 랭커들의 입장이 난처해 질수도 있다.

    물론 정혁의 비유가 모두 맞다고 할 순 없다.

    용의 가호라는 특별한 버프는 이들을 랭커로 만들어 줄 만큼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었고 더불어 그 힘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강한 자들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에 받는 순간부터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들이라면 정혁의 말대로 전설급 재료를 기반으로 한 무기를 지닌 제논의 팀장들과 한바탕해 봤을 때 당연히 그들이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굳어져 버린 랭커들의 심장과 생각은 신흥 강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부딪쳐 이기기보단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바빴다.

    안젤리나도 그 꼴이 보기 싫어 욘마곤으로 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과 부딪쳐 본다면 어떨까? 글쎄, 확답할 수가 없다.

    “더 이야기하고 싶진 않아. 그래도 충고는 감사히 받아들이지. 개인적으로 녹턴은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혁이 이 말을 내뱉고 아차 싶어 옆에 있던 라테를 바라보았다.

    라테에게 특별히 불쾌하다는 느낌의 반응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늘 라테의 일 앞에서만 난리 법석이었던 것 같기도 해. 어쩌면 상식적으로 녹턴과 룬다나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이 모든 사태에 가담했다면 욘마곤이 이 지경까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되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욘마곤을 군단의 침공에서 버티게 만들 거야. 그리고 종국엔 포커스를 우리 쪽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돌릴 거고.”

    정혁이 휘파람을 불자 어딘가에서 배회하던 까마귀가 날아 내려왔다.

    “생각해 보고 힘을 보태려거든 언제나 이야기해. 혹시 알아? 네가 쥐어 보지도 못할 무기를 내가 건네줄지.”

    정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까마귀와 함께 힘차게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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