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06화 (106/200)
  • ◈106화

    에트론의 물음에 정혁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어떤 존재일까? 어쩌면 이제까지 정혁과 오아시스의 일행들의 뒤를 봐주던 존재와 같은 결의 존재일 수도 있다.

    세계에 흐름에 관여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는 자들과 대립하는 또 다른 자.

    그자를 신뢰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도 그가 짜 놓은 체스 판에서 그의 의지와 목적대로 움직이는 체스 말 따위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혁은 조금 불쾌해졌다.

    이 역시 아무리 선하다 해도 그의 가치관에 반하는 부분이다.

    현실에서조차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주변의 강요와 요구 속에서 부품처럼 살아가는데 게임 속에서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게 정혁의 생각이었다.

    정혁은 다시 에트론을 바라보았다.

    에트론은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자가 원하는 건 네가 하드린을 막아 주는 것일까?”

    정혁의 물음에 에트론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요? 그렇기 때문에 제게 정혁 님의 정보도 알려 주고 제 힘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중간계로의 이동 역시 가능하게 해 주지 않았을까요?”

    어찌 되었건 정혁은 하드린을 찾아야 한다.

    이 모든 분란의 씨앗, 그 중심에 그 천사가 있기 때문이다.

    정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그였지만 그럴수록 더 큰 그림자가 몸을 덮는 느낌이었다.

    최정상이었던 기분을 다시 느껴 보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 올랐다 해도 과연 자신이 최정상인지를 의심해 봐야 할 지경이다.

    [에트론이 당신에게 의지합니다.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시스템의 알람창이 떴다.

    에트론은 정혁을 바라보고 있진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약간의 개운함이 느껴졌다.

    본디 고민이라는 것은 혼자 안고 있으면 있을수록 커지는 법이다.

    어떻게든 자초지종을 풀어냈으니 녀석도 한결 마음이 나을 것이다.

    결국 함께 해 나가야 하는 여정이니까.

    “일단 나가자 에트론.”

    “더 궁금한 건 없으세요? 무기고의 무기들이라든지?”

    에트론의 물음에 정혁이 잠깐 멈칫했다가 어깨을 으쓱하며 말했다.

    “열쇠지기인 네가 알아서 열어 줄 거라 믿을게. 사실 나도 닥치면 해치우는 편이라 미리 알려 줘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에트론이 빙긋 웃으며 작고 동그란 구체 안에 몸을 숨기고 특유의 밝은 빛을 뿜으며 정혁의 곁으로 날아왔다.

    그는 조에게 인사를 건네고 공간을 열어 다시 오아시스로, 혼란 속의 욘마곤으로 향했다.

    ***

    전초기지를 짓는 것은 금방이었다.

    수석 석공과 목수들이 지시하는 대로 보수 팀의 모든 일꾼들과 전장에 투입된 병력들이 일치단결하여 나쁘지 않은 기지를 세울 수 있었다.

    정혁을 위한 공간과 팀장들, 그리고 지휘관들이 회의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었고 기지가 완성되자마자 주변으로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숙소들이 건설되었다.

    정혁은 까마귀를 불러 공중에서 이 놀라운 장면들을 지켜보았다.

    몇 시간 안에 이렇게나 훌륭한 기지가 건설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오아시스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정혁은 기수를 돌려 해안가로 향했다.

    흔히 볼 수 없는 자연의 종족들부터 인간들, 엘프, 수인족들, 정령들이나 소수의 오크까지 욘마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종족들이 군데군데 밀집해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녹턴과 룬다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 복잡하고 혼란한 곳의 상공을 비행하면서 정혁은 제논의 병력들이 과연 이 끝자락의 희망을 완전히 지켜 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군주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지만 아직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대악마의 힘은 어떨지 모르겠다.

    데이터가 없는 전투는 눈을 가리고 전장에 나선 상태나 다름없다.

    웬만하면 대악마까지 중간계로 넘어오기 전에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세상만사 마음대로 흘러간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이겨 낼 수밖에.

    그때 아래서 강한 돌풍이 불어오더니 까마귀가 작게 소리를 지르며 휘청였다.

    그리고 정혁의 곁으로 어떤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까마귀보다 조금 더 큰 양탄자 같은 것을 타고 있었다.

    갈색 긴 머리에 검은 눈동자. 등 뒤로 큰 활과 화살집을 메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단단한 방어구보다는 얇고 효율적이며 탄성을 가진 재질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마에는 날개를 펼친 새 모양의 머리띠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여자는 정혁의 곁에서 비행하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해 뒤로 묶었다.

    긴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왔다.

    그런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혁은 곧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즉사의 화살 안젤리나.”

    여자는 자신의 이름이 정혁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놀랍다는 눈빛으로 정혁을 쳐다보곤 약간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따라오라는 듯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양탄자에 속도가 붙고 정혁은 기수를 돌려 그 뒤를 따랐다.

    안젤리나의 현재 랭크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정혁이 ‘한’이었을 때는 그렇게 높은 랭크에 위치해 있지 않았었다.

    당시에 전해 듣기로 그녀는 원거리 공격에 병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암살자도 아니면서 멀리서 활과 화살을 이용해 적들을 습격하기를 즐겨 했고 타고난 인체 해부 지식 덕분에 멀리서도 약점을 파악하고 일격에 죽이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뭐, 넘사벽에 가까운 실력을 가진 ‘한’ 입장에서는 총도 아니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덤비는 그녀가 가소롭기만 했다.

    기억으로 아마 그녀는 과거에 랭커들끼리 연합해서 ‘한’을 잡으러 왔던 자칭 한’s 레이드 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장황한 소문에 비하면 별다른 임팩트는 없었던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김창수와 비슷한 느낌이 그녀 곁에 맴돌고 있다.

    일전에 안나가 말했던 랭커의 위치에 있는 걸까?

    시간이 꽤 지났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악마들의 침공에도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양탄자가 매끄럽게 숲 한가운데로 착지한다.

    다행히 숲속은 조용했고 햇빛은 따뜻하게 그들이 안착한 곳을 비추고 있다.

    안젤리나는 묶었던 머리를 풀어 몇번 고개를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머리가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정혁의 까마귀는 몇 번 울부짖곤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양탄자는 그녀가 지면에 발을 닿자마자 빛을 내며 사라졌다.

    안젤리나는 정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혁도 구태여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안젤리나는 정혁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 그의 뒤에 있던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지나갈 때 옅은 허브 냄새가 난 것 같았다.

    정혁은 뒤를 힐끔 보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행동이 불쾌하다는 느낌이 들어 몸을 돌리고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젤리나는 정혁의 태도에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제논의 새로운 지도자라지?”

    거만 그 자체였다.

    정혁은 어처구니없어서 한숨을 쉬고는 순간 두 손에 망치를 쥐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안젤리나가 상황을 인지하고 대처하기도 전에 정혁의 망치 하나가 그녀의 턱 아래에 닿았다.

    짜릿한 전류가 턱을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가 지면으로 지면으로 흡수되었다.

    “웃기는 녀석이네.”

    정혁이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두 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선 두 사람 사이로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안젤리나는 양손을 바위 위에 두고 몸이 뒤로 밀리려는 것을 가까스로 지지했다.

    그러곤 조금 커진 동공 가득 적의를 담은 정혁의 얼굴을 담았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당황해서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욘마곤을 함께 지키던 랭킹 6위가 얼마 전에 군주들의 집중 공격과 갑작스레 등장한 대악마 아크의 마지막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녀도 사력을 다해 빈틈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녹턴와 룬다나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 땅의 다른 존재들부터 살피겠노라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그들만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녹턴이 지원을 요청했다는 제논의 지도자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안젤리나는 이미 그들에게 질려 있었던 터라 사실 욘마곤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녹턴이라는 정령왕이 도움을 요청할 만큼 대단한 인물인지.

    그녀가 알고 있던 랭킹 6위의 남자 역시 어디에서 꿀리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욘마곤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힘과 세력에서 밀리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약한 편도 아니었다.

    물론 녹턴와 룬다나의 존재적 위협도 한몫 했지만 그녀와 랭킹 6위의 존재 역시 균형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과연, 그 인물이 랭커를 대신할 만큼 강할까?

    소문으로는 대장장이라고 했었다.

    다른 소문으로는 에고 장비를 사용한다고도 했다.

    전혀 매치되지 않는 이 뜬소문들을 안젤리나는 믿을 수 없었다. 2

    00레벨 이후로 정확히 상대방의 전투력을 가늠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는 결국 부딪쳐 봐야 그 차이를 면밀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안젤리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자는 이미 랭킹 6위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용의 가호를 받지 않은 상태임에도 말이다.

    “건방진 것도 정도껏 해야지?”

    정혁이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잔뜩 실어 안젤리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젤리나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길다면 긴 시간 한 집단의 우두머리 위치에 서 있는 정혁은 내유외강을 이어 가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사람들에겐 유하게,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조그만 무례함도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신의 어깨에는 자신을 따라 이 게임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대표가 우유부단하게 행동할 수는 없다.

    강함, 그 이상의 강함으로 자신의 집단을, 제논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위상이며 자신의 존재 이유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앞으로의 여정을 정의했다.

    이 여자는 분명 랭커일 것이다.

    이런 오만함은 상대의 능력을 가누어 보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톡톡히 보여 줘야 한다.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가진 사람임을 말이다.

    안젤리나의 사과와 함께 정혁은 망치를 거두었다.

    그의 손에서 망치가 사라지고 모습을 감췄던 정혁이 그녀와 거리를 두고서 뒤로 물러나 등장했다.

    안젤리나는 손끝에 여전히 남아 있는 짜릿하고 섬뜩한 느낌을 기억하며 양손을 감쌌다.

    바위 위에 걸터앉았던 자세도 고쳤다.

    그러곤 자신의 앞에 있는 제논의 지도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정혁은 당당히 서서 그녀의 정중한 인사를 받아들였다.

    “날 찾은 이유는?”

    안젤리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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