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05화 (105/200)
  • ◈105화

    “고대룡 뭐시기라고 이야기했던 듯하긴 한데, 글쎄, 그녀와의 만남도 극적이어서 사실 그 이후의 말들이 잘 기억은 안 나네.”

    정혁은 힘이 빠져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때 김창수가 정혁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젠트라는 하나의 조각이 반드시 필요해질 때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했던 것 같군.”

    “하나의 조각이 반드시 필요할 때라.”

    정혁은 아리송한 그 말을 다시 곱씹으면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김창수는 그를 보면서 도끼를 다시 등 뒤에 고쳐 메고 지시를 내렸던 마법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결국 타이런 대륙에 모든 희망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젠트라를 찾아내야 한다. 하나의 조각이라.

    정혁은 꼭 보물찾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그것을 계속 되뇌다가 안나에게 던져 줘야겠다고 쿨하게 결론지으며 사방에 개방된 차원 문을 바라보았다.

    녹턴이 공중에서 내려왔다.

    정혁은 그에게 마나 줄기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 부탁한 뒤 대장간으로 향하는 문을 개방했다.

    오랜만에 그는 혼자서 대장간으로 향했다.

    정혁이 먼저 타이런의 욘마곤에 오면서 대장간에서 함께 일하던 일꾼들은 모두 제논으로 돌아갔다.

    조 패더럴은 왠지 외로운 뒷모습으로 모루 위에서 사정없이 연마질을 하고 있었다.

    깡깡거리는 소리와 불타오르는 화염 속에 섞인 여러 냄새들이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조는 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봤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정혁에게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오랜만이구먼?”

    “그러게.”

    “그 일전에 아가씨는 함께 안 오는 건가?”

    “누구? …안나?”

    “안나였나? 어쨌든, 분위기 좋아 보이던데.”

    조가 음흉하게 웃었다.

    금니가 빠진 곳이 비어 있었는데 그 부분만 검은 것이 약간 바보 같으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정혁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주책맞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누구라도, 네 편을 만들라고. 너는 항상 어떤 벽을 만들고 사니까.”

    자신의 응접실을 향해 걸어가는 정혁의 뒤를 향해 조가 헛기침을 하면서 한마디 던졌다.

    다시 깡깡거리는 마찰음이 울려 퍼졌지만 정혁은 조가 던진 말이 마음을 울리는 것 같아 멈칫했다가 계속해서 응접실로 걸어갔다.

    욘마곤에서의 여정이 이제 시작될 참이다.

    카탈 대륙에서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인연을 만들고 강한 힘을 얻고 성장하고 해냈다.

    대장장이로서 최대치에 가까운 숙련도를 완성해 냈다.

    이제는 대장장이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서 에고 장비 역시 두 개만 더 구해 낸다면 완전해질 것이다.

    세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면서도 정혁은 자꾸만 궁금증이 생긴다.

    ‘신’이라는 놈은 결국 자신에게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검은 말 조직은 누구의 오더를 받고 움직이는 걸까?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들은 왜 사력을 다해 리사이클을 막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일까?

    단순히 게임의 영역, 그 이상의 사건에 휘말렸음을 정혁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끔은 이곳, 이 가상의 세계에서 느끼는 호흡이 아니라 탁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낀 더러운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곳에서의 삶이 더 나를 살아있다고 생각하게 하지만 결국 가상의 세계 아닌가.

    그 더러운 공간, 정리되지 않고 나락에 가까이 떨어진 밑바닥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쪽이 현실이며 그쪽이 진짜이기 때문에 치욕스럽고 불결하더라도 그 삶과 그 숨이 진짜를 증명하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 로그아웃하여 진짜의 세계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여러 사건들과 지금 이렇게 로그아웃이 되지 않은 채 묶여 버린 상황을 복기해 보면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정혁은 이제는 ‘한’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지금의 캐릭터가 보다 유쾌하기 때문이다.

    조가 말했듯 정혁은 이 세계의 그 누구와도 특별한 친분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서의 자괴감이 만들어 낸 어두운 고집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했다.

    누구도 그와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은 물론이거니와 대다수의 AI로 이루어진 세계 속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결코 성장할 수 없었던 이 따위 직업군을 가지게 된 이상 자신이 고수하던 플레이 스타일은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벽이 있다.

    조는 가끔 냉철하게 정혁의 심정을 분해해 버리곤 한다.

    그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가시처럼 붙는다.

    ‘나는 여전히 그렇구나. 여전히 모두를 깊이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구나.’

    리안이 쓰러졌을 때 안나가 그를 걱정하는 눈빛은 진짜였다.

    엘라와 리안이 과거 어떤 인연의 굴레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엘라는 자신의 만년의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에도 리안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희망을 안고 내키지 않는 계약까지 했다.

    글쎄, 이 외에도 많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서로 등을 내주고 친우 이상의 관계를 맺으며 이 세계를 딛고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정혁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이 세계를 위해 싸우고, 제논을 대표해 나아가면서도 나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랭킹 1위가 되는 것? 그 이후에는?’

    갑작스레 길을 잃은 돛단배 신세가 된 것 같았다.

    거친 싸움이 시작되면 뒤를 돌아볼 겨를은 없다.

    이제까지의 모든 흐름이 그랬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삶은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내비게이션 없는 길을 안내해 갔다. 선택과 집중이 순간을 결정했고 결국 살아남아 강해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분명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없다면.

    그 모든 이유가, 가치가 없다.

    시궁창 같은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으로 다시 복구된다?

    ‘글쎄,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 과거엔 그랬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정혁은 응접실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소파에 몸을 뉘이고 깊게 호흡했다.

    그때 에트론이 그의 품에서 쏙 하고 나왔다.

    에트론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는 마치 이 세계가 조금은 낯설고 부담스러운 것처럼 행동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극히 꺼려했고 궁금할 법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떠돌아다니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방해할 자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항상 정혁의 곁이나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에트론은 응접실을 한 바퀴 휘 돌고는 자신의 크기를 조금 키워서 5살 정도 되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등을 잔뜩 기댔다. 자신보다 훨씬 큰 날개가 펄럭이며 펼쳐졌다가 소파 위에 고이 뉘여졌다. 에트론은 큰 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내쉬었다.

    “냄새는 별로지?”

    정혁이 그를 가만히 지켜보곤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아니요. 오히려 바깥보단 안정감 있고 좋네요.”

    “그래?”

    그래 보이긴 했다. 에트론의 모습을 보니 말이다.

    그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바깥은 불편해?”

    “…아무래도요?”

    “왜?”

    정혁의 질문에 에트론은 고개를 살짝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정혁을 보며 말했다.

    “천계는 참 거지 같은 곳이에요.”

    “읭?”

    뜬금없는 그의 고백에 정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에트론은 피식 웃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트론은 열쇠지기였다. 천계도 하나의 세계이기에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힘과 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그들 사이에서도 계급 체계가 존재했다. 에트론이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열쇠지기의 삶은 그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사명을 안고 창조되어 언젠가 소멸할 때까지 그렇게 살아갈 뿐.

    천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대천사장과 그의 천사장들 그리고 전투 계열의 천사들은 늘 위대한 존재로 칭송받지만 그들이 훌륭한 업적들을 세우기 위해 일조하던 다른 천계의 천사들은 천박한 업을 짊어진 자들로 하대받기 일쑤였다.

    그들이 원해서 그런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마계는 오아시스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자신들의 존재를 오아시스에 드러내곤 했지만 천계는 본연의 오만함으로 일제의 그런 행위들을 금지했다.

    오아시스에 벌어진 대전쟁의 결과 속에서 그들이 짊어져야 할 죄책감의 대가라고 포장하며 말이다. 그리고 방관했다. 그들이 마계보다, 오아시스의 존재들보다 강하다고 여긴 것이다.

    불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판단한 대천사장은 전투 요원들과 천사장들 그리고 본인을 억겁의 잠 속으로 봉인했다.

    그리고 결코 그들의 평온한 잠이 방해받는 일은 없으리라 선포했다.

    그러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천계를 갈고닦아 유지할 소수의 천사들만 남겨 놓은 것이다.

    에트론은 셀 수도 없는 오랜 시간 누구의 방문도 없었던 천계의 무기고에서 그 오랜 시간 사용해 본 적 없는 무거운 키 뭉치를 쥐고 살았다.

    무기고를 돌아다니며 무기들의 보관 상태들을 점검하는 것이 다였다.

    가끔, 아주 가끔 그를 찾아오는 동료 ‘하드린’ 만이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말동무였다.

    하드린은 특이하게도 오아시스에 관심을 가졌다. 에트론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세계였던 그곳을 말이다.

    호기심이 문제였던 걸까,

    그는 결국 오아시스로 향했고 에트론의 유일한 친구는 그렇게 사라졌다.

    다른 천사들은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에트론은 그의 의지를 알았고 의도를 알았기에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태생이 청소부였던 그는 전쟁을 통해 천사장의 자리에 올라서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전에 말한 어떤 천사가 하드린이야?”

    “예. 맞아요. 제가 괜히 역사서를 보여 줘서 벌어진 일이죠.”

    “흥, 아닐걸? 역사서를 봤든 안 봤든 마음속에 의심이라는 것이 돋아나면 그 폭발적인 확장의 속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이거든.”

    “그런가요?”

    “근데 그거랑 오아시스가 어색한 거랑은 무슨 상관인데?”

    “세뇌죠 뭐.”

    에트론이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창조부터 그들이 잠들기 전까지 우리의 위치와 신념은 늘 각인되어 왔으니까요. 오아시스는 넘보면 안 되는 곳, 우리가 있으면 불편한 곳. 그리고 우리는 늘 월등한 존재여서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이기에 그곳을 밟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쾌한 상황인지를 항상 주입받아 왔거든요.”

    “대단하시네. 니네들이나, 악마들이나 다를 게 뭐냐.”

    그의 말에 에트론이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마계의 존재들이, 글쎄요. 솔직하기라도 하니까 오히려 나으려나요.”

    “그래, 맞네.”

    정혁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에트론이 날개를 작게 펄럭거리며 다시 소파 위에 차분히 놓았다.

    그리곤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듯 소파 앞의 탁자를 보다가 말했다.

    “근데, 정말 누구였을까요? 저라는 존재를 이렇게 오아시스로 떨어트릴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자가 말이에요. 정혁 님과 저를 연결지은 자. 정혁 님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준 자. 그자가 말하길 천계는 완전 정지되었다고 했어요. 그건 이제 저와 같은 천계의 일꾼들조차 동면에 들었다는 말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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