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래, 생각해 보니 일전에 안나가 랭커들에 대해서 설명해 줄 때에도 한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무리를 이루고 국가를 건설하는 집단에게는 분명 강한 랭커들이 한둘씩은 있기 마련이다.
제논 역시 그렇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오아시스의 랭커 시스템은 다소 독특하다.
200레벨 이후로는 모두가 동일하다고 인식하는 시스템의 특징 덕분에 누가 더 강한지 약한지는 플레이어들이 결정해야만 한다.
변수는 항상 존재한다.
오아시스에 뿌려진 다양한 종족들과 여러 재료들, 그리고 그 속에서 탄생하는 강력한 무기나 방어구들, 전투 보조 도구들이 무조건 이길 것 같은 상황도 무너트리거나 혹은 절망 속에서도 플레이어들을 일으킨다.
200레벨 이후에는 개인의 센스와 사고 즉, 요즘 말로 ‘뇌지컬’이 상당히 중요하다.
정혁이 ‘한’이었을 때 이미 그의 뇌지컬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세계 곳곳에 뿌려 놓은 여러 정보원들이 전투에 이득이 될 법한 값비싼 정보들을 그에게 제공하면 ‘한’은 그 정보들을 취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냈다.
암살자라는 개인 직업 특성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극한으로 끌어올린 숙련도,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피지컬까지. 그는 진정으로 플레이어들에게 괴물이었다. 처리할 수 없는 괴물.
그러나 그런 정혁도 받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용의 가호’다. 이 시스템은 아마도 ‘한’이 죽고 난 이후에 정립된 어떤 룰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상위 10위 안에 드는 랭커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버프인지, 아니면 랭커의 우위를 가리기 어려운 이 세계에서 그들끼리의 암묵적인 규칙을 만든 것인지 정혁의 입장에서는 이 용의 가호 체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 랭커를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리라 생각을 했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코앞에 랭커가 있었는데 못 알아 본 자신이 조금 웃기고 무안했다.
정혁은 저 멀리 차원 문 마법사들을 지도하고 있는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정혁이 만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대상은 고대룡 젠트라.
용의 가호를 받았다면 용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세계에서 잠적한 용들을 어떻게 만나 그들의 가호를 받은 것일까? 또한 그를 통해서 젠트라를 향한 어떤 추가적인 힌트를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바삐 움직이고 있는 김창수를 보면서 정혁은 섭섭함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주변 정리를 함께 해야 할 것 같네. 갑자기 많은 병력들이 등장하면 욘마곤의 피난민들도 위압감을 받을지 모르고, 다른 국가들이나 이곳에 침공한 악마들이 눈치채 달려들지 모르니 말이야.”
녹턴은 정혁에게 이야기하고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제논의 병력들이 진을 칠 자리 전체에 물 속성의 거대한 배리어를 펼쳤다.
푸른빛이 영롱하게 정혁의 12시 방향에서 반짝이며 반원 모양으로 떨어져 내린다.
김창수 역시 특별한 기운을 느끼고 허공을 보다가 정혁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곤 자신의 옆에 있던 마법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린 뒤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5만의 병력이 일제히 움직이려니 쉽지 않구만.”
“…그렇죠?”
“녹턴 님의 마나가 더 필요할 것 같네. 내가 부탁하긴 좀 그러니, 자네가 어떻게 양해를 구해 줄 수 있겠나?”
“저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말을 마쳤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정혁을 보고 김창수가 룬다나와의 한바탕을 끝내고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있던 라테에게 궁금증이 담긴 눈짓을 했다.
라테 역시 정혁의 조금 다른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 어떤 무언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은 그의 시선에 라테는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정혁은 몰랐겠지만 라테는 그가 용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김창수는 그 사실을 정혁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르기를 바랐다.
실제로 제논 내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전 국왕인 비르파인과 참모인 안나뿐이었다.
김창수가 라테와 따로 대면했을 때 그에게 발설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본래 입이 무거운 편이었던 라테 역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승낙했다.
라테가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며 김창수는 무엇인가 정혁이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곤 그에게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용의 가호…라고 아십니까?”
김창수는 콧김을 흥 하고 내뱉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알고, 있네.”
“알기론 랭커들만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정혁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곤 말을 이었다.
“사령관님도 받으셨구요.”
“하하, 그렇지.”
‘하하? 그렇지이?’
정혁은 하마터면 그의 말을 되풀이할 뻔했다가 다시 마음 안으로 깊이 삼키며 눈을 치켜떴다.
배신감? 일종의 그런 감정이었다.
물론 정혁은 자신이 김창수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힘에서 밀리는데도 왜 너만 용의 가호를 받고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는 용의 가호를 받아 조금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받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면 지금 내가 사령관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건가?
용의 가호를 받았다고?
아니다, 그냥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에 섭섭한 것이다.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없을껄? 아마 없을거다.
정혁은 혼자서 장황히 여러 생각들을 들어 놨다가 고개를 몇 번 털며 전부 날려 버렸다.
“…그렇게 간단히 웃으면서 인정하기엔 너무 오래 저한테 숨기셨다는 생각 안 들어요?”
“아니, ‘한’이셨던 분이 제가 용의 가호를 받았는지도 모르셨단 겁니까아-?”
김창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정혁을 떠보듯 말했다. 정혁은 순간 욱하는 감정이 들어 뭐라 말을 토해 내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진 느낌이다. 불쾌하다.
그래도 왕년엔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전투를 배우고 했던 양반이 갑자기 뭔가 우월한 위치에 올라간 느낌이랄까? 내려 보는 느낌이랄까?
까마귀 어디 갔어.
정혁은 그를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하, 농담이네, 마스터. 아마도 ‘한’이었을 때는 이런 용의 가호 같은 최상급 버프 효과는 없었을 테니 낯선 것이 정상일세. 뭐 굳이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서, 뭔지 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정혁이 퉁명스런 말투로 묻자 김창수가 빙글 웃으면서 자신의 양날 도끼를 꺼내 자루로 지면을 쾅 하고 내리쳤다.
정혁의 염구로 제련된 양날 도끼의 두 날은 붉은 빛 열기로 지글거리고 있었으나 지면의 부딪침과 동시에 자루를 타고 또 다른 초록빛 마나가 회전하면서 도끼날까지 올라왔다가 열기를 타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세계에는 다섯 용군단이 있네. 그리고 고대룡이라는 존재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지. 마계나 천계처럼 또 정령왕들처럼 용들도 태초의 세계부터 함께했다고 하지. 보다 적극적으로 오아시스의 역사에 개입했다고도 하고. 하지만 이제는 그들 모두의 흔적을 찾을 순 없다네. 그러나 ‘한’이라는 플레이어가.”
말을 멈추고 김창수가 정혁을 보았다. 정혁은 왠지 찔려서 몸을 살짝 움츠렸다.
“세계의 중심에서 강력한 힘을 쥐고 흔들자 이에 불쾌함을 느낀 용군단의 후예, 혼혈 용족들이 용군단에게 도움을 요청한 걸세. 사실 당시엔 군단이라고 부를 만큼의 병력도 없지만 아직 소수의 순혈 드래곤들이 남아 있었다고 하더군. 마지막 남은 10명의 순혈 드래곤들이 그 부름에 화답했고 그들의 힘을 취하려던 혼혈 용족들은 되레 그 이면에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하는 악한 본성이 드러나 그들에게 공격당해 파멸하고 말았네.”
흥미로운 이야기에 정혁은 조금 더 그에게 몰입했다.
“그리고 10명의 드래곤들은 세계를 떠돌며 ‘한’이라는 자에게 맞설 강자를 찾아다녔고 각각 그 대상들을 찾아 자신의 힘을 불어 넣곤 사라졌다네. 나는.”
김창수가 자루를 땅에 톡톡 치자 다시 지면에서 초록빛 마나의 흐름이 옅게 밀려 올라와 도끼를 타고 이번엔 김창수의 팔 안으로 감겨 들어갔다.
“대지의 드래곤 안찰라의 힘을 받았네.”
“결국 나를 몰아내기 위해 드래곤께서도 움직였다는 겁니까? 하지만 그 타이밍에 내가 사라졌고?”
“얼추 비슷한 시기였다고 생각되는군.”
김창수는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숨기신 겁니까?”
“음….”
김창수는 정혁의 질문에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잠시 그를 보다가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지금의 랭커들, 그들은 모두 10명의 드래곤들에게 받은 힘을 기반으로 비약적인 강함을 쟁취할 수 있었다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명의 적을 분쇄하려는 의지로 가득했지. 다른 드래곤 모두는 그 강렬한 의지를 가진, 강한 자들을 찾아 용의 가호를 주었을 거야. 그러나 나에게 찾아온 안찰라는 조금 달랐다네.”
“달라요?”
“그녀는 ‘한’을 아느냐고 물어봤고, 그를 증오하느냐고 물어봤지. 나는 안다고 대답했지만 증오하진 않는다고 했다네. 그녀는 그 커다랗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의 전신을 꿰뚫어보듯이 바라보았네. 그리곤 자연의 기운이 가득 담긴 깊은 숨을 내쉬더니 내가 좋겠다고 이야기했지.”
“나를 증오하진 않으셨다구요?”
“내가 자네를 왜 증오하나. 물론 그 행태나 행실이 고약하긴 했지만 자네 덕분에 나도 크게 성장할 수 있지 않았나. 어찌 되었건 그렇게 갑작스레 용의 가호를 받고 나서 랭커들이 나에게 찾아왔다네. 그들은 ‘한’을 치러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어. 큰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 힘이 당장에 서로를 향하지는 않아야 한다며 나를 내버려 두고 자신들의 길을 향해 떠났네. 그러나 웃기지. 자네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아쉽네요, 싸워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그러나 잘 모르겠네. 용의 가호를 받은 9명의 ‘영웅’들과 한 명의 ‘악당’과의 싸움에서조차 악당이 이기면 재미없지 않겠나?”
감창수가 영웅과 악당에 악센트를 주며 말했다. 정혁은 입을 삐죽였다.
“그 덕분에 용의 가호라는 말도 안 되는 최상급 버프를 받은 자들이 상위 랭커 10인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 힘을 온전히 개방하진 않았다네. 안찰라의 힘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파괴하는 것에 맞춰져 있진 않다네. 오히려 치유하고 보듬는 쪽이지. 그래서 개방하지 않았다기보단, 그 힘에 의지해서 강해지고 싶진 않았어. 내가 보고 배운 어떤 남자의 삶은 그렇지 않았거든.”
정혁은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김창수의 부담스런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답이 됐는가?”
“뭐, 어느 정도 이해는 됐습니다. 어쨌든 상위 랭커 10위 안에 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들의 말로는 10위. 딱 10위라고 하더군. 아까 듣기로 욘마곤의 랭커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던데, 그럼 9위가 됐을라나?”
태평하게 대답하는 김창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뭔가 떠올랐는지 그에게 물었다.
“아, 혹시 그 안찰라라는 드래곤과 만났을 때 특별히 한 말은 없습니까?”
“무슨?”
“뭐, 다른 용들이라든지, 아니면 고대룡이라고 불리는 젠트라라는 녀석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정혁의 물음에 김창수가 기억을 되살리는 듯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해냈다. 그리고 말했다.
“아, 아, 젠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