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03화 (103/200)
  • ◈103화

    안나가 나가고 공간에 다시 어둠이 찾아들었다.

    안나가 두고 간 빛 덕분에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환경 속에서 E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음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정혁을 만날 순 있을까?

    E는 그가 일전에 만났던 조 패더럴에게 들은 말을 또 다시 떠올렸다.

    “신념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조 패더럴이 마지막 순간에 했던 저 한마디를 그 이후로 항상 생각했었다.

    사람이 신념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라면 자신이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면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는 그 이후로 신념을 가지려고 했고 그의 신념은 그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을 감내하고도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들을 만나 삶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한 걸음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래, 신념이 나를 이렇게 움직였는데도.”

    E는 소멸 과정에 들어간 자신의 팔을 보았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는 안나가 나간 곳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가 담긴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가 한없이 안타까워보였다.

    ***

    안나는 복도를 벗어나 본성을 향해 걸어가면서 E와 대화하며 나눈 사실들을 정리했다.

    별 소득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값진 정보들을 얻었다.

    이제까지의 리사이클과는 이번 과정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포인트다.

    놈이 불안해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E가 말한 바이러스가 그녀가 알고 있는 그들의 후원자라면 아마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을 취해 올 것이 분명하다.

    “정혁.”

    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존재가 확실한 신호탄이 되었다.

    그의 능력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놈의 교만이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가능성이 보인다.

    리안과 그가 있음에도 쉽지 않았던 이 긴 어둠 속의 여정이 막을 내릴지도 모른다.

    약간의 흥분이 안나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끓어올랐다.

    그때 저 멀리서 샹드레이가 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안나는 그가 달려오는 것을 보며 그에게 달려갔다.

    “마스터는 잘 도착했나요!?”

    안나가 소리치자 샹드레이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병력들이 투입될 준비를 마쳤습니다!”

    “좋아요! 가죠!”

    안나는 상드레이와 마주하고 같이 본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제일 먼저 차원 문을 통해 욘마곤으로 향한 정혁과 김창수는 모래가 가득한 해안가에 떨어졌고 그 넓은 해안가에 중구난방으로 모여 있는 피난민들과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는 욘마곤의 자치 행정부 요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러 종족들이 각기 다른 두려움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오히려 정혁과 김창수는 그들에게 관심을 받지도 못했다.

    정혁은 급히 차원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만약에 완전무장한 1차 투입 병력이 이 해안가로 떨어질 경우 과한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었다.

    정혁은 김창수에게 전초기지를 세울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달라고 부탁하고 건틀릿의 모습으로 안착하고 있는 라테에게 녹턴을 찾아 달라고 말했다.

    라테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녹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마나를 집중했다.

    피난민들의 밀집 지역을 헤쳐 가면서 정혁은 이렇다 할 전투 병력이 보이지 않음에 의아해 했다.

    지나가는 피난민을 붙잡고 욘마곤의 전황이 어떻냐고 물으니 그 피난민은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규모의 공황상태가 분명했다.

    한참을 걸어 보다 내륙지대로 진입하자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김창수에게 전음이 도착해 전초기지를 세울 만한 공간을 찾았다고 보고받았다.

    정혁은 그에게 그곳에 차원 문을 열 수 있도록 본성에 좌표를 전송해 달라고 한 뒤 평야 끝자락에서 아름아름 확인되는 전쟁의 불길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달려가려는 찰나 정혁의 코앞에서 지면을 뚫고 올라오는 악마들을 조우하고 곧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아마도 빈틈을 이용해 우회한 이 악랄한 악마들은 피난민들을 공격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정혁은 간단히 염구와 두 망치로 많은 수의 악마들을 모두 괴멸시켰다.

    그런 그의 곁으로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악마들과 싸우고 있는 정혁을 지나쳐 그 뒤로 달려드는 나머지 악마들이 바람에 두 동강 났다.

    바람은 그렇게 정혁의 주변을 빙글 돌아 상황을 정리한 뒤 곧 정령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룬다나.”

    라테가 건틀릿의 모습에서 불의 정령 모습으로 변화한 뒤 작게 한마디 뱉었다.

    “어째서? 어째서 너 따위에게 가이아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야?”

    룬다나라고 불린 정령이 불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라테 앞에 섰다. 연한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라테와 동일한 크기의 그녀는 바람의 정령왕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불쾌감이 가득 섞인 눈으로 라테를 뜯어보다가 뭔가를 느낀 듯 라테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야? 너 그거 뭐야?”

    라테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하자 그가 그녀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경고했다.

    “관심 갖지 말게. 알려 줄 생각 없으니.”

    “뭐? 내가 그런 거 따지는 성격인 줄 아니?”

    정혁은 어째서 그가 만나는 여성들의 캐릭터가 다 이 모양인지 속으로 한탄하면서 둘을 중재하고자 나섰다.

    “저기, 잠깐, 잠깐만요.”

    “뭐야, 너는”

    룬다나가 날카롭게 정혁을 쏘아보았다. 정혁은 손을 들고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는 녹턴의 부탁으로 카탈에서 이곳으로 넘어왔습니다. 당장에는 저놈들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니까 그 이후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혁의 앞에 녹턴이 번쩍 하고 나타났다. 녹턴은 심히 반가운 표정으로 정혁을 보다가 그의 곁에 있는 라테에게 시선이 닿더니 쩝 하고 입맛을 한 번 다셨다.

    온도 차이가 확실했다. 어쩌다 보니 한 자리에 정령왕 네 명의 기운이 공존하게 되자 정혁은 가슴을 죄어오는 답답함을 느꼈다.

    “사, 상황부터 알려 줄 수 있어?”

    정혁의 물음에 녹턴이 헛기침을 하고 라테를 힐끗 본 뒤 말했다.

    “평야 끝 전선이 우리의 마지막 전선일세. 피난민들은 보았나?”

    “봤지, 해변에 밀집해 있던데?”

    “그들이 욘마곤의 마지막 희망이네. 욘마곤의 깨끗한 대지는 전부 오염되어 버렸어. 그리고 결국, 아크가 등장했다네.”

    룬다나는 ‘아크’라는 말에 못 들을 말을 들을 것마냥 고개를 저으며 침을 뱉었다. 그녀의 침은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아크…요?”

    정혁의 품에서 에트론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당황한 얼굴로 등장하자 룬다나와 녹턴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여, 여긴 어떻게 계시는 겁니까?”

    “얼레? 천사 양반 아냐?!”

    둘의 반응에 에트론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러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크가 오아시스에 등장한 게 사실입니까?”

    “사, 사실이긴 하네만, 아니 도대체….”

    녹턴이 당황과 혼란 속에서 어물어물 거리다가 이내 표정이 천천히 밝아졌다. 그는 조금 더 희망찬 얼굴로 정혁을 보았다. 정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에 천계의 존재가 있다는 것은 마계의 존재를 파멸로 인도할 수 있는 확실한 무기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전선을 좀 밀어내 볼까?”

    정혁이 싱긋 웃으면서 인벤토리에서 축소 마법을 이용해 구속시켜 놓은 까마귀를 꺼냈다.

    까마귀는 빛과 함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짜증 섞인 울음을 뱉어 대며 정혁의 앞에서 날개를 펄럭거렸다.

    정혁은 미안하다는 듯이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곤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거침없이 공중을 향해 날아올랐다.

    곧 전방에 펼쳐진 넓은 전선 전체에 엄청난 수의 화살비가 뿌려졌다.

    번개와 화염이 여기저기서 격렬히 터지고 위협적인 빛이 시야를 소멸시킬 정도로 확산되었다가 사라졌다.

    난전으로 뒤엉켜 있던 전선의 승기가 정혁의 등장과 동시에 완전히 욘마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욘마곤에 여러 병력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상식 이상의 강자 덕분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앞에서 소멸되는 셀 수 없는 수의 악마들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정혁이 전장을 정리하는 데 정확히 10분이 걸렸다.

    10분 동안 정혁이 소멸시킨 악마들의 수는 5천 이상이었다.

    악마들은 당황했고 그들의 지휘관은 후퇴를 지시했다.

    다행히 그들 사이에 군주급은 없었다.

    정혁이 다시 까마귀를 타고 돌아왔을 때 넋이 나간 녹턴과 룬다나 옆에서 라테는 약간의 자부심을 느끼며 되레 팔짱을 끼고 당당히 서 있었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곤 까마귀에서 내렸다.

    까마귀는 어디론가 울음소리를 뱉으며 날아갔다.

    “저희 쪽 사령관이 전초기지를 세우기에 적절한 땅을 찾았다고 전해 왔어. 그곳으로 5만의 병력이 자리 잡을 거야, 괜찮지?”

    “…괘, 괜찮네.”

    녹턴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룬다나는 정혁과 녹턴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여러 번 세차게 흔들곤 날카롭게 한마디 뱉었다.

    “야, 너는 왜 반말이야?!”

    “아, 룬, 룬다나. 정혁과 나는 이미 친분이 있, 있어서 그러니, 이해하게!”

    “무슨?! 이해? 이게 이해가 되는 상황이야? 우리가 뭐, 네 쫄따구나 다름없는 저 정령 나부랭이랑 같은 줄 알아?!”

    “정령 나부랭이?”

    라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약간 엘라에게 나무때기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효과이지 않을까 하고 정혁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역시 이들이 모이는 순간부터 엄청난 불협화음이 시작될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혁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거대화해서 분노를 폭발시킬 것 같은 라테에게 전음을 보내 잘난 우리가 이해하자는 식의 위로를 건네고 룬다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혁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결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녹턴 님의 말대로 꽤 오래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 그래! 어? 우리랑은 급이 다른데 말이야.”

    “여전하네, 저 꼰대 기질.”

    라테가 조롱 섞인 말투로 작게 중얼거리자 룬다나가 그걸 기어코 들었는지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는 상상 이상의 욕설을 마구 뱉어 댔다.

    녹턴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혁의 어깨를 붙들고 천천히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점점 등 뒤에서 들리는 언성이 높아지다 결국 쿠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이 한껏 거대해져서는 치고받기 시작했다.

    “니네들 원래 저래?”

    “바람의 정령왕이 괜히 혼자 지냈던 게 아닐세…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아, 인정.”

    정혁이 힐끗 뒤를 돌아보며 공감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욘마곤에 소속된 용의 가호를 받은 자도 한 명밖에 안 남았다네. 자네와 함께 온 자의 기운을 보니 그자도 용의 가호를 지니고 있군? 강한 자인가?”

    정혁은 녹턴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강하긴 한데 용의 가호라니?”

    “몰랐나? 그에게서 용의 가호가 느껴지는데?”

    “…?!”

    정혁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에 심히 불쾌함을 느끼며 김창수에게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