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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102화 (102/200)
  • ◈102화

    안나의 목소리가 방 전체를 울렸다. E는 격분한 그녀의 반응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빛으로 반응했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삶이 삶이냐구! 너희들이 그 긴 시간 자행해 온 교만한 행위들을 생각해 보면 너만이라도 당장에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야! 감히 뭐? 삶을 운운해?”

    “…배부른 소리를.”

    E는 발끈하는 안나를 향해 조롱 섞인 웃음을 뱉었다. 안나는 당장에 녀석에게 달려들어 사지를 분쇄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이 세계는 결국 제일 위에 있는 한 녀석을 위해서 갖춰져 있어.”

    E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녀석의 입맛대로 말이야. 녀석이 앞으로도 계속 세상을 주무르기 위해서. 너희들은 그에게 훌륭한 도구가 되었지. 그러나 그 도구는 너희뿐만이 아니야. 평정을 되찾고 복기해 봐. 같은 도구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과연 우리가 불쌍할까, 너희가 불쌍할까?”

    E는 차가운 얼굴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흥분했던 자신을 가라앉히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너희들이 끔찍이도 괴로워하는 리사이클, 너희는 그것을 재활용이라고 표현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리셋, 즉 초기화라고 불러. 왜일까?”

    안나는 그에게서 처음 듣는 개념에 조금 놀랐다. 그녀에게 특별한 대답을 듣지 못하자 E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우리에겐 완전히 새로운 세계이지만 너희에게는 누적된 세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존재와 비존재, 그 차이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우리야 기억을 잃어버리든 말든, 전신이 산산조각 났다가 재구성되는 고통을 느끼든 말든 어차피 소모품일 뿐인 프로그램이지만 너희는 다르지. 또다시 활용될 수 있는 귀한 자원. 그것은 이 세계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본래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E의 말투에서 착잡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래서 궁금했어. 너희들은 어떨까?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아니라 너희말이야. 세계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너희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우리는… 우리는 말이야.”

    E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걸러지지. 어딘가로 들어갔다가 개조되어 나와.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다시 조작되는 거야. 오류고, 버그니까. …소모품이니까.”

    그는 다시 자신의 팔에 있는 상처를 가리켰다.

    “이 안에 심어진 우리의 핵심 코드는 꺼내어 파괴되는 순간 붕괴로 확장되기 시작해. 이것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시스템에게 추적당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핵심 코드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게 정상이지만….”

    E는 자신의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 같이 정신 나간 프로그램은 이 코드를 꺼내 없애 버리기도 하지. 몰라, 이전에 이딴 등신 같은 선택을 한 놈이 또 있었는지. 그래서 나는 아마 멀지 않은 시간에 데이터 조각 따위로 분해되고 말겠지. 흔적이… 없어지는 거야.”

    그는 자신의 팔을 몇 번 슥슥 문질렀다. 마치 각질 같은 것이 일어나듯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균열이 확장되고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놈들은 또 다른 E를 만들어 내겠지? 충성심에 가득 찬, 자신을 백신이라고 여기고 너희를 바이러스라고 정의하는 노예를 생산할 거야.”

    안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자는 오랜 시간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들을 괴롭혀 온 자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이런 사고와 반응들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작게 일렁이던 측은함이라는 감정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말했던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도, 그 속에서 오는 괴리와 고통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이제 완전히 배제돼 버린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거침없이 말하자면.”

    E는 뭔가 결심한 듯이 당차게 말했다.

    “살아 있는 너희가 부러워. 살아 있다는 증거를 가진 너희가 부럽다구. 그 오랜 시간 그놈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말이야. 갇혀 있다고 해도,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어쨌든 살아 있는 너희가 너무 부러워. 그래서 나는 너희들의 ‘혁명’이 성공했으면 좋겠어. 비존재에게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좋지 않을까?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고 너희는 너희대로의 삶을 살고, 우리는 불필요한 이 현실에서 벗어나면 좋지 않을까?”

    그는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안나를 보며 말했다.

    “이번 리셋은 조금 빠르게 시작되었어. 느꼈을 거야. 녀석은 지금 조급해 하고 있어. 교만해서 무시해 왔던 녀석의 작은 오점이 결국 정혁이라는 그 이상한 놈을 통해서 비정식적인 로직을 보이기 시작하니까 조급해진 것이겠지. 그래서 그 마법사의 위치까지 찾아낼 수 있었을 거야. 사실 놈은 너희를 필요악이라고 치부하기도 했어. 우리도 너희를 어느 정도 선에서 유지하도록 명령받았으니까. 플레이어들이 느끼는 여러 상황과 조건들 속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감정이 놈의 먹이이기에 너희들이 뒤에서 조장하는 여러 변수들이 오히려 플레이어들의 평범한 순환에 와류를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야. 뭐랄까….”

    E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기다가 번쩍 생각난 듯 말했다.

    “그래! 맨날 맨밥만 먹다가 갑자기 니들이 그렇게 좋아했다는 피자 치킨 같은 음식을 먹으면 밥보단 그 자극적인 음식들이 자꾸 생각나는 것처럼!”

    안나는 그의 괴이한 비유에 인상을 살짝 구겼다.

    “너희들이 일으킨 와류에 플레이어들이 말려들면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녀석에게 물밀듯 밀려들어 왔거든. 그 맛을 끊을 수 없었던 거지.”

    뭔가 특별한 반응을 원했던 E는 생각보다 냉랭한 안나의 표정에 무안한 듯 소심하게 말했다. 안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주변을 살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사방의 불을 밝히며 외부와의 연결을 완벽히 끊어 놨었다.

    그러면서도 이자와 함께 있는 이곳이 마치 리안이 펼친 완전무결한 차단 결계 이상의 차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어쩌면 이자로부터 일지도 모른다.

    이자는 시스템의 입장에서 현재 존재하면 안 되는 자다. 그 오류가 이 공간 전체의 오류로 확산된 것 같다.

    “결국 원한다면 우리 전체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말이네?”

    “…음, 뭐랄까. 반반?”

    “반반?”

    “너희를 지지하는 놈의 오점. 즉, 바이러스가 있잖아. 힘이야 놈이 바이러스보단 월등히 강하지. 요리조리 잘 피해왔던 바이러스라고 해도 결국 놈의 통제 아래에 있긴 하지만, 지금 이 괴랄한 나의 상태와 리셋 속에서도 살아남는 너희만 봐도 놈이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다는 증거가 되지 않나? 그 바이러스가 너희를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지만 아직까진 놈이 그어 놓은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아서 놈도 조금 가렵지만 구태여 긁지는 않는 상태였다고 봐야겠지. 그러나 지금은 달라. 아마 슬슬 따갑기 시작했을걸?”

    “그 증거가 리안에게 쏟아진 일제 공격과 빨라진 리사이클 시점이다?”

    “그렇지, 이해가 역시 빠르네.”

    리안이 공격당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긍정적인 신호였다는 E의 풀이에 안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안나는 가만히 E를 바라보았다. 신나게 이야기를 토해 내던 E는 안나가 가만히 그를 보자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시선을 돌려 자신의 팔을 보았다. 그러곤 걷었던 소매를 내렸다.

    녀석은 웃고 있었지만 그렇지 실질적으로 기뻐 보이진 않았다.

    정혁에게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사실을 의외의 공간에서 의외의 인물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에 안나는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웠다.

    이제까지 그들은 모두 간악한 존재들이며 플레이어들을 농락하는 자들이라고 치부했던 자신에게도 혼란이 오는 순간이었다.

    ‘이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또 있을까?’

    “요행은 바라지마.”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E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오류를 범하는 프로그램은 리셋 전까지 내가 마지막일 거야. 리셋 준비 단계에서는 소위 백신이라고 불리는 우리 검은 말 조직에게 막대한 힘을 더해 줌과 더불어 엄청난 통제가 시작되지. 우리는 세계의 전복을 통한 재구성을 준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놈이 가장 민감하게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되거든. 이미 오류들은 전부 깨끗하게 복구되었고 앞으론 나 같은 자들을 만날 수 없어.”

    “…결국 네가 우리에게 있다고 해서 좋은 점은 없는 거네?”

    그녀의 말에 E는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그의 껄껄거림이 방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눈물까지 났는지 눈을 훔치며 말했다.

    “그걸, 이, 이제 알면 어떡하냐! 하하하.”

    순간 짜증이 올라와 안나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E가 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를 붙잡았다.

    “에이, 그래도 그냥 가면 안 되고. 내가 실컷 이것저것 알려 줬으니까 나한테도 알려 줘.”

    “뭘.”

    안나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E는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실질적으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그의 물음에 안나는 가만히 서서 그의 질문을 되뇌어 보았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조작된 기억과 조작된 삶에 얼룩져 오아시스의 세계에서 사력을 다해 살아가는 플레이어들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발설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안타까운 삶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리사이클 속에서 증오스런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

    “글쎄, 우리가 과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안나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E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했다가 순식간에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안나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우리도 그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기 위해서 이렇게 발버둥이야.”

    안나는 E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툭툭 두드렸다. E는 그녀의 대답에 알 수 없는 만족을 느낀 표정이었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별것 없네. 우리와 다를 바 없구나.”

    안나는 그의 반응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네. 아, 심술부려서 미안하다고 정혁에게 전해 줘.”

    “무슨 심술?”

    “당황했을 거 아냐, 자기 정체가 밝혀져서.”

    E가 키득댔다. 안나는 그날의 끔찍한 분위기와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혁이 그의 반응을 봤다면 이미 녀석의 목이 날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속은 해제한 채로 날 내버려 둬도 되지 않을까? 보시다시피, 얼마 안 남았잖아? 저 조명도 좀 남겨 주고.”

    알겠다는 듯이 안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빛을 그대로 둔 채 안나는 자신이 펼쳤던 차단 막만 거두었다.

    그리고 벽을 두드리자 어두운 칠이 벗겨지며 투명한 유리창이 드러났다.

    균열이 생기고 확장되어 그녀가 나갈 만큼의 공간이 드러났다.

    구속이 완전히 벗겨진 E의 모습을 본 결계 마법사들의 표정이 경악스러워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안나는 그들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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