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100화 (100/200)
  • ◈100화

    정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사택으로 돌아왔다.

    꽤나 정교한 로직으로 이루어진 ‘욘마곤의 눈물’ 속에서 녹턴의 마나를 찾아내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라테와 대마법사 넷이서 달라붙었는데도 불구하고 세 시간은 족히 지난 듯했다.

    그러나 집요한 노력 끝에 녹턴의 마나를 추출해 낼 수 있었고 이제 이를 통해서 녹턴과 대화하거나 그를 이용해 중앙해를 넘는 밀도 높은 차원 문을 형성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젠 욘마곤 쪽에서의 안전 공간 확보와 차원 문이 유지될 동안 공급될 녹턴의 마나가 필요했다.

    정혁이 먼저 녹턴에게 전음을 보내 보았지만 아직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일단은 피곤함이 먼저 다가와 그는 사택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리안은 손님방에 엘라와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뒷전으로 미뤄 두었던 의문점이 떠올랐다.

    엘라는 마치 리안을 이미 알고 지낸 것마냥 행동했었다. 그와 어떤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 걸까. 정혁은 기억을 더듬어 그녀와 처음 계약을 맺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아마 그녀가 자유를 찾게 되면 만나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았다. 정혁은 그것이 자신일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김칫국을 마시다 못해 들이 부은 격이지.

    그는 피식 웃으면서 방문을 열고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는데 정혁은 기척으로 안나임을 확신했다. 안나는 정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리안에게 향했다. 안나와 엘라가 뭐라 대화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리안의 현재 상태를 묻는 대화였다.

    “결국 만나겠군.”

    어느새 정혁의 곁으로 다가온 라테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정혁은 반쯤 감긴 눈으로 라테를 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녹턴 말일세.”

    라테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테는 껄끄러운 것이다. 물과 불이 친해질 수 있을까. 게다가 녹턴은 라테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그가 세계를 파괴하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그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라테와 가이아의 관계도 잘 모를뿐더러 그 속사정은 더욱 모른다.

    정혁이 라테와의 에고 장비 계약을 도왔던 것도 녹턴이었지만 어찌 보면 이 조치조차도 정혁이 라테의 폭주를 막고 가두어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는군.”

    정혁은 물끄러미 라테를 바라보았다. 라테는 씁쓸한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왕들은 지위와 권위를 가지는 만큼 그것을 중요시 여긴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힘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녹턴과 라테는 특히나 이런 것들을 중요시했고 서로를 치열하게 견제했었다.

    대의가 있었다곤 하나 그래도 라테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정혁은 그의 반응에 뭐라 대꾸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정혁은 라테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꿔 버린 장본인이자 과거엔 가이아와 그를 떼어 놓았을 뿐 아니라 라테를 봉인하고 그의 심장을 화롯불로 사용한 만행을 저지른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라테는 손을 툭툭 털고 정혁을 보며 옅게 웃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그쪽이니 말이야.”

    정혁은 그의 미소를 보면서 속으로 그가 정신 승리 중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워 있는 정혁의 곁으로 그와 비슷하게 녹초가 된 에트론이 비실비실 날아와 쓰러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정혁이 놀라 묻자 에트론이 눈을 치켜뜨고 문 밖을 노려보더니 작게 말했다.

    “저, 저 망할 나무때기가 저를 엄청 혹사한다구요!”

    정혁은 오랜만에 듣는 ‘나무때기’라는 표현에 피식 웃고는 말했다.

    “사람 살리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는 거야?”

    “아니, 자기 힘만으로도 충분한데 열쇠지기 따위가 쓰는 천계 회복 마법까지 자꾸만 쏟아부으라고 하니까!”

    “그럼 막 성질내고 하지 그랬어?”

    “죽을까 봐….”

    정혁은 에트론에 반응에 심히 공감이 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 사이 안나가 정혁의 방으로 찾아왔다. 안나는 열린 문을 똑똑 두 번 두들기고 정혁에게 말했다.

    “녹턴과 연락은 아직이야?”

    “대답이 없네.”

    “아직 준비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더 지체되는 건 좀 별론데.”

    “달리 방법이 없잖아?”

    “그건 그렇지.”

    안나는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유르겐이 타이런에서 그 사람을 찾고 있어.”

    “그 사람? 아, 그 너도 만나 본 적 없다는 두 번째 리싸이클 이후 등장한 사람?”

    “응. 아직 소식이 없긴 하지만 유르겐이면 가능할 거야. 머리가 비어 보일 때가 많지만 생각보다 유능하거든.”

    정혁은 단박에 그녀가 유르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혁 역시 유르겐을 처음 만났을 때 꽤나 예의 없고 불쾌한 사람이라고 느꼈긴 하지만 말이다.

    “E라는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모르겠어. 어차피 나는 욘마곤으로 가지 않을 거야. 고생하겠지만 이곳에서도 이곳 나름대로의 일들을 해야 하니까. 보급 지원부터 시작해서 리안 님의 일까지 말이야. 그러면서 E라는 놈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캐내 봐야지.”

    “그들이 우리 뒤를 밟는 자들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까지 이런 경우가 없었어?”

    “산발적인 공격을 당해 그들과 대응해 본 적은 있지만 그들은 결코 우리에게 붙잡혀 주지 않았지. 불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그 일행이, 그것도 그 조직의 간부가 이렇게 뜬끔없이 찾아온 것도 처음이지만 리안 님이 이렇게 그들에게 들켜서 공격을 받은 적도 처음이야.”

    “…왜 그 남자는 이곳에 찾아왔을까?”

    정혁이 안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나는 정혁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답지 않게 이성적인 척하지 마. 안 어울리니까.”

    안나는 문 밖으로 몸을 돌려 나가며 다시 한마디를 더 던졌다.

    “걱정하지 마. 죽이진 않을 거니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정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감았다. 무거운 몸에 피로함을 느끼며 어느새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정혁! 들리나?!]

    정혁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리는 전음에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을 떴다. 이른 아침의 공기 내음이 전해지고 그 사이로 또 한 번의 다급한 전음이 밀려들어 왔다.

    [정혁!]

    이 목소리는 녹턴이었다.

    [아, 녹턴. 들려.]

    [이런 식으로 만날 생각은 없었네만 다행이네. 자네와 이렇게라도 연락이 돼서 말이야.]

    [어-어.]

    잠이 덜 깬 정혁이 피로한 눈동자를 가까스로 들어 올리며 엎드려 자고 있던 몸을 돌려 방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테도, 에트론도 보이지 않는다.

    옅은 기척으로 다른 방에 엘라와 리안이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오랜만에 평온함을 느끼기 충분한 아침이었다.

    하지만 녹턴에게서 전달되는 전음들은 이런 평온함을 만끽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방어선에서 사력을 다해 막고 있네만, 언제쯤 지원이 가능하겠나?]

    [우리 쪽에서 그쪽으로 향하는 차원 문을 개통할 준비를 하고 있긴 한데, 너도 알다시피 중앙해를 뛰어넘어 차원 문을 연결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잖아. 그래서 네 지원이 필요해.]

    [알겠네! 신호만 주시게.]

    [다른 정령왕도 함께 있는 거야?]

    [그렇다네, 그뿐 아니라 강한 힘을 가진 인간들이나 여러 종족들도 함께 최선을 다하는 중일세!]

    정혁이 기지개를 크게 켜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부탁하네….]

    정혁이 몸을 푸는 사이 녹턴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아크가… 그의 힘이 느껴지네….]

    순간 정혁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굳어지듯 멈춰 섰다.

    ‘아크…라고?’

    그때서야 정혁은 정령왕을 둘이나 두고 있는 욘마곤이 왜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수지 타산에 안 맞는다. 정령왕은 나름 신이 만들어 낸 세계의 수호자 격.

    천사장들이나 악마 군주들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오아시스는 중간계이기 때문에 힘의 제약이 걸려 있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 마계 쪽에서는 오아시스에 대한 금제가 풀려서 점점 마계에 있을 때와 비슷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군주들과 정령왕들에게는 힘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금제가 풀린 악마왕이나 그 아래의 참모 격인 대악마들에게는 버거울 수 있다. 일대일이면 모를까 일 대 다수일 경우엔 더욱 말이다.

    아크가 타이런에 등장했다면 그 이상의 존재 악마왕의 강림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을 수 있다. 정혁도 대악마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라테나 에트론에게 물어봐야 했다.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

    에트론의 계약 당시 그와의 친밀도에 따라 소환하고 유지할 수 있는 천계의 무기 숫자에 제약이 있었다. 그간의 여러 일들 때문에 사실 에트론과 계약하고 나서도 그와 소홀했다.

    이게 당장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마계의 존재들과 싸우려면 에트론의 도움이 절실하다.

    정혁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조금 진정시키려 깊게 호흡을 유지했다. 심장 박동을 천천히 낮추고 머릿속을 정리한다.

    [아직은 괜찮고?]

    [그가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네. 아크다운 거만함이겠지. 그렇기에 우린 더 촉박하네. 자네라는 변수가 반드시 필요해!]

    [곧 다시 연락 줄게. 조금만, 더 버텨 줘.]

    […믿겠네!]

    정혁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방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 리안이 회복 중인 방에서 엘라가 나왔고 그녀는 정혁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잠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리안은 어때?”

    정혁이 먼저 묻자 엘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무엇인가가 그의 회복을 막고 있어.”

    “그래?”

    정혁은 자신이 필드에서 다쳤을 때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월등히 치유가 늦는 현상을 떠올리며 어쩌면 그도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다.

    리사이클을 다수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더 중첩되어 적용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엘라가 사용하는 자연계 고등 회복 마법이나 아무리 천계의 열쇠지기라곤 하나 에트론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고유 회복 마법 역시도 쉽게 그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으리라.

    “우리는 욘마곤으로 가야 해. 엘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정혁이 조용히 엘라에게 묻자 엘라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너와 내가 계약한 목적이 리안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면 이곳에 있어도 좋아. 너는 나와 계약한 에고 장비이지만 대장장이인 나의 칭호 특성상 너는 내가 제작한 장비로 규정되어 있었고 너에게 딱 맞는 주인이 있다고 했었어.”

    정혁이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엘라에게 말했다. 엘라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네 형태는 스태프이기에 어쩌면 당연히 리안의 것이 맞을 수도 있지. 너와 그의, 내가 알 수 없는 인연을 생각해 보면 거의 100% 맞다고 봐.”

    “…리안이 회복될 때까지만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조심스럽게 말하는 엘라에게 정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전력이지만 지금은 리안에게 더 필요한 것 같네. 다만 꼭 이 제논과 그를 지켜 줘.”

    엘라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은 엘라를 뒤로 하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새 정원에 심어진 은행나무가 높게 자랐다. 엘라의 기운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은행나무는 아직 철이 아님에도 노란빛 은행잎을 달고 바람과 함께 물결치고 있었다.

    정혁은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본성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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