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9화 (99/200)
  • ◈99화

    정혁이 회의장으로 되돌아갔을 때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였다. 심각하고 어두웠던 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은 활기를 띠고 각자 자기가 맡은 일들을 안나와 김창수에게 보고하며 거대한 타이런의 지도를 펼쳐 놓고 자신들의 의견을 경쾌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아직 뻐근한 몸을 여기저기 툭툭 치면서 정혁이 회의장 중앙으로 걸어가자 팀장들이 정혁과 눈을 마주치며 눈인사를 건넸다. 의심이나 불안 같은 것은 이제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정혁은 결국 자신이 결정한 수가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작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늬안은 박달수와 한쪽에서 심각하게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치안대와 수비대는 비슷한 개념이면서도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주기적으로 제논 아니, 이제는 어쩌면 카탈 전체의 보호와 경계를 두고 조율해야 할 거리들이나공유해야 할 내용들이 많았다.

    하늬안은 박달수의 식견과 경험을 믿었고 박달수는 하늬안의 능력을 믿었다.

    총사령관인 김창수는 병력들의 훈련과 각자 직업 능력에 대한 효과적인 숙련도 증강을 위한 여러 복안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행시키는 데 열중했다. 레이드팀은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정기 레이드나 혹은 대륙 곳곳에서 보고되는 상급 레이드 몬스터에 대한 토벌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보수팀의 상당수는 정혁의 대장간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그들은 그곳의 멋진 작업 공구들과 대형 화로, 그리고 넓은 공간에 반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조는 덕분에 신나 있다.

    이 시즌에 가장 바쁜 인물은 제논의 은밀 기동 탐색 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외교팀의 최민식이었다. 안나는 그에게 타이런 전 대륙에 모든 부대를 보내기를 각별히 부탁했고 최민식은 그 부탁에 따라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탐색 부대는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곧 고급 정보들이 제논에 닿았다.

    정혁이 녹턴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받은 욘마곤의 위험 상황뿐 아니라 그 외의 국가들에 대한 상세 정보, 그리고 악마 세력들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도 그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희생도 따랐다.

    최민식은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의 부대원들의 사망 소식을 들어야 했다. 보통은 이런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절망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이 정상적이나 그는 조금 달랐다.

    “그들이 다시 로그인할 수 있을 때까지 제논이 건재해야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날 정혁이 한꺼번에 다섯 건의 사망 소식을 접한 그에게 괜찮냐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다. 정혁은 그의 마인드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최민식은 그렇게 외적인 외교뿐 아니라 어두운 쪽의 외교 역시 훌륭하게 성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였다.

    “동향 보고입니다.”

    정혁이 자리에 앉자 최민식이 문서를 꺼내 들었다. 한쪽에서 이야기 중이던 하늬안과 박달수도 중앙 테이블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욘마곤의 상황은 마스터께서 알고 계신대로 상당히 안 좋습니다. 이는 시간 단위로 가속되고 있으며 욘마곤의 각 지역에서 중앙해와 가까운 해안가 마을까지 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의 정령왕 녹턴뿐 아니라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바람의 정령왕으로 추정되는 존재까지 나서서 해안가 마을을 최종 방어지로 여기고 사력을 다해 막아서고 있다고 합니다.”

    “녹턴에게 연락 온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정혁이 놀라서 묻자 최민식이 잠시 문서에서 시선을 돌려 정혁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그 사이 안나가 말을 이었다.

    “이에 따라서 현재 제논은 즉각 욘마곤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스터께서 정령왕 녹턴 님과 연락이 닿는다면 그곳으로 향하는 차원 문을 개방할 수 있을 겁니다. 중앙해를 뛰어넘는 장거리 차원 문이긴 하나 정령왕의 마력과 맞닿는다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와 어떻게 연락을 하지?”

    “전에 받았던 전갈에 담긴 녹턴 님의 마나가 여전히 마스터의 신체에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 마나의 갈래를 따라가다 보면 녹턴 님과 닿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마법 지구의 대마법사께서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라테 님의 조력이 더불어 필요할 겁니다.”

    정혁이 자신에게 맴돌고 있는 ‘욘마곤의 눈물’을 확인했다. 별다른 버프 효과가 없는 일종의 마나 흔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녹턴이 자신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로 적용시켜 놓았을 줄은 몰랐다. 이런 것까지 추적 판단한 안나의 지혜가 더 대단하다고 그는 잠시 감탄했다.

    “계속 보고하겠습니다.”

    최민식이 잠시 정숙된 틈을 타 말하려 하자 정혁이 잠깐 손을 올리고 물었다.

    “얼마만큼의 병력이 욘마곤에 투입될까요?”

    그의 질문과 동시에 박달수와 하늬안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곤 동시에 김창수를 보았다. 김창수는 살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타이런이 공격받고 있고 욘마곤이 적극적으로 도움의 의사를 표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리할 수는 없지. 다행히 박달수의 치안대가 상당수 힘을 회복했고 하늬안의 수비대 역시 쟁쟁한 힘을 보유하고 있네. 전적으로 마스터의 대장간이 제작해 내고 있는 무시무시한 장비들 덕분이지만 말이야.”

    정혁은 속으로 변태같이 자신을 혹사시키면서도 장비를 만들어 내며 즐거워하는 조의 표정을 떠올렸다.

    “수비대와 치안대만으로도 제논 전역을 지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네. 또한 안나가 은행나무 엘프 왕국에 파견한 몇몇 참모들이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해 줘서 아린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받아 낼 수 있었어. 제논이나 다름없는 카탈은 욘마곤에 50%의 병력을 파견하고도 굳건히 지켜 낼 수 있을 거야.”

    “…퍼센트 말고 실질적인 숫자로 말해 주십쇼.”

    정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되묻자 안나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플레이어 2만, 외부 세력 연합이 3만, 도합 5만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할까요?”

    “정의하신 충분의 범위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타이런 전체를 구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죠.”

    정곡을 찌르는 안나의 말에 정혁이 무안한 듯 입맛만 다셨다. 그러다가 박수를 한 번 짝 치고 주위를 환기시키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뭐, 정 안 되면 제가 혼자 다 해치워 버리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어처구니없어 할 이 발언이 그의 정체를 알거니와 그의 행보를 눈으로 보고 느꼈던 팀장들에겐 알 수 없는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최민식이 말을 이었다.

    “에도라 왕국은 자국 방어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평소 안도리니 제국보다 욘마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고 없이 들이닥친 악마들의 힘이 생각보다 위협적이라는 판단을 수뇌부에서 한 것 같습니다. 랭커들이 왕국 경계에 배치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안도리니 제국은….”

    최민식이 말끝을 흐리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파악이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파견된 부대원들 모두가 사망했습니다. 그들은 마나보다 기술을 믿고 있는 터라서 뭔가 특별한 감시 체계를 구축한 것 같습니다. 제국 국경엔 강철의 벽이 지면을 뚫고 올라와 세워졌고 아직 어떠한 악마의 침공도 없었던 것으로 예측됩니다.”

    “문을 걸어 잠갔구만.”

    무역팀장 샹드레이가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다. 어쨌든 세력 싸움을 이어 가고 있는 타이런 대륙에서 지금의 악마 침공이 이 지루한 싸움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어부지리 격의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도의적이라고 알려진 에도라 왕국만이 위기를 극복하고 공생하기 위해서 노력 중인 모양이다. 그러나 안도리니에서 계속 이런 폐쇄 정책을 고수한다면 에도라 역시 만약을 대비해 힘을 아낄 수밖에 없다.

    결국 욘마곤의 사활은 제논의 지원 여부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수상한 동향도 있었습니다.”

    최민식의 한마디에 조금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다시 그에게 집중되었다.

    “루난의 평원이 온통 뒤집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그 넓은 평원의 땅이 전부 갈아엎어지고 군데군데 엄청난 전투 흔적들이 난무했다는 보고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 부대원들뿐만 아니라 타이런의 모든 존재들이 이 광범위한 전투에 대해서 어떤 기척이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루난의 평원은 개척자 루난의 마지막 숨이 끊어진 곳이라고 전해진다. 타이런 대륙의 넓은 평야지대를 가리키며 평원 중심부에는 루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넓은 평원은 종종 거대한 세력들의 전장이 되곤 했다. 워낙 넓은 땅이기 때문에 그 땅 전체가 난장판이 됐다면 모두가 알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다?

    정혁은 살며시 안나를 쳐다보았다. 안나 역시 그의 시선을 느낀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정혁을 마주 보지는 않았다. 그녀의 생각이 정혁과 같음을 깨닫고 그는 시선을 돌려 최민식을 바라보았다.

    “부대원들이 이 거대한 사건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그 정도 규모의 전투를 누구도 모르게 감출 수 있다면…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제 생각에는 악마의 침공만큼 신경 써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감일세.”

    김창수가 턱을 쓸어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주제와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일전의 그 남자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박달수가 뜬금없이 손을 들어서 말했다. 정혁은 갑작스레 생각한 불쾌한 남자를 떠올리곤 약간 인상이 구겨진 채로 물었다.

    “지하 감옥에서는 조용하던가요?”

    “예, 밀착 감시하고 있으나 순종적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편안해 한다고 하더군요.”

    “그자는 제가 만나 보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해 볼게요.”

    안나가 박달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어쩐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정혁만큼은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왔을 것입니다. 만약 그 목적이 우리의 방향과 일치한다면… 그렇다면 그자를 이번 전쟁에 중요한 전력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박달수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동의가 되는 의견이다. 그자는 이 제논의 본성에 기척 없이 스며들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고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가 상당한 강자임을 모두는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안나가 박달수의 의견을 딱 잘라 거절했다. 박달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안나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고 확고했다. 정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단 지금은 안나 님의 의견을 따르기로 합시다. 어쨌든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왔을 것이며 덕분에 우리의 결속이 무너질 뻔도 했잖습니까.”

    정혁이 말을 마치며 안나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달라지지 않았다. 딱딱하고 성나 있다.

    “시간이 없으니 회의는 마무리하겠습니다. 마스터께서는 마법 지구로 저와 함께 가셔서 녹턴 님과 연락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차원 문만 개통된다면 우리는 즉각 욘마곤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나머지 팀장님들이 잘 준비해 주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안나의 조금 성급한 마무리로 돌풍 같았던 회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정혁은 안나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그녀와 대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본래의 모습대로 그 남자에 대한 일 역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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