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8화 (98/200)
  • ◈98화

    그녀의 고함과 동시에 정혁의 곁에 엘라와 라테 그리고 에트론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라는 고함을 지르고 있는 하늬안을 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고 라테와 에트론은 처참한 몰골의 정혁을 살폈다.

    엘라는 일단 정혁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한숨을 한 번 쉬곤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라테가 따뜻한 온기의 손으로 쓰러진 정혁을 일으켰다.

    에트론은 재빨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치유 마법을 이용해 그를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라테는 곁눈질로 이성을 잃은 것 같은 하늬안을 쳐다보았다.

    정혁이 쿨럭거리며 호흡을 고르다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말했거든, 내 원래 정체.”

    그때서야 라테는 이해가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

    러곤 정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얻어맞을 일은 또 뭔가? 원래 성격대로 하면 될 것을.”

    라테의 물음에 정혁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왜 그랬을까. 왜 하늬안에게는 그냥 맞아 주는 것을 선택했을까.’

    “낯설어.”

    정혁이 작게 말했다.

    라테는 그가 다음 말을 뱉기를 기다리며 그의 자세를 고쳐 앉혔다.

    “…그때의 내 모습이 낯설다고. 라테, 네가 기억했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때? 같은 사람이었을까? 맞아?”

    “…허허.”

    라테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혁은 그 웃음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속에서 다시 고통이 밀려 올라와 그는 몇 번 더 쿨럭거렸다.

    “…가 봐,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야.”

    “괜찮겠어요?!”

    에트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으나 라테는 에트론의 작은 어깨를 톡톡 치면서 고개를 까딱했다.

    물러나자는 의미였다.

    에트론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라테는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가면서도 계속해서 정혁의 주저앉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늬안의 처절한 고함이 잦아들고 정혁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하늬안을 보았다.

    잔여 HP에 대한 경고는 사라졌다.

    에트론의 회복 마법 덕분에 조금은 체력이 회복되었다.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이성적인 사고는 다시 또렷하게 돌아왔다.

    하늬안은 여전히 정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나가 쳐 놓은 장막 사이로 드웨이크가 다급히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드웨이크는 넝마가 된 자신의 마스터와 그를 두들겨 팬 것이 분명한 하늬안 사이에서 기겁을 하곤 소리쳤다.

    “하늬안!”

    하늬안은 드웨이크 역시도 불쾌하다는 얼굴로 노려 보았고 드웨이크는 그런 하늬안의 낯선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곤 정혁에게 달려왔다.

    “괜, 괜찮으십니까!? 이, 이게 무슨 꼴입니까!”

    “…하하, 이 정도 손맛이면 굳이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뻔했어요.”

    “농담이 나오십니까.”

    드웨이크가 허허 웃는 정혁을 보면서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의 웃음을 보자 화가 끓어올랐는지 하늬안이 정혁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드웨이크는 급히 그녀를 틀어막았다.

    하늬안이 욕지거리와 고함을 내뱉으며 허공에 헛손질을 해 댔다.

    정혁은 드웨이크에게 말했다.

    “내버려 두시죠. 그 편이 저도 좋습니다.”

    드웨이크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막으면서 정혁을 돌아보았다.

    회복 마법 덕분에 얼굴의 붓기와 상처가 회복되고 있던 정혁이었지만 여전히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확고한 표정이었다.

    “그, 그렇지만!”

    그의 말에 정혁이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드웨이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늬안을 놓아 주었다. 하늬안은 그대로 정혁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붙잡고주먹을 크게 치켜들었다. 정혁은 하늬안을 바라보았다.

    하늬안은 주먹을 든 채로 부들거리면서 그를 보다가 잡았던 멱살을 거칠게 놓으면서 그의 옆에 털썩 하고 앉았다.

    “벌써 끝이야?”

    드웨이크는 속으로 저 성깔이나 근성은 여전히 ‘한’답다고 생각했다.

    하늬안은 씩씩거리면서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눈을 흘겼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말이야.”

    정혁이 누운 채로 뿌연 막에 의해 가려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

    “다시 플레이를 하게 되면서 내가 과연 ‘한’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

    고개를 숙였던 하늬안이 얼굴만 살짝 들어 곁눈질로 정혁을 보았다.

    “나는 분명 ‘한’인데 이렇게 누군가를 이끌고, 어디를 대표하고, 무슨 누굴 구하고 말이야, 하- 말도 안 된다고, 가끔 그 괴리감이 심해서, 답답하고 불편했어.”

    정혁은 자신을 보고 있는 하늬안의 시선을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본의 아니게 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됐지만 오히려 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 그래, 어찌 됐건 나는 ‘한’이었었구나. 이렇게 정신이 나갈 정도로 두들겨 맞을 만큼 끔찍하게 독했던 ‘한’이었구나. 오히려, 오히려 편해.”

    “미친놈.”

    하늬안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정혁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웃으면서도 아픈지 몇 번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럼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하늬안을 보면서 더 크게 웃었다.

    하늬안은 욱하는 얼굴로 다시 주먹을 들었다가 풀었다.

    “그래! 그래… 그래, 그 미친놈. 그랬다고 내가.”

    정혁은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큰 숨을 몇 번 쉬었다.

    정혁의 마음속에 있던 괴리.

    ‘한’이라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현실의 진짜 자아인 ‘정혁’이 이 세계로 당겨져서 지금까지왔지만 뭐랄까,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행보를 걷고 있던 그는 자신이 진정 ‘한’이었었는지, 그때의 일들이 진짜 자신의 과거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끔 가슴에 품곤 했다.

    ‘한’이었을 때의 힘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한’이었을 때의 성격을 여전히 가지고 있긴 했어도 시간이 흘러가며 결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록 불안함과 동시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하늬안의 격한 행동과 반응이 정혁의 마음에 옅어지고 있는 ‘한’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했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리라.

    그가 왜 자신의 캐릭터 이름을 ‘한’이라고 지었는지.

    그를 만났던 모든 플레이어들이라면 당연히 그를 이렇게 대해야 맞다. 그래, 이게 맞다.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놓아 주어야 할 것 같다.

    ‘한’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이미 그보다 강한 자를 만났다.

    그는 사력을 다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또 가려져 있었던 한 꺼풀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이 아니라 그 이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정혁은 이날을 마지막으로 ‘한’을 찾지 말자고 다짐했다. 진정한 랭킹 1위가 되는 것이다.

    “다 끝난 거야?”

    “끝났겠어?”

    하늬안이 정혁의 물음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상기된 얼굴로 재차 말을 이었다.

    “정신 차리면 또 때릴 거야. 그러다 정신 잃으면 기다리고, 또 때리고, 기다리고, 또 때리고.”

    “식상하게, 내가 했던 방법을 그대로 쓰냐?”

    “넌 이거보다 더했거든? 게임이 문제가 아니었어, 그냥 정신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그랬는데 뭐? 식상해?”

    “하하, 그래 그래, 좀 봐줘라 좀.”

    정혁이 가까스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위아래로 가리키고서는 다시 툭 하고 손을 내려놨다.

    “처음, 강철 망치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미 날 알고 있었겠네?”

    “그렇지.”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왜?”

    “아니,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다 알면서도 우리한테 접근하고.”

    “야, 접근까진 아니지. 오히려 네가 날 죽이려고 했었잖아, 말은 똑바로 하자.”

    하늬안이 인상을 구기면서 정혁을 쳐다봤다가 뭔가 떠오른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나으면 또 때리고 할 건 아니지? 까먹지 마, 나 너네 길드 마스터야.”

    정혁이 하늬안을 흘깃 보면서 말했다. 하늬안은 정혁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말했다.

    “무기나 원상복귀해 줘. 때리고 자시고 반으로 갈라 버릴 거니까.”

    하늬안은 그대로 안나가 쳐 놓은 막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드웨이크는 하늬안이 자리를 이동하자마자 정혁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하곤 회복실로 향하는 차원 문을 열어 그를 그곳으로 옮겼다. 안나는 그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막을 거두었다.

    ***

    정혁이 눈을 떴을 땐 옆에 하늬안이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정혁은 눈을 뜨자마자 발견한 사람이 하늬안이라는 것에 마찬가지로 불쾌한 마음이었다.

    둘 사이는 미묘하게 어색했다.

    한바탕 싸우고 난 뒤여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하늬안은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있던 물 잔을 들어 정혁에게 권했다. 정혁은 몸을 조금 일으켜 앉은 뒤 적당한 온도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가 물을 다 마시자마자 하늬안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는데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다시 입을 닫았다.

    보수팀장 리디안이었다.

    리디안은 정혁이 일어난 것을 보곤 환하게 웃더니 특유의 유쾌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하늬안의 어깨를 툭 치면서 음흉한 얼굴로 말했다.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뒤진다, 진짜.”

    정혁은 이제까지 하늬안이 구사하는 여러 욕설들과 말투를 전부 들어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방금 말투는 이 세상의 살기가 아닌 그 너머의 어떤 살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얼굴은 거의 살쾡이같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 아 왜. 아니, 마스터께서도 예? 저희를 그렇게 고민하게 두고 가셔 놓고 시내 한가운데서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리디안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다시 하늬안을 툭툭 쳤다.

    정혁은 그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멍하니 리디안을 바라보았고 리디안은 하늬안의 눈치를 살피다가 볼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제논 본성 전체가 아주 그냥 들썩들썩합니다. 우리 미모의 수비대 팀장님하고 마스터님하고 시내 한복판에서 사랑싸움 찐하게 하셨다고 말이에요!”

    “…!”

    남아 있던 물을 마저 마시기 위해 잔을 들어 물을 삼키던 정혁이 그만 입안에 있던 물들을 전부 뱉어 낼 뻔했다. 정혁은 가까스로 물을 모두 삼키고 당황해 기침을 해 대며 그에게 물었다.

    “…사, 사랑 뭐, 뭐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늬안이 정혁을 노려보고는 이빨을 깨문 채로 말했다.

    “르듸안, 입 닥치즤 믓해?”

    순식간에 살기를 가득 띤 하늬안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서자 뭔가 잘못됐단 느낌이 단단히 든 리디안이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정혁은 진심으로 그가 오늘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보수팀장 맡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안나에게 물어봐야겠다.’

    하늬안의 합법적인(?) 살인이 벌어지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김창수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잔뜩 성이 난 하늬안을 보고는 정색하며 눈을 부릅떴고 하늬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의 시선 앞에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마스터께서 일어나셨어요, 방금입니다.”

    “사과는 드렸나?”

    “사과…는….”

    하늬안이 찔끔 찔끔 정혁의 눈치를 보았다. 정혁은 피식 웃더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였어도 그랬을 겁니다. 제가 살아 있는 게 사과지, 달리 뭐 받을 것도 없습니다.”

    정혁의 말에 김창수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하늬안을 보다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조금 더 회복되면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 있네. 욘마곤에 대한 일일세. 정령왕 녹턴의 도움 요청 이후에 추가적으로 파견한 정찰 병력들의 소식이 들어왔다네.”

    정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창수를 보았고 김창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긴 시위를 놓을 때가 된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