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7화 (97/200)
  • ◈97화

    “사령관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아무리 친분이 있었다 한들, 이곳은 공식 석상일세.”

    김창수의 날이 선 말투에 박달수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어차피 나는 치안대. 우리는 용병 집단이지. 누구의 밑에 들어가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으며 그저 적당히 힘을 얻고 적당히 살아가면 그만이야. 소속감? 글쎄, 나는 잘 몰랐었네. 그러나 이곳.”

    박달수가 손가락으로 회의장 테이블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이곳, 제논에서만큼은 알 수 없는 소속감이 마음을 채웠지. 처음 저 정혁이라는 남자를 만나고, 그와 인연이 되어 은행나무 엘프 왕국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데 일조하고, 평소에 썩 좋게 보지 않고 있던 자유 연맹이 무너지면서 그에게 거둬지고, 또 난생 처음 그렇게나 많은 악마들과 많은 동료들 사이에서 전선에 뒤엉켜 싸웠다네.”

    박달수는 모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저 남자가 뭔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고 믿었어. 직감, 그래 직감이지. 자네들보다 월등히 긴 시간을 나와 저 김창수 사령관이 이 세계 속에서 보냈으니 말이야.”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치면서 말하곤 선채로 팔짱을 꼈다.

    “물론 상상이상의 사실이긴 하지. 불쾌하고 증오스럽기도 하다네. 우리가 아는 ‘한’은 그런 존재였으니 말이야. 그런 사람이 개과천선했다고 해서 세상이 좋게 바라봐 줄 리도 없지. 하늬안을 보게.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않은가? 그러나.”

    박달수는 잠시 틈을 갖고 몇 번 큰 숨을 쉬다가 말했다.

    “적어도 그때에는 우리 모두가 게임을 게임답게 즐겼어. 지금과 같이 권력이니 세력이니 그 속에 썩어 빠진 정치와 알력 같은 것으로 게임을 로그아웃하면 볼 수 있는 빌어먹을 세상과 똑같은 게임 속을 살고 있진 않았다고. 그 미친놈 하나 때문에, 모두가 그 미친놈 하나 잡으려고 각자의 등급을 올리고 연합을 맺고 선의의 경쟁을 하고 돕고 응집하고 싸우고 아이템을 모으고 강화하며 게임다운 게임을 했지 않나.”

    김창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의 친우였던 비르파인을 떠올렸다.

    제논의 왕이었던 그. 그와 게임 속에서 즐겁게 즐겼던 시간.

    그 시간들이 ‘한’이 세계에서 군림하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지고 대전쟁이 도래하면서 비르파인은 점점 정치와 권력에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한 말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해도 좋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드네. 내가 이 제논에서 느꼈던 소속감은 과거 ‘한’이 깽판 치던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네. 내가 더 강해, 네가 더 강해, 이따위 신경전으로 대륙 땅따먹기나 하는 지금이 아니라 거대한 악에 함께 부딪치고 맞서며 뭔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지금이 말이야.”

    박달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한’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납득이 되지.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다시 세계를 다듬어 가고 있는 걸세. 우리가 모두 함께 전 대륙을 평정하고 우리의 지도자가 ‘한’보다 더욱 강한 자리에서 그 이미지만으로 모두의 고개를 숙일 수 있게 된다면 말이야. 우리는 세계의 질서를 다시 잡고 게임을 다시 게임답게 즐길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며 함께 나아가면 되는 거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지도자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그렇지 않을까 싶네. ‘한’과 같지만 ‘한’과 다른 모습으로 말일세.”

    김창수가 헛기침을 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박달수에서 김창수에게로 돌아갔다.

    “동의하네. 나 역시 그가 비범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네. 자네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 이상한 남자가 마스터에게 ‘한’이라고 했을 때 모두 어떤 놀라운 깨달음을 얻지 않았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불쾌한 생각 말이야. 치안대장이 나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지만 실은 아니야. 나도 정확히는 몰랐네. 당시엔 추가적인 분란을 막기 위해 자네들에게 그렇지 않으리라 단언했지만 그럼에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지. 그의 정체가 만약 진짜 ‘한’이었다면 그를 통해 벌어진 이 놀라운 일들의 의문점들이 얼추 맞아 들어갔으니 말이야.”

    김창수의 말에 박달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가 말했듯 나 역시 모두에게 권하네. 모든 것은 여러분의 자의에 맡기는 바일세. 마스터의 비밀에 대해 말하고 다녀도 좋고 팀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자네들의 신념에 따라 움직여도 좋네.”

    김창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서 눈빛에 어떤 의지를 담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결국 오아시스 전체는 제논의 손안에 들어올 것이네. 이 과정이 치안대장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힘이나 권력을 탐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들은 모두 알고 있을 테지. 세계는 위협 속에 있고 우리에겐 그 세계의 위협을 타파할 든든한 리더가 있을 뿐. 우리의 꿈을 이뤄질 거고, 그 자리에 함께 있을지 혹은 다른 입장을 가진 채 우리와 대립할지, 그 선택적 자의가 자네들에게 있다는 것일세.”

    박달수는 속으로 저 우직한 양반이 자의라는 핑계를 대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켜본 다른 팀장들의 눈빛에는 이제 일전의 불쾌함이나 당혹감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불가능한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이 오아시스라는 게임의 시스템을 말입니다.”

    무역팀장 샹드레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외교팀장 최민식 역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면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보수팀장 리디안은 조금 풀어진 분위기를 느끼며 경직된 목 근육을 풀었다.

    “뒤가 구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없겠습니까마는, 이건 좀 너무 심한 케이스라.”

    최민식의 말에 모두 묵묵히 동의하는 느낌이었다. 김창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박달수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곳에 있는 자네들은 모두 나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네. 내가 인정하고 내가 받아들인 사실이며 자네들 역시 눈앞에서 직시한 사실임을 잊지 말게. 우리의 마스터는 그릇이 충분한 자일세. 그러니 우리 이제는 과거의 망령에 붙잡혀 있지 말게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일세.”

    “그렇죠, 산더미… 맞습니다.”

    외교팀장 샹드레이가 한숨을 깊게 쉬며 고개를 저었다.

    리디안이 그의 어깨를 툭 치더니 말했다.

    “그래, 뭐. 역사적인 인물과 함께한다니 새로운 느낌이네요. 하하.”

    “정혁 님도 그렇고 김창수 사령관도 동의하긴 했지만, 자네들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지만 한 가지, 다른 팀원들에게는 오늘 이 모든 사실은 함구하는 것이 좋겠네.”

    박달수의 말에 모두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회의장 문을 누군가 다급히 두드렸다.

    김창수가 들어오라고 소리치자 수비대의 한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급히 소리쳤다.

    “팀장님이 무기를 들고 어딘가로 급히 가셨습니다! 저희가 사력을 다해 막아 봤지만 이제껏 그, 그렇게 화가 난 팀장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드, 듣기론 팀장님께서 마스터의 사택으로 가, 가셨다고…!”

    박달수가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고 김창수는 드웨이크에게 눈짓을 보냈다. 드웨이크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안 오셔도 됩니다.”

    드웨이크는 잰걸음으로 바삐 회의장을 나섰다.

    ***

    쿠쾅-

    정혁은 자신의 왼편으로 날아든 대도 한 자루를 가볍게 피했다.

    땅에 날아와 박힌 대도는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고 정혁은 그 폭발을 화염의 망치로 흡수하며 검은 연기를 흩어 냈다.

    그리곤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제논에 이렇게 거대한 대도의 주인은 한 명밖에 없다.

    “하늬안.”

    연기가 걷히고 하늬안이 씩씩거리는 모습으로 정혁의 앞에 서 있다.

    그녀의 뒤로 당황한 안나가 재빨리 자신의 마나를 펼쳐 주변과 그들 사이에 차단 막을 만들었다.

    정혁의 사택으로 가는 뒷골목. 폭발음이 들렸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릴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정혁의 사택에 두 대도를 메고 잔뜩 흥분한 채 달려간 자신의 팀장을 본 팀원들 역시 우르르 달려올 것이 뻔했다.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행여 정혁이 ‘한’이었다는 사실이 퍼지게 되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다.

    “너!”

    “너…라니.”

    정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잔뜩 성난 하늬안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그새에 이미 하늬안의 대도가 정혁의 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정혁은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하고는 스킬 창을 펼쳐 하늬안의 무기 재구성을 취소했다.

    그러자 그녀의 무기가 황금빛을 발하더니 이내 붉은 기운이 사그라들고 염구 두 개가 무기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그딴 장난 없어도 충분해!”

    하늬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대도를 마치 폭풍처럼 휘둘렀다.

    정혁은 그녀의 악력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과거 ‘한’이었을 때 귀가 떨어져라 들었던 그녀의 외침을 또 듣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혁은 그녀의 검무를 모두 피하면서 염구를 모조리 던져 하늬안의 양손에 적중시켰다.

    힘을 조절한 염구는 그녀의 손을 관통하지 않을 만큼의 충격을 전달했다.

    그 덕분에 하늬안은 양손에서 대도를 떨어트렸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정혁은 양손의 망치를 거둬들인 뒤 순식간에 아파하는 하늬안을 지나 대도에 다가가 이공간을 열어 대장간 안에 냅다 집어넣었다.

    작업 중이던 조는 뜬금없이 대장간에 내던져진 익숙한 대도 두 자루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신이 하고 있던 작업을 이어 갔다.

    무기마저 빼앗긴 하늬안이 양손을 툭툭 털고는 주먹을 꽉 쥐고 이빨을 깨물며 정혁에게 덤벼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더니 정혁은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랐다가 절도 있게 이어지는 그녀의 주먹질을 막아 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어떻게든 정혁의 근처에 근접했을 때마다 그의 귓가에 가지고 있는 모든 포효에 관련된 스킬을 난사해 댔다.

    그러나 정혁은 그때마다 일정 거리를 벌리며 각종 스킬들을 적절히 피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증오로 타오르는 듯했다. 정혁은 정신없이 달려드는 하늬안의 공격을 계속해서 피하기만 하다가 그 눈동자를 보곤 동작을 멈췄다.

    하늬안의 주먹이 그대로 안면을 강타했다.

    정혁은 얼굴을 얻어맞고 뒤로 자빠졌다. 하

    늬안은 그대로 다음 타격을 이어 갔다. 정혁은 얼굴과 복부, 옆구리 등등을 마구 강타당했다.

    채광 활성화 스킬도 발동시켜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물 몸 그 자체였다.

    [HP가 20% 남았습니다!]

    오랜만에 그의 시야 전체가 붉은 빛으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HP가 10% 남았습니다! 경고!]

    경고 문구가 계속 반짝였다.

    이대로 맞아 죽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뭐, 이제는 모르겠다 싶었다.

    다른 팀장들에게 이야기했던 피하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HP가 5% 남았습니다! 경고! 경고!]

    이대로 몇 대만 더 맞으면 깔끔한 죽음이었다.

    정혁은 눈을 감았고 다음 타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쉴 틈 없이 이어지던 하늬안의 주먹질은 멈췄고 정혁은 살짝 눈을 떠서 하늬안을 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하늬안은 정혁과 눈을 마주치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을 몇 번 치다가 주저앉아 고함을 내질렀다.

    안나가 쳐 놓은 장막 바깥까지 쟁쟁히 울릴 만큼 깊고 처절한 고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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