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6화 (96/200)
  • ◈96화

    하늬안은 제일 늦게 회의장으로 도착했다.

    정혁을 중심으로 다른 팀장들과 총사령관 그리고 안나와 박달수까지 제논의 모든 핵심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하늬안은 중앙 지도자 자리에 앉아 있는 정혁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그 이상한 남자가 한 말 때문에 하늬안은 머리가 쥐어 터질 것 같은 고민 속에 파묻혀 있었다.

    이성적이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맞지만 마음으로는 자꾸 그의 말이 사실 같았다. 하늬안은 ‘한’을 만났던 때를 상기시켜 보았다.

    그녀가 오아시스라는 게임을 접하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나름의 포부를 가지고 어서 빨리 칭호를 얻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예상치 못한 게임 센스와 넓어져 가는 인맥들을 통해서 심심찮게 몇몇 길드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그러다 만난 ‘한’이라는 사람은 정말 지옥에서 기어 온 악마와 같은 자였다.

    그에겐 심심풀이였겠지만 하늬안에게는 게임을 접을 수도 있었던 끔찍한 기억이다.

    ‘한’은 그녀가 죽지 않을 만큼의 힘으로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혀왔고

    하늬안은 사력을 다해 괴롭힘 속에서 발버둥쳤다가 결국 그에게 죽여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런 과정 속에서 포효의 검사라는 이상한 칭호까지 얻어 버렸다.

    오아시스 속 그녀의 기억 중에 정말 지워 버리고 싶은 시간들이기도 했다.

    다만 ‘한’과의 10여 일, 그 긴 시간이 하늬안을 조금 더 강하고 노련한 검사로 만들어 주었다.

    또한 칭호 숙련도까지 상승하여 칭호에 맞는 여러 스킬들이 개방되기도 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만큼의 증오를 품고 있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을 다시 만난다면. 글쎄, 하늬안은 아마 다시 싸워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정혁이 이전과는 달리 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했다.

    정혁은 안나를 보았다.

    그녀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그가 ‘한’이었다는 과거를 밝히고자 하는 의지를 말이다.

    처음엔 그녀도 노발대발하며 반대했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심어진 의심의 씨앗이 다른 방향으로 피어나 제논을 갉아먹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결국 마지못해 동의했다.

    다만 ‘오아시스’라는 칭호까진 밝히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정혁도 ‘오아시스’라는 칭호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충분히 동의했다. 그리고 모인 이 자리에서 정혁은 찬찬히 모두의 얼굴을 보았다.

    드웨이크와 하늬안. 이미 정혁과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낸 이들이다.

    그 외의 팀장들도 모두 제논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사력을 다했다.

    박달수 역시 뒤늦게 합류했지만 최선을 다해 제논을 도왔고 그의 치안대는 제논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고 김창수.

    정혁은 알고 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제논도, 그리고 지금의 정혁도 없었을 것이다.

    안나와는 다른 결로 김창수는 정혁에게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혁은 가질 수 없는 넓고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정적만이 맴돌고 있는 회의장에서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모두가 모였고 모두가 앉아 있었으며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정혁을 보고 있지 않았으며 각자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의 헛기침과 침 넘기는 소리, 몸을 움직일 때 의자와 닿으며 나는 잡다한 소리들이 정적 사이로 흐를 뿐이었다.

    정혁은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이들과의 만남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정혁이 이런 사실을 밝혔을 때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는 자들이 있을까. 과연, 있을까.

    그가 큰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회의장 테이블을 딛고 선 그의 움직임에 모두가 일제히 정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어떤 거짓도 담겨 있지 않는 사실임을 밝힙니다.”

    모두가 침묵하며 정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혁은 다시 한번 깊은 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사령관께서 결코 그럴 리 없다 하셨지만. …예, 저는 ‘한’이 맞습니다.”

    그의 말이 끝났지만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 그저 가만히 정혁을 응시할 뿐이었다. 적막했지만 그 느낌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어떤 고뇌와 여러 감정들이 섞인 그런 적막이었다.

    그 순간 하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벅 저벅 회의장을 나갔다.

    정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고 안나가 그의 눈치를 한 번 보고선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거짓이 담겨 있지 않다 하셨으니 거짓일 리 없고, 아니, 이따위 거짓말이 득이 될 리가 없으니 더욱 믿을 수밖에 없긴 한데, 나 참.”

    박달수였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지르고는 다시 정혁을 보았다.

    “…다행히 당장에 달려드시는 분은 없네요.”

    “농담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외교팀장 최민식이 정혁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정혁은 작게 실소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박달수 님 말대로 제가 이런 거짓말을 할 일도, 이유도 없습니다. 아까 전의 그 일은 그 일대로 묻어 둬도 되었을 테죠. 하지만 과연 여기 계신 여러분이 그 일을 그저 해프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가 주실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정혁이 걸음을 천천히 옮겨 자신의 의자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를 한 손으로 쥐고 섰다.

    “처음 여러분들을 만났을 때 마음속에 이미 호기심이 생겼을 겁니다. 그땐 아마 저는 200레벨도 달성하지 못한 풋내기였을 테니까요. 모두들 의아했겠죠. 아직 200레벨도 아닌 플레이어가, 게다가 하등 보잘것없는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가….”

    정혁은 잠시 드웨이크를 보았다. 드웨이크, 그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정혁이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밝힌 적이 없었다. 정혁의 부탁이 있기도 했고 그가 숨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강하며 또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이에요.”

    정혁은 시선을 거둬 다시 장내를 번갈아 보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릅니다. 저는 ‘신’을 만났고 그와 싸웠고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한테는 한 번의 깜박임이었지만 세계는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고 긴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죠.”

    “신이 있던가?”

    박달수가 작게 물었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 있더군요. 그리고 저는 당시의 제 모습답게 신이라는 작자에게도 거침없이 덤벼들었습니다. 결과는 뭐, 보시는 대로.”

    “대단하신 정체를 밝히고 나니 꽤나 개운하신 느낌입니다. 그동안 답답하셨나 보군요.”

    보수팀의 리디안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말투에 가시가 있었다.

    “글쎄요, 기분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저만 알고, 저만 품고 있던 사실이다 보니 네, 개운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정혁이 이들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혁은 허공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저는… ‘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혁이기도 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 ‘한’을 얼마나 증오했고 또 그를 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를 떠올리면 끓어오르는 감정이 너무 깊고 어두워서 어떻게든 해소해야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하십시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비밀에 부칠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의심한다 해도, 그렇다고 해도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모습이 어쩌면 더 ‘한’ 같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한’이 아니라 ‘정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따라와 주었던, 함께 생사를 넘으며 결국 우리 모두의 힘으로 제논을 카탈의 제왕으로 세웠던 그 사람 말입니다.”

    정혁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비밀은, 적어도 여러분에게만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꿈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한 명씩 고개를 들어 정혁을 보았다. 정혁은 그들과 간단히 시선을 마주치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자유에 맡기려고 합니다. 하늬안이 행동했던 것처럼요. 휘하의 병력들에게 공개해도 좋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불쾌하고 거북하여 제논을 떠나셔도 좋습니다. 혹여, 이런 제 모습이 무책임하고 적반하장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새 회의장 문 앞에까지 다다른 정혁이 뒤를 돌아 아직 그에게 시선이 머물러 있는 모두를 보며 말했다.

    “저는 앞으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모든 사실 앞에 당당히 서서 여러분들과 함께 싸워 가고 싶습니다. 지금의 ‘정혁’은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국 오아시스를 통일할 위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정혁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문고리를 돌려 회의장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모두는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김창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드웨이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알고 있다. 그를 포함한 여기 있는 모두가 과거 플레이 속 ‘한’과의 접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각자 나름대로 세계에서 이름을 알린 자들이고 더불어 플레이 시간도 오래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늬안이나 사령관을 제외하고는 ‘한’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던 자들이다.

    길드의 누군가가 ‘한’에 의해 죽임을 당했거나 아는 자가 어떤 피해를 입어 고통을 호소한 경우가 다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그를 통해 입은 정신적인 충격이나 혹은 그의 이미지 때문에 지금의 정혁을 불쾌해 할 수 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지도자에게 상상 이상의 배경이 있었다고 하니 누군들 그것을 쉽게 무시하고 전과 같은 마음으로 따를 수 있겠는가.

    드웨이크는 고민했다. 만약 자신이 알고 있는 ‘오아시스’라는 칭호에 대한 비밀을 이곳에서 밝힌다면 이 축축하고 불쾌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반전시킬 수 있을까.

    그는 잠시 고민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혁이 자신이 ‘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오아시스’라는 칭호의 비밀까진 밝히지 않았다.

    아마 거기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김창수.”

    박달수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찌르듯 울렸다.

    김창수는 고개를 들어 박달수를 보았다. 그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불린 것에 대한 불쾌함이 표정에 묻어났다.

    “자네는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의 시선이 김창수에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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