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5화 (95/200)

◈95화

정혁은 당황해서 들이마신 숨을 내쉬지도 못했다. 그대로 마스크 조각을 쥔 채로 한쪽 눈썹을 구기며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이 사라진 지 3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악명은 모든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와 부족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있으며 그가 사라진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자들도 많았다. 물론 그에게 본때를 보여 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였다. 현재의 랭커들도 대부분 ‘한’의 괴롭힘 속에서 커 왔기 때문에 당연지사 그를 싫어하다 못해 역겨워했다.

‘한’이 사라지며 세계의 ‘절대악’이 없어지자 두 차례의 대전쟁이 발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이 있던 때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는 초보건 랭커건 관계없이 소위 자기 꼴리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의 대명사였다. 그가 그 스스로 세계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고 변명해도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으리라.

지금 정혁은 과거 ‘한’에 비하면 환골탈태의 수준을 넘어서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사실 ‘한’이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좋을 건 없었다. 쌓아 온 이미지의 금자탑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이며 더불어 제논 역시 순식간에 붕괴될 수 있다.

안나는 양손이 떨려 옴을 느끼며 제발 그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기를 빌었다. 시대의 흐름상 정혁은 ‘한’이라는 존재를 알 수 없는 시기에 생성된 캐릭터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어야 맞다.

제발. 제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정혁이 반응 없이 굳어 있자 남자는 재밌다는 듯이 정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아, 비밀이었어?”

그의 능청맞은 반응에 정혁은 그때서야 들이마신 숨을 뱉을 수 있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전신을 뒤덮었고 이마에서 땀이 맺혀 굴러 내리는 느낌까지 전부 느껴졌다. 잠깐, 이 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그때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창수가 움직였다. 그는 육중한 갑옷을 입은 채로 빠르게 남자에게 달려들어 양손으로 그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렸다.

“…예를 갖추지는 못할망정….”

김창수는 사나운 얼굴로 무겁게 말하곤 남자의 두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김창수를 보더니 시선을 돌려 정혁에게 말했다.

“신분 세탁을 잘했네.”

어느새 안나는 자신의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정혁은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 같아 다시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는 천천히 남자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신의 정수리에 꽂히는 것 같았다.

[모른 척하게.]

순간 정혁에게 전음 한마디가 꽂혀 들어왔다.

정혁은 그것이 김창수의 것임을 단박에 깨달았다.

[정신 차려. 자네는 ‘한’을 모르네. 알 수 없지 않은가? 어서, 행동하게. 우리에게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되네.]

그의 따끔한 말에 정혁은 눈을 강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러곤 계속해서 뒷걸음질 쳐 뒤에 있는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리곤 다리를 꼬아 말했다.

“들어는 봤는데, 그 남자. ‘한’이라 했던가?”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김창수는 곁눈질로 정혁을 보더니 격하게 남자를 내동댕이치듯 바닥에 던졌다. 남자는 철푸덕 하고 지면과 충돌했고 불쾌해하는 그의 시선에 김창수는 그를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를 담아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응수했다.

“나는 다행히 그가 활개 치던 시절의 플레이어는 아니라서 만나 보지는 못했는데.”

안나는 그의 대답에 안도했다. 저 정도면 나쁘지 않다. 목소리, 제스처 모두 뻔뻔하고 훌륭하다. 정혁은 이마를 긁적이며 동시에 맺힌 땀을 조금 닦아 냈다. 놈은 알고 있다. 자신이 당황했다는 것과 이 모든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곧 정혁의 심장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녀석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장에 저 남자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애석하게도 검은 말 조직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성을 찾기로 했다.

“…그래, 뭐, 그런 장단이라면 일단은 맞춰 주기로 할까?”

남자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곤 가만히 정혁을 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황과 당혹이 서린 팀장들의 표정 그 사이에 남자는 안나를 찾아내고 그녀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리곤 안나에게 입모양으로 어떤 단어를 말했다. 안나는 정확히 남자의 입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냈다. 그는 입모양으로 ‘리안’이라고 말했다.

안나는 그 단어를 깨닫는 순간 표정이 굳어 남자를 노려보았으며 남자는 그것 역시 재밌다는 듯 싱글거렸다. 정혁 역시 ‘리안’이라는 단어가 어떤 것인지 알기에 저 얄미운 주둥이에 주먹이라도 한 번 날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할까요.”

박달수가 정혁의 곁에 다가와서 물었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서 죽지 않을 만큼 쥐어 패고 내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요. 어쨌든 이곳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뒤가 구리니까요.”

“…동의합니다.”

박달수는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 남자를 가만히 보다가 어딘가에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곧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무장한 몇몇의 플레이어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들은 무거운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가 그들 사이에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지하 감옥에 수감해야 할 것 같네. 대마법사 양반이 제작한 특수 큐브 감옥에 수감하게나.”

박달수의 명령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하며 남자를 붙들고 일어섰다. 안나가 그에게 다가가 그녀의 마나로 그의 모든 행동을 구속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던데, 그거 다 구란 거 알지? 호랑이 굴에 들어오면 처참하게 찢겨서 먹이가 되는 수밖에 없어. 기대해.”

안나의 살기 어린 협박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빙긋 웃으면서 지하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들이 나가고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정혁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그저 꼰 다리에 두 손을 올려 깍지를 끼고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창수는 절그럭거리며 팔짱을 꼈다.

사실 제일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는 사람은 하늬안이었다.

하늬안은 ‘한’에게 쌓인 한이 많았다.

그녀가 포효의 검사가 된 이유도 어떻게 보면 그의 치열한 괴롭힘 덕분이었다. 다시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의 이름이 정혁에게 대입되자 하늬안은 어쩌면 그녀가 그동안 정혁과 함께하며 느꼈던 특이한 이질감에 대한 해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늬안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낭설에 흔들리지 말게.”

김창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스터의 상태 창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한’의 시대 이후에 생성된 플레이어네.

다들 알다시피 개인은 하나의 계정밖에 만들 수 없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김창수의 말이 회의장을 무겁게 울렸지만 그의 말에 동요하는 마음을 진정시킨 자들은 없어 보였다.

“물론 그의 행보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맞다만 그렇다고 해도 저 남자의 말은 선을 한참 넘은 헛소리일세. 어쩌면 시기적절할 수도 있지. 우리 같은 급속도로 성장한 국가의 내부로 침입해 우리를 와해시키려는 적대 세력들이 노리는 그런 시기 말이야.”

김창수는 모두의 표정을 하나하나 보았다.

모두들 무언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늘 모든 판단은 자네들의 몫이네.

그러나 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헛소리에 휘둘릴 만큼 어처구니없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믿겠네.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지. 어디서도 입에 담지 말게나.”

김창수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마무리하고 정혁에게 예를 갖춘 뒤 회의장을 나갔다.

나머지 팀장들과 박달수도 그에게 인사를 하며 회의장을 나갔고 마지막으로 하늬안은 나가기 전 뒤로 돌아 정혁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정혁은 하늬안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정혁과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하늬안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문 밖으로 나갔다.

정혁은 깊은 호흡을 두어 번 했다.

모두가 나간 텅 빈 회의장에 지저분한 흔적들이 조금 남았다.

그는 언제 떨어트렸는지 모를 마스크 조각을 강하게 쥐었다. 손에 피가 배어 나와 뚝뚝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빨까지 부득부득 갈아 대며 회의장 한곳을 살기 담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정혁은 회의장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한.”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던 정혁이 ‘한’이라고 부르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어느새 자신에게 다가와 있는 김창수가 보였다.

그는 갑옷들을 모두 벗고 편안한 차림으로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그는 양손에 머그컵을 들고 있었는데 김이 나는 컵을 정혁에게 건네주었다. 정혁은 얼떨결에 머그컵을 집어 들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불렀는지 곱씹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자신을 ‘한’이라고 불렀다.

“맞나 보군.”

김창수는 자신의 머그컵을 들어 마셨다.

컵 안에서 짤랑하고 얼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한 모금 마시며 허공을 응시하다가 정혁을 다시 보았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혁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김창수는 그를 ‘한’이라고 이미 결론지은 것 같았다.

“덕분은, 내가 원하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했을 뿐이네.”

김창수는 여전히 정혁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히 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네를 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었네. 모습이 바뀌어도 그 사람에게 나는 ‘사람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지. 물론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다르긴 하다만 묘하게 닮은 부분이 느껴졌었어. 난 자네와 꽤 오래 함께하지 않았나.”

맞다. 김창수와는 ‘한’이었을 때 인연이 깊다. 물론 원치 않는 동행이었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자신과 함께했었고 곁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워 갔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건지는 깊이 묻지 않겠네.”

다시 한번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김창수는 꿀꺽 하는 목 넘김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 정혁을 보았다.

“어쩌면 그 모진 악행들의 벌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 그 벌을 받고 있다면 우리 제논을.”

김창수는 큰 숨을 쉬었다. 정혁은 그도 어느 정도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제논을 더 강하게 이끌어 주게. 나는 ‘한’을 따르는 것이 아니야. 제논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정혁’이라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지.”

김창수는 정혁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려 힘을 실어 살짝 쥐어 주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곤 머그잔을 몇 번 흔들어 다시 한 모금 들이킨 다음에 말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별로였나?”

정혁은 그의 물음에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짜… 별로였지.”

“그런 점은 여전하구만.”

김창수는 몸을 돌려 회의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혁은 무엇인가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걸어가는 김창수를 불러 세웠다.

“총사령관.”

김창수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정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팀장들과 박달수를 불러 주세요.”

김창수는 잠시 정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돌아서 회의장 문을 열고 나가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게 바로 지도자의 모습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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