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4화 (94/200)
  • ◈94화

    정혁이 거침없이 양피지에 어떤 것들을 적어 내리는 동안 안나는 그녀대로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의 눈앞에 정혁이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안나는 그 종이를 받아 들고 정혁이 적어 내린 글들을 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그것을 전부 구겨 버렸다.

    정혁의 기세등등한 표정은 그녀가 종이를 구겨 버리는 순간 일그러졌고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악을 썼다.

    “아니, 기껏 해야 할 것들을 정리했더니 그걸 왜 구겨!?”

    “야, 뭘 적어 놨는지 알아볼 수도 없는데 무슨, 하, 나 참 진짜. 내가 사람들 앞이라 존대해 주는 거지 너 정말, 이런 쪽으로는 그 자리가 어울리지도 않아. 알고 있긴 해?”

    안나는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것 같은 정혁을 보면서 인상을 잔뜩 구겼다.

    정혁은 입맛을 쩝 다시고는 마치 뭔가를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안나를 보았고 안나는 그런 정혁의 의중을 간파하고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알았어. 대장간 좀 열어 줘 봐.”

    정혁이 귀찮다는 표정을 짓자 안나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혹시 모르니까.”

    정혁은 대장간을 활성화했고 둘은 그곳으로 들어가 그들을 반기는 조에게 간단히 인사한 뒤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안나는 자신의 마나를 허공에 섬세하게 펼쳤다.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 마나가 마치 기록이라도 하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외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보자. 타이런 대륙에 발을 디뎌야겠지? 마침 욘마곤에서 전갈이 왔으니 명분도 생겼고, 이 명분 덕분에 타이런 대륙의 랭커들에게 눈총받는 일도 없을 거야."

    공중에 안나가 말하는 것들이 차례대로 정리되었다.

    “더불어 악마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봐야 해. 당장에는 군주급 악마들인 것 같긴 하다만 그들은 결국 궁극적으로 대악마나 혹은 악마왕까지도 우리 오아시스에 끌어들이려는 모양이니 말이야.”

    그녀의 말에 정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나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또 젠트라. 네가 원하는 그거. 할 수 있도록 해 봐야겠지? 마침 욘마곤이니까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고.”

    정혁의 표정이 약간 밝아지면서 손가락을 딱하고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리곤 흡족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우리 내적으로. 사실 이게 메인이지.”

    “내적이라면….”

    정혁이 손가락으로 자신과 안나를 번갈아 가리키더니 눈썹을 두 번 움찔거렸다.

    안나는 정혁의 그런 제스처가 상당히 느끼하다고 생각하며 인정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타이런 대륙에 이미 있는 우리 동료 유르겐과도 연락을 해야겠고.”

    “유르겐!”

    정혁은 좀 재수 없었다고 느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래도 그 덕분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혁의 맞장구에 안나는 왠지 유르겐과 정혁이 서로 쿵짝이 잘 맞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 봤다.

    둘이서 함께 신나게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본 안나는 갑자기 몸에 돋아 오르는 소름에 몸서리쳤다.

    “내가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사람. 마지막 남은 한 사람도 빨리 찾아야 해.”

    “그런 사람이 있어?”

    “내가 말했잖아. 리사이클마다 한 명씩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다섯 번의 리사이클. 그렇다면 다섯 명의 오아시스 칭호를 가진 자가 있어야겠지. 리안 님, 유르겐, 나, 그리고 너. 한 자리가 비었잖아?”

    “그렇긴 하네. 그 사람이 어딨는데?”

    “아니, 찾아야 된다니까?”

    “너도 몰랐던 거야?”

    “나라고 전부 다 알진 않아.”

    안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고 정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리안 님이라면 분명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을 거야. 하지만 리안 님도 긴 세월 그를 만나 보지 못했다고 했어.”

    “왜?”

    “모르겠어. 어쩌다 한 번 물어본 적 있지만 오묘한 표정을 짓고 마셨거든.”

    “…오묘한 표정이라.”

    정혁은 속으로 리안과 그 어떤 사람에 관계에 대해서 추측해 봤다.

    그 사람이 여자였다면 어쩌면 이 둘의 관계는 특별했을지도.

    그는 좀 키득거리다가 안나에게 표정을 들키고는 민망한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그 사람을 찾고 나면 우리는 우리대로 대책을 세워야지.”

    “대책?”

    “그래. 내 생각에는 다음 리사이클이… 시작된 것 같거든.”

    안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리사이클. 정혁은 과연 지금 시작된 리사이클의 흐름을 막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리안 님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리고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의 힘도?”

    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은 가만히 안나가 말한 내용이 정리된 허공의 글자들을 복기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근데 지금까지는 왜 리사이클을 막지 못한 거야?”

    “…아직 그것까지는 이야기할 수 없어. 전에도 말했지만 모든 사실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리안 님뿐이야. 아무리 이곳이라고 해도, 더 깊은 이야기까지 발설했다간 우린 분명히 추적당할 거야.”

    “잊었나 본데, 사실 우리는 이미 검은 말, 그놈들한테 공격당했었어. 알지?”

    “그래, 알지. 하지만 놈들은 여전히 오만해서 이미 다섯 번의 리사이클 동안 아무 힘도 쓰지 못한 우리를 그저 처치 곤란의 귀찮은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어.”

    “그런 취급은 상당히 자존심 상하네.”

    정혁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오히려 그 편이 좋은 거야, 우리한테는. 일단은 이렇게 정리하자. 욘마곤에서 우리는 남은 오아시스. 그 사람을 최대한 빨리 찾자.”

    “동의.”

    정혁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러자 안나가 한 가지 더 있다면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마지막으로 천계를 깨울 방법도 찾아내야 해.”

    “할 것 참, 많다.”

    정혁이 한숨을 깊게 쉬었다.

    안나는 정혁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나가자는 듯이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과 함께 공중에 새겨져 있던 여러 글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안나의 품 안으로 돌아갔다.

    “마계의 모든 악마 군단들이 전부 오아시스로 밀려들어 오면 우리들만으로는 답이 없어. 놈들은 마나뿐 아니라 생명력까지 갈취하는 자들인 데다가 죽은 자들을 자신들의 병력으로 부리기까지 하잖아. 게다가 군주도 엄청나게 강한데 대악마나, 악마왕까지 등장해 봐. 상상도 하기 싫다, 정말.”

    안나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그러나 정혁은 이제 걱정 같은 것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들은 넘쳐나고 이제까지 걸어온 길들을 기억해 보면 전부 어떻게든 타이밍 맞게 해결해 왔다.

    당장에 마계의 일들은 에트론이 가진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에트론 님이 원하시는 부분이기도 했잖아.”

    아차.

    정혁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에트론이 이곳에서 찾고 있는 천사가 있다.

    이걸 타락 천사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알았데?”

    “이미 대화를 나눠 봤지.”

    “하이고, 대단하셔.”

    정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장간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들이 바깥으로 발을 딛는 순간 꽤나 소란스러운 소리가 먼저 귓전을 때렸다.

    정혁은 본능적으로 양손에 그의 두 망치를 소환해 쥐었다.

    그리곤 방어를 위해 품 안에서 미리 제련해 놓은 염구를 펼쳤다.

    회의장에는 잔뜩 성이 나 있는 하늬안과 그녀와 대립하고 있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

    주변의 다른 팀장들을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란해 하고 있었고 남자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서 주머니에 은색 술병을 꺼내 마셨다.

    정장 차림이었던 것 같은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다.

    구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다.

    하늬안이 마침 정혁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야! 야야!”

    오랜만에 하늬안의 반말을 들은 정혁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김창수가 한숨을 쉬며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 어 왜?!”

    정혁이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하늬안이 온갖 표정으로 정혁에게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너 그, 도돈치아! 도돈치아 가기 전에 그, 무슨 숲이야, 그 숲, 숲에서 너 막 기절했잖아, 기절!”

    “아 씨….”

    정혁 역시 민망해져서 망치를 내려놓고 눈가를 비볐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 그 숲에서! 너 기절했을 때! 내, 내가 본 사람! 그 사람이야 저 양반!”

    하늬안이 불타오르는 두 대도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정체불명의 남자를 경계했다. 정혁은 옆에 있는 김창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죠?”

    “…우리도 황당한 참이네. 침입의 흔적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나타났으니 말이야.

    회의장을 정리하려고 들어왔던 청소부들에게 발견되어 저희도 부리나케 달려왔네.

    근데 하늬안이 갑자기 검을 빼 들더니 보이는 대로.”

    비범한 자인 건 알겠다.

    제논 내에 있는 힘 있는 마법사들과 여러 결계사들이 본성 전체에 강력한 방어 마법을 펼쳐 놨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 경계도 확실시하기 위해 각각의 포인트에 이질적인 힘이나 능력을 바로 탐지할 수 있는 비싼 탐지석도 배치해 둔 상태다.

    제논의 허가가 난 자들이 아니라면 반드시 발견될 수밖에 없는 완벽한 구조인데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이곳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남자는 술이 다 떨어진 듯 병을 흔들어 보다가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와 어떤 조각 하나를 꺼냈다.

    그는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 보곤 성나 있는 하늬안을 보며 빙긋 웃더니 그녀의 앞에 던져 주었다.

    정혁은 그 장면이 마치 성난 개한테 먹이를 던져 주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씨앗 같은 것을 꺼내서 입에 물고 까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늬안은 자신의 발밑에 떨어진 조각에 잠시 눈을 내렸다가 한껏 동그래진 눈동자로 정혁에게 소리쳤다.

    “E!! EE!!!”

    “뭐? 숫자 2? 영어?”

    그녀의 외침에 정혁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뭔가 떠오른 듯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조각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자 나머지 팀장들이 움찔했다.

    정혁은 남자를 주시하며 하늬안 앞에 떨어진 조각을 주웠다.

    그리곤 자세히 조각에 새겨진 문자를 보았다.

    그것은 마스크의 한 부분으로 추측되는 것이었고 동시에 정혁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일전에 싸워 봤던 검은 말 조직.

    그들이 쓰고 다니던 마스크와 문양.

    제논을 무너트리기 전 H가 새겨진 마스크를 쓴 자가 입에 닳도록 말했던 E라는 자.

    지금 정혁의 눈앞에 있는 자가 바로 그자.

    “반가워, ‘한’?”

    그 남자가 정혁을 보며 한 말에 장내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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