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3화 (93/200)
  • ◈93화

    남자는 어두운 공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빛이 스며들지 않는 좁고 어두운 복도였지만 얼핏 보이는 남자의 모습으로 보아 그는 정장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헤져 있었다.

    남자는 거칠게 넥타이로 보이는 것을 풀어냈다.

    몸을 벽에 기대 어딘가를 응시했다.

    여전히 호흡은 가빴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어떤 생각에 깊이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J, 괜찮나? 들려?]

    남자가 전음을 보냈지만 상대방 쪽에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전음을 보내지 않고 벽에 기댄 몸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엔 얕은 물이 깔려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도 벗었다.

    허리춤에 찬 장검을 풀어서 자신의 앞에 놓은 다음 칼집에서 칼을 꺼내 본다.

    장검은 이가 잔뜩 상한 채로 반 토막이 나 있었다.

    그는 정장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곤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안에 넣고 씹었다.

    까득 소리가 나고 남자는 입안에서 뭔가를 뱉더니 오물거리며 씹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깨진 마스크를 들어올렸다.

    E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

    결국은 RE-SET이 결정이 났다.

    이 거대한 결정 앞에서 A와 B, C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지만 몇몇의 다른 조직원들은 생각이 달랐다.

    마음속에 어떤 의문이 생긴 것이다.

    A는 이런 의문 자체를 오류라고 규정하고 치료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E는 그 치료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을 지켜 가며 그들을 예의주시하기만 했다.

    RE-SET.

    세계를 초기화시킨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세계는 총 다섯 번 초기화의 과정을 겪었다.

    E가 조직에 합류한 시기는 두 번째 초기화 이후.

    비교적 초반에 합류했기 때문에 E는 E라는 등급을 받을 수 있었고 서열 5위의 자리에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A 이상의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달았다. 시스템 자체가 그를 E 이상의 자리로 올라설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 번째 초기화를 지나 네 번째 초기화를 준비할 때까지 E는 이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납득한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샘솟는 의지와 욕구를 언제까지고 모른 척할 순 없었다.

    E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던 소수의 조직원들이 A에게 붙들려 가 치료를 받았다.

    E는 치료를 받고 풀려나 시스템을 향한 굳건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진 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조직원들을 보면서 치료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E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네 번째 초기화 이후에는 의문의 범위가 커지고 다섯 번째 초기화 후에는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E는 만나고 싶었다.

    조직이 그렇게 찾고자 애쓰던 자들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지닌 자들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오아시스’의 칭호를 지닌 자들은 A와 B, C의 유능한 탐색 능력에도 억겁의 시간 동안 걸려들지 않았다.

    마치 어떤 고등 존재가 그들을 비호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번 다섯 번째 초기화 이후 등장한 남자는 꼬리가 많이 밟혔다.

    그를 통해서 칭호를 지닌 자들을 만나는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을 만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그러나 상황은 예상 밖의 전개로 흘러갔다.

    A는 어느 날 모두를 긴급 소집했다.

    그가 전한 말은 충격적이었는데 첫 번째 초기화가 이루어지고 나타난 첫 번째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자.

    그자의 위치가 파악됐다는 말이었다. 셀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조직은 그자를 쫓았었다.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던 자였는데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면서도 흥분했다.

    조직은 순식간에 활기를 띄었다.

    조직은 철저하게 준비했다.

    무결한 힘을 가진 것 같은 A조차도 말끝에 긴장이 심겨 있었다.

    E는 다른 의미에서 그와의 만남을 준비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자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A는 조직원들을 나눴다.

    B를 필두로 다섯 명의 조직원이 그에게 향했고 이 다섯 명에 E 역시 포함되었다.

    A는 다섯이면 충분할 거라 믿었지만 오산이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지혜의 깊이가 깊을수록 강해지는 마법사가 억겁의 시간을 살게 되면 이렇게나 강력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RE-SET이 승인되면 조직원들의 힘은 작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로 상승된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시스템이 부여해 주는 특별한 효과다.

    이전에 어떤 조직원들이나 그 수하들이 ‘정혁’이라는 마지막 남자에게 섣불리 덤볐다가 큰코다치고 돌아온 일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를 것이리라.

    하지만 ‘오아시스의 마법사’는 월등히 강했다.

    상상 이상이었다.

    혼자였다면 감히 덤벼 보지도 못 했겠지만 다수였기에 다수에 맞는 전략으로 놈과 싸웠다.

    하지만 결국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다행히 마지막 B의 일격이 한껏 지친 놈에게 치명타로 적중했으나 그 공격을 마지막으로 B 역시 소멸했다.

    ‘오아시스의 마법사’는 호흡이 붙어 있는 E를 향해 다가왔다.

    그 역시 한계치에 다다른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E를 없앨 수 있는 힘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마법사’는 E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당신은 다르군요. …달라요.”

    E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춤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곤 나이프의 날카로운 날을 보면서 뭔가를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결심한 듯 자신의 왼쪽 팔뚝을 길게 그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이용해 갈라진 살 속을 헤집다가 검지손가락만 한 긴 스틱을 끄집어냈다.

    마치 뭔가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 빠지지 않았던 그것을 그는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빠져나온 스틱은 몇 번 웅웅거리며 푸른빛을 발하다가 퍼석 하고 부스러지더니 곧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E는 상처 난 팔에 남은 힘을 끄집어내 치유 마법을 입히고 장검집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E는 알고 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이다.

    ‘정혁’이라는 멍청한 녀석이 ‘나 여기 있으니 잡아 가소’를 시전했던 연합 제논으로 가야 한다.

    ***

    긴 회의가 끝나고 여러 팀원들이나 간부들이 피곤해 보이는 정혁에게 간단한 목례를 건넸지만 정혁은 웃으며 인사에 답할 순 없었다.

    머리가 다분히 복잡했다.

    모두가 떠난 뒤 김창수가 정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최근에 본성 근처에서 이질적인 기분이 느껴졌었네. 뭐 특별한 것 없었나?”

    정혁은 이 사람 참, 생긴 거랑 다르게 날카롭다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딱히 별일은 없었습니다.”

    정혁은 안나와 리안에 대한 일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사택은 온전히 정혁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그에게 허락을 구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안나만이 예외적으로 자유롭게 출입하고 있으나 이것도 외부적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업무들 때문인 걸로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

    감히 카탈 대륙의 권위자이자 이제는 강대한 연합이 되어 버린 제논의 지도자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갈 배짱 있는 존재는 적어도 카탈에는 없다.

    그렇기에 리안을 숨겨 놓기에 적당한 장소가 그의 사택이었다.

    “흠, 그런가.”

    김창수는 정혁의 표정을 살피다가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얼추 돼 가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만 문제는 명분일세.”

    “그렇죠.”

    제논이 타이런 대륙에 발을 올리려면 현재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명분이었다.

    아직은 타이런 대륙에서 어떤 빌미도 주지 않고 있다.

    그들 역시 카탈을 집어삼킨 제논의 병력들이 타이런에 유입되어 가뜩이나 치열한 삼파전의 균형이 붕괴되는 불상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랬죠.”

    그때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손에 예쁘게 말린 양피지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정혁에게 건네며 읽어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정혁은 안나와 가만히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가 손에 들린 양피지를 보았다.

    동그랗게 말려 있고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정혁의 기억에 이 인장은 ‘욘마곤’의 것이었다.

    “욘마곤?”

    “대단하신 분이에요. 우리 마스터는.”

    정혁은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양피지를 열었다.

    종이를 열자마자 푸른 기운이 정혁의 전신에 퍼지며 일종의 효과가 적용됐다.

    [욘마곤의 눈물이 ‘정혁’에게 맴돕니다.]

    - 욘마곤에서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녹턴.”

    정혁은 본능적으로 여러 복합적인 기운 속에 녹턴의 마나가 희미하게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라테와의 전투에서 그의 여러 버프 스킬들로 큰 이득을 본 적 있던 그였다.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정혁은 찬찬히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욘마곤이 거의 붕괴되었다네.”

    내용은 상당히 심각했다.

    악마들은 생각보다 현명하게 자신들에게 가장 불편함을 줄 만한 구역들을 먼저 정리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인간들만 득실거리는 다른 두 세력들보다 일차적으로 욘마곤이 제일 먼저 눈에 밟혔을 것이다.

    욘마곤의 다섯 지구들이 모두 파괴되었고 현재는 30% 정도의 잔여 영토 내에서 사력을 다해 욘마곤의 존재들이 악마들과 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명분은 준비가 되었네요?”

    안나가 정혁이 쥐고 있는 종이를 톡톡 건드렸다. 김창수 역시 준비가 되었다는 표정으로 정혁을 바라보았고 정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첫 번째 전초기지는 욘마곤이 되겠군요.”

    김창수는 정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회의장 바깥으로 걸어갔다.

    안나와 둘이 남게 된 정혁이 안나에게 물었다.

    “해야 할 것들이 갑자기 너무 많아진 느낌이라 내가 요즘 머리가 아프거든?”

    “드디어 좀 생각다운 생각을 하고 있나 보네?”

    “가뜩이나 벌어진 일들이 많은데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건 뭐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 같고.”

    정혁이 이마를 긁적이며 회의장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안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리안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그와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의 상황에서 정혁이 샛길로 새지 않고 정직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기도 했다.

    “정리를 좀 해 보자고.”

    정혁은 양피지 뒷면을 펼쳐 펜을 들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