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2화 (92/200)
  • ◈92화

    안나의 눈물을 보며 정혁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도대체 그 ‘리사이클’의 정체가 뭔지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졌다.

    그리 오래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정혁이 알던 안나는 냉정하게 모든 것들을 분석하고 높고 낮음이나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여자였다.

    감성적인 면이라고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처량하게 울 만큼 충격적이라는 건가, 리사이클이라는 것은?

    정혁은 테이블에서 휴지를 뽑아 안나에게 건네주었다.

    안나는 휴지로 눈물을 닦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정혁은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마치 정말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니 세상에서 처음으로 울어본 사람처럼 오래 울었다.

    정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제까지 그가 걸어온 걸음 속에서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겼던 말들이 있었다.

    최근에 소멸한 악마 군주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이전에 녹턴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마스크에 이니셜을 새긴 채 정혁을 노렸던 자들에게 들은 이야기, 더불어 에트론에게 들은 이야기들까지.

    안나가 이야기한 ‘리사이클’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다.

    짐작하건대 안나와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들 즉, 정혁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리사이클’을 막고자 하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리사이클을 경험한 안나의 울음이 이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

    정혁의 모토이자 한의 모토였던 ‘게임을 게임답게’가 무너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아시스의 시스템이야말로 철저한 방관자여야 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시스템이 플레이어의 게임 속 흐름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모순적이긴 하지만 정혁이 이 게임 속에 묶이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시스템이 관여한 꼴이긴 하다.

    그러나 정혁은 그만큼 무리한 도전을 했고 과거가 깨끗하지 못했으며 합당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만약 지금 ‘한’이었다면 정혁은 당장에 로그아웃해서 인터넷을 통해 실질적으로 이런 일들에 대해 어느 선까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 확인해 봤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역시도 몇 번의 리사이클을 경험해 봤을지 모른다.

    그의 기억에 세계가 초기화되는 순간은 없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기억에 대한 시스템의 개입이 있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정혁은 그것이 상당히 기분 나빴다.

    그러다 문득 안나의 울음소리가 잦아졌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안나는 빨개진 눈으로 휴지를 몇 번 접고 있었다. 울고 나니 무안해진 모양이었다.

    “미안, 추태를 부렸네.”

    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로그아웃을 못 해?”

    안나는 정혁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눈물이 대답이 됐다.

    그녀 역시 로그아웃을 못 하는 신세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모두가 로그아웃을 못 하는 굴레에 갇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정혁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로그아웃을 하지 못하는 이 상황과 시스템 속에 갇힌 자신의 자아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여러 시스템 창들을 켜 보며 다시 로그아웃을 활성화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불가능했다.

    오아시스는 캡슐에서 구동되는 게임 시스템이다.

    최신 기술이 탑재된 이 캡슐은 한번 접속하면 신체 전체의 모든 균형과 밸런스를 잡아 주고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인체의 각종 생리 작용을 그대로 캡슐에서 해소할 수 있게 해 주며 동시에 먹는 것과 자는 것도 해결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길게는 몇 달 정도 로그아웃을 안 할 때도 있고 100위 안의 랭커 플레이어들은 몇 년을 로그아웃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한다.

    정혁의 경우에도 ‘한’이었을 땐 단 한 번도 로그아웃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겐 가족도 없었고 학교도 그만둔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그아웃이 자의로 가능한 상태와 어떤 시스템에 의해 막혀서 불가능해진 상태는 받아들이는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현실에 정이 없는 정혁에게는 심리적 타격이 크지 않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겐 어떻게 느껴질지 모른다. 지금 안나와 같은 반응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간다.

    네 번째 리사이클에서 이미 그런 상태였다면 얼마나 오랜 기간 로그아웃을 못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녀에겐 어쩌면 이 시간들이 지옥과 같을 수도 있다.

    정혁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훌쩍거리는 안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안나는 다시 눈물을 닦고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마음을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곤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는 정혁에게 작은 고마움을 느꼈다.

    안나에겐 리안의 모습이 충격 그 자체였다.

    리안은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들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안식처이자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고 삶을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는 늘 자신들보다 월등히 강했고 그 강함으로 시스템과 맞서고 있었다.

    그의 힘이 아니면 앞길을 예측할 수 없다.

    아무리 정혁이 이제까지의 ‘오아시스’ 칭호를 지닌 자들보다 강하다 해도 아직은 리안의 그릇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 리안이 저 정도로 처참하게 당할 수 있다니.

    희망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동안 꾹 참아 왔던 모든 감정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고 정말 오랜만에 마음 편히 울어 볼 수 있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자신을 내려놓고 그저 마음의 모든 것들을 비워 낼 수 있는 진실된 울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마음이 비워지자 비워진 곳에 다시 의지가 차기 시작했다.

    “안나. 너는 늘 만약의 만약을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해. ‘그’는 우리를 각각의 역할에 맞게끔 설계했으니까, ‘그’의 뜻대로 모든 것들이 원활히 진행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해.”

    리안이 자신에게 항상 강조하던 부분이었다.

    ‘만약의 만약을 생각하는 연습’.

    이 만약이라는 가정에 리안이 무너지는 장면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자신마저 무너질 수는 없다.

    더구나 아직 리안이 죽은 것도 아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정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나는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나 물었다.

    “차 한잔 가능해?”

    “그래.”

    정혁은 응접실 한쪽에 마련된 카모마일 차를 금방 끓여 내 안나에게 건네주었다.

    안나는 부드러운 향을 느끼며 뜨거운 차 한 모금을 넘겼다.

    생각과 마음이 모두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어디까지 유추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야기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야.”

    정혁은 안나의 말에 약간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리사이클이라는 단어부터가 충격적이었는데 이게 빙산의 일각이라고? 더 깊은 곳에 더 큰 음모가 있다는 말일까?’

    “아까도 말했지만 리안 님께 세계의 모든 진실을 들었을 때는 믿지 못했어. 나도 너처럼 이곳에 강제로 소환되었고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만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시스템의 제약에 속박된 처지였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리안 님께 매달렸던 거야. 믿은 척한 거지.”

    안나는 차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앉아 있었던 데다가 한참을 울어서인지 그녀는 약간 휘청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올곧게 서서 정혁을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다섯 번째 리사이클을 경험하고 나니 알겠더라고. 내가 알던 세계와 실제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야. 그것이 게임 속이 되었든….”

    안나는 정혁을 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 김이 올라오는 차를 보며 말을 이었다.

    “현실이 되었든.”

    “현실…?”

    “아까도 말했지만 더 깊이 말해 주기는 어려워. 기억해? 우리를 쫓는 자들. 마스크를 쓴 암살자, 검은 말의 조직.”

    “그래. 당연히 기억하지.”

    정혁은 그 징글징글한 놈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조용하다.

    놈들이라면 정혁이 제논을 통해 카탈을 집어삼키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정혁이 세 번째 에고 장비를 손에 넣고 이렇게나 강해질 동안 제논 본성에서 만난 일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자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어. 그러나 그들은 너나 나보다는 더 구미가 당기는 목표를 발견했던 모양이야.”

    “…리안?”

    “그래.”

    리안이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했다.

    라테는 그 남자가 ‘한’보다도 강할 거라고 했다.

    ‘한’으로 플레이할 때는 단 한 번도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강자를 만나 보지 못했다.

    늘 누군가를 추적하고 암살하는 것이 업이었던 ‘한’일 때도 조금의 흔적조차 알 수 없었던 자였다.

    정혁의 입장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던 자가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자였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 힘을 가진 리안이라면 검은 말 조직의 입장에서는 정혁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목표였을 것이다.

    그들은 리안의 꼬리를 잡았고 리안을 저 지경에 이를 때까지 공격한 것이다.

    리안은 어떻게든 그곳에서 벗어나 겨우 정혁이 있는 이곳까지 도망쳤겠지.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어쩌면 제일 강하다고 볼 수도 있는 그 남자를 그렇게 만든 놈들이라는 거 아냐. 이거 승산이 있긴 한 거야?”

    정혁의 물음에 안나는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사실 자신도 명확히 답을 내려 줄 수 없었다.

    아직 한 명의 강자가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사람과는 안나 조차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정혁이라는 사람이 계획대로 다섯 에고 장비를 전부 갖추게만 된다면.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그래도 조금은 있어.”

    “어떻게?”

    “네가 있잖아. 아직 리안 님도 죽으신 건 아냐. 엘라가 최선을 다해 회복시킬 테니까 믿어도 좋아. 네가 목표하고 있는 것만 잘 이뤄 낸다면 우리는 여섯 번째 리사이클을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정혁은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답변을 원했다.

    이쪽 일은 이쪽 일이고 제논의 일도 배제 할 수는 없다.

    세계는 이미 악마의 침공으로 공포 속에 있으며 타이런 대륙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도 미지수다.

    카탈 대륙의 전 영역은 제논 연합의 체제 속에 순응되어 가고 있으며 박달수의 치안대가 전 대륙의 곳곳에 뿌려져 각각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훌륭한 왕을 둔 은행나무 엘프 왕국도 있다.

    이미 악마 군주가 소멸한 땅이기에 다른 놈들도 쉽게 접근하려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정혁은 악마들의 암흑 마법에 완전 면역이기에 그들에게는 완벽히 반대되는 상성이자 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강력한 카드를 가진 정혁이라면 타이런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기에 충분하다.

    또한 젠트라를 만고 싶거든 결국 타이런으로 가야만 한다.

    “물론 타이런으로 가야지. 제논의 전초기지를 어디에 세울지 다른 팀장들과 논의 중이야. 그곳에서의 악마 침공에 대한 여러 정보들도 취합 중이고. 다만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리안 님이 저 정도로 당했다면 너도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

    “그래서?”

    “너 역시 훌륭한 창과 방패이지만 우리에겐 만약을 대비한 다른 카드가 필요해. 마계가 움직였다면 공평하게 천계도 움직여 줘야 하지 않겠어?”

    정혁은 안나의 얼굴에 잔잔히 퍼지는 미소를 바라보며 이제 그녀가 마음을 좀 회복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참 마음에 드는 대답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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