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1화 (91/200)
  • ◈91화

    정혁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엘라의 등장에 놀라고 차원 문의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눈앞에서 쓰러진 남자의 모습에 또 놀랐다.

    엘라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심각한 얼굴로 쓰러진 남자를 끌어안았다.

    늘 작은 인간형 정령의 모습으로 부유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정혁만큼 커졌다.

    그리고 쓰러진 남자를 지지하고 초점을 잃은 남자의 얼굴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어서 정혁은 상당히 당황한 모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당황한 모습은 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나는 재빨리 남자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엘라가 자연의 마나를 남자에게 주입해 보았지만 큰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정혁의 팔찌는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기분 탓인 건지 그 빛이 점점 힘을 잃어 가는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야! 거들어!”

    엘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정혁은 그녀의 고함에 깜짝 놀라서 몸을 숙여 남자를 지탱했다.

    엘라와 정혁이 쓰러진 남자를 어깨동무해 일단 소파로 옮겼다. 남자는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정혁은 남자의 눈을 가려 주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상황인 건데, 설명 좀 누가 해 줄 수 없나?”

    안나도 엘라도 그의 말에 대꾸해 주지 않았다.

    엘라는 안절부절 못하며 누운 남자의 곁을 왔다갔다 거렸고 안나 역시 그녀답지 않게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리안이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야?”

    엘라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혁이야 아는게 없으니 대답을 해주지 못했고 안나는 뭘 좀 아는 눈치였지만 말을 가리는 것 같았다.

    엘라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살기를 펼쳤다.

    정혁은 답답해지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서 엘라에게 손을 얹어 그녀를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오히려 정혁의 손이 엘라의 기운에 튕겨 밀려났다.

    엘라는 살기 어린 눈으로 안나를 노려보았다.

    “너, 좋게 봤는데. 뭘 숨기고 있구나.”

    안나는 순간 조여 오는 숨통에 놀라 양손으로 목을 감쌌다.

    그러나 그걸로는 역부족이었다.

    “엘라!”

    정혁이 당황해서 엘라를 막아 보려고 그녀를 불렀지만 엘라는 반응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분노를 안나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안되겠다고 판단한 정혁이 그녀를 스태프로 무기화하려고 시도했다.

    자신에게 정혁의 마나가 닿는 것을 느끼자 엘라가 허공에서 나무뿌리를 만들어 내 정혁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것을 막는다고 막았지만 그럼에도 정혁은 한참을 뒤로 밀려났다.

    “진정하게, 엘라.”

    화목 난로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라테가 불 속에서 나와 엘라에게 무겁게 한마디 던졌다.

    엘라는 끼어들지 말라는 듯이 라테를 노려보았지만 라테는 그녀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하고 순식간에 엘라의 뒤로 다가가 강력한 화기로 그녀의 전신을 덮었다.

    온몸의 세포마저도 전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열기를 한꺼번에 맞은 엘라가 잠시 정신을 잃는 순간 안나를 옥죄던 마법이 풀렸고 안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테는 열기를 거두었다. 그

    러자 엘라 역시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테는 뒷짐을 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정혁을 향해 다가왔다.

    “괜찮은가?”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정신이 없었던 정혁은 라테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테는 정혁에게 손을 건넸고 정혁은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서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린 다음 정신을 차린 엘라를 주시했다.

    엘라는 고개를 돌려 라테를 노려보았다.

    라테는 가만히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고 엘라는 이빨을 까득거리며 불편한 기분을 한껏 드러낸 뒤 자신의 양손을 소파 위의 남자의 복부 위로 올려놓고 그의 회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안나라고 했던가? 괜찮소?”

    “…예, 더, 덕분에.”

    안나는 여전히 목을 감싸 쥐고 있으면서도 엘라와 남자를 살폈다.

    라테는 조용히 정혁에게 말했다.

    “안나와 자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 보는게 좋을 것 같군.”

    “그래야지.”

    “저 남자는 나도 아는 자야. 내 기억으로 자네보다 월등히 강한 자일세.”

    “지금의 나보다?”

    “아니, 지금의 자네뿐만 아니라 예전에 자네보다도 더.”

    정혁은 라테의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 양반이 저런 꼴이 됐다고?’

    “그 말에 신빙성이 전혀 가지 않는데, 저런 꼴로는?”

    “그래서 나 역시 놀라울 뿐이네. 안나가 뭘 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대화를 나눠 보게나.”

    정혁은 안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에트론이 안나의 곁을 빙글빙글 돌다가 정혁이 다가오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안나는 정혁이 다가옴을 느끼고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이렇게 만나긴 했지만 이야기를 들을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따로 이야기를 좀 할까?”

    “…하….”

    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과 안나는 사택 내의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가에 옅은 햇볕이 들어오는 따뜻한 분위기의 방이었지만 정혁과 안나의 분위기는 따뜻하지 못했다.

    안나는 극도로 불안해 했고 정혁은 그런 안나의 모습이 불편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고 싶었지만 안나는 방 안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한참을 말없이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안나의 호흡이 진정됐다고 느낀 정혁이 입을 열었다.

    “말을 해 줘야 다음을 생각하지. 네 혼란스러움이 무엇으로부터인지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아냐.”

    안나는 차가운 눈으로 정혁을 응시했다.

    정혁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말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안 님을 만나서 들어야 한다고 한 이유가 있었어.”

    “그래, 저 남자의 이름은 리안이고, 또.”

    “나는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었기 때문이야. 게다가 우리는 어디서든 감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완벽히 세계에서 차단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건 리안 님뿐이라.”

    “자격은 또 뭔 소리야, 나참.”

    정혁은 인상을 구겼다가 뭔가 번뜩 생각난 듯이 마나를 펼쳐 대장간으로 향하는 이공간 포탈을 열었다.

    다른 플레이어를 이곳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하다.

    하지만 그녀는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정혁은 포탈 속으로 안나의 손을 붙잡고 걸어 들어갔다.

    “왔는가!”

    조가 환히 웃으면서 정혁을 반겼다가 그와 함께 들어온 낯선 여자의 모습에 놀라서 말을 덧붙였다.

    “남녀가 함께 있기엔 여긴 너무 누추하지 않은가?”

    타이밍이 좋지 않은 조의 농담에 정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저었고 조는 당황한 얼굴로 몸을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있던 각종 무기 진열장을 손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정혁은 그녀를 데리고 이제는 꽤 넓어진 대장간의 한쪽에 마련된 응접실로 향했다.

    화로의 불길도 깡깡거리는 소음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공간이었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안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정혁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정혁이 이런 포탈 속에서 무기나 방어구를 공급해 올 때면 그저 놀라기만 했지 내부가 이 정도로 크고 잘 정리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구나 죽었다고 알려진 조 패더럴이 버젓이 여기서 일하고 있는지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가 단시간에 대장 기술 숙련도를 어떻게 빨리 올릴 수 있었는지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안나는 응접실에 마련된 고급진 제작 의자에 앉았다.

    착좌감이 제논에 있는 어느 의자보다도 좋았다.

    그곳에 앉자마자 머리를 어지럽히는 많은 생각들이 전부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정혁은 안나의 동문서답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 이 정도면 네가 염려하는 부분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겠냐고.”

    그의 말에 안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그리곤 자신의 앞에 앉은 정혁을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자세히는 이야기 못 해. 리안 님이 저 정도 몰골이 되어서 나타났다는 건 정말 비상사태라는 말이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되겠다는 판단이 서서 그런 거니까 양해바래.”

    “…그래. 나도 더 보채진 않을 테니 적당히만 이야기해 줘.”

    안나는 호흡을 천천히 고르고 통증이 남아 있는 목을 한 번 주무르고는 말했다.

    “리안 님은 ‘오아시스의 마법사’셔.”

    “‘오아시스’라는 칭호가 붙는다는 건 짐작했지만 ‘마법사’?”

    “그래, 마법사.”

    하긴 잠깐이었지만 그는 로브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긴 했다.

    “…그리고 리안 님이 최초의 ‘오아시스’ 칭호를 받으신 분이야.”

    “최초…?”

    이제부터가 흥미로웠다.

    정혁은 안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오아시스의 칭호를 가진 사람은 총 다섯. 그중 네가 제일 마지막이야. 그리고 제일 특이한 케이스지.”

    그렇게 시작된 안나의 이야기는 이랬다.

    오아시스의 시스템은 모든 플레이어가 알지 못하게 이제까지 총 다섯 번의 ‘리사이클’ 과정을 거쳤다.

    한 번의 리사이클마다 세계에는 한 명의 ‘오아시스’ 칭호를 지닌 플레이어가 생겼고 현재 다섯 번째 리사이클,

    안나의 비유로 버전 파이브에 선택된 ‘오아시스’ 칭호 부여자가 바로 정혁이라고 말했다.

    그중 리안이라는 남자는 첫 번째 리사이클에 ‘오아시스’ 칭호를 받은 플레이어였다.

    이 ‘오아시스’ 칭호를 받은 자는 다음번 리사이클에서 진행되는 모든 패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리사이클이 진행되면 플레이어들은 일종의 정지 기간을 부여받게 되는데 플레이어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 리사이클이 진행되며 이후에 새로운 필드와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플레이를 진행해도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들은 이런 경우에도 리사이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무엇 때문에 진행되는지를 격리된 공간에서 경험하고, 플레이어들에게 불필요한 기억들을 삭제하는 과정에서도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들을 보존하며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혁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겨 안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지만 안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이 리사이클 과정이 왜 필요했는지, 그리고 리사이클을 왜 플레이어들이 알아차리지 못했고, 왜 기억을 지웠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

    안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세계가 굉장히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아니, 뭘 알아야 네가 하는 말이 납득이 될 거 아냐. 하, 참 답답하네…. 그러면 너도 리사이클을 겪었어?”

    “…겪었지.”

    안나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씁쓸함이 묻어났다.

    “우리가 위험하기에 말을 아끼는 이유도 있지만 나 역시도 너처럼 리안 님에게 세계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전혀 믿어지지 않았어. 같이 생고생을 하며 다섯 번째 리사이클을 막아 보려 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고 나는 다섯 번째 리사이클을 경험 당해야 했지. 그때….”

    안나는 말끝을 흐렸다. 두 눈 가득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더니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정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때의 장면들을 잊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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