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90화 (90/200)
  • ◈90화

    회복계 마법사들이 정혁에게 달라붙어 일제히 기력을 회복시키는 마법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신체는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병력들 중에 고위급 회복계 마법사가 급히 찾아와 장기 회복 지속 마법을 걸어 주고서야 다른 팀장들이 정혁의 상태에 대해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것이지만 정혁은 왠지 몰라도 회복 마법이 쉽게 극대화되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회복계 마법사의 마법과 더불어 엘라의 회복 마법까지 덤으로 입은 정혁이 기력을 조금씩 회복하는 사이 각 팀장들은 잔여 병력들의 인원과 장비 점검을 진행했다.

    멀리서 전황을 지켜보던 안나도 정혁의 곁으로 돌아왔고 은행나무 엘프 국왕 아린과 그의 근위병력 역시 정혁의 곁으로 왔다.

    어느새 전장 한가운데에는 핵심 전력들이 모인 회의장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웃음과 안도가 넘쳤다.

    다행히 팀장들 중 누구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정혁이 한 번 휩쓸어 준 덕분에 힘 뺄 일을 덜었던 제논의 병력들도 손실이 적은 수준이었다.

    은행나무 엘프 병력 역시 거의 그대로의 병력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에트론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고 나머지 팀장들도 티 나지 않는 수준에서 에트론을 흘깃 보았다.

    에트론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 더욱 밝은 빛 속에 스스로를 파묻어 버렸다.

    정혁은 에트론을 다시 마법구로 변화시켜서 품에 넣었다.

    아직은, 정혁도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은 막아야 했다.

    정혁은 천천히 숨을 들이 쉬고 내쉬었다.

    불쾌한 악마들의 비린내는 많이 옅어져 있었다.

    은행나무 엘프들이 다가온 덕분에 약간의 은행 냄새가 맴돌았지만 악마들의 냄새보다야 나았다.

    정혁은 드웨이크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아서 몸을 기대고 김창수와 대화하는 안나를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온 아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해내셨군요.”

    “덕분에.”

    둘은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이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은 잠시 뒤 근위병들의 표정을 살피고서 정혁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이제 저희 병력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무래도,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조금 껄끄러운지라.”

    “편할 대로 하시지요. 아, 아린 한 가지만.”

    “말씀하세요.”

    “가능하면 우리 제논의 참모진을 왕궁에 장기 파견을 보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아린은 정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 하더니 말했다.

    “동맹이 불안하셔서 그런가요?”

    “아니, 그렇다기보단 너 혼자서는 은행나무 엘프들의 인식을 바꾸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네 왕권 강화를 위한 도움을 주고 싶기도 하고.”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정혁은 그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알겠다는 시늉을 했다.

    아린은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그래도 박달수 님이 저희를 얼마나 잘 도와 왔는지 많은 은행나무 엘프들과 저희 왕궁의 여러 간부들이 봐 왔기 때문에 제논의 병력들이 파견 나오는 것에 대한 큰 반대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불편하진 않겠어?”

    “불편하긴요. 오히려 저희도 붙잡아 놓을 인질이 있는 편이 났지 않겠어요?”

    정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치적으로 참 민감한 농담을 해 대는 아린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곤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아린은 싱긋 웃더니 정혁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다시 꼿꼿이 세우고는 말했다.

    “그 일들은 추후에 정혁 님과 제논이 안정적으로 카탈 전체에 기틀을 세워 갈 때 다시 명확히 정해 보도록 해요. 저는 찬성입니다. …그리고 다들.”

    아린이 ‘다들’이라고 조금 크게 말하자 주변의 병력들이 일제히 침묵한 채 아린을 바라보았다.

    은행나무 엘프들은 제논의 예를 갖춘 대우에 흡족하다는 듯 가슴을 당당히 펴며 자신들의 젊은 왕을 늠름하게 지켜보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의 전쟁은 우리 은행나무 엘프의 역사에 소중한 동맹의 시작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아린의 맺음말과 함께 제논의 병력 모두가 자신의 가슴을 한 번 치며 아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린은 마찬가지로 가슴을 치고 고개를 숙이며 제논의 병력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곤 하늬안에게 다가가 그녀와 따뜻한 악수를 나누고 근위병들과 함께 그들의 병력들에게로 돌아갔다.

    정혁은 아린의 뒷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김창수는 나머지 팀장들에게 전황 보고를 받았다.

    벌써 보수 팀의 몇몇 발 빠른 팀원들이 무너진 아크 제국의 도시들과 본성에 투입되어 확인 중이라고 전해 왔다.

    전해진 바로 아직 게릴라성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 악마 군대들이 북쪽 곳곳에 남아 있다고 했는데 수비대와 치안대가 동시에 맡아 주기로 했다.

    군주가 사라진 이상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안나는 이 모든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전달받고 효율적으로 분담했다.

    그 사이 움직일 정도로 회복된 정혁은 차원 문 마법사들이 열어 준 제논 본성으로 향하는 차원 문 포탈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다가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그러자 그의 까마귀가 날아와 먼저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까마귀가 포탈로 사라지고 나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 김창수에게 부탁한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한 뒤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

    제논의 본성에서 정혁은 2주의 시간을 보냈다.

    신체를 회복하고 대장간을 보수하고 에트론과 대화하며 천계와 마계에 대해서 알아 가는 시간이었다.

    정혁은 안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팀장들이나 사령관과의 만남을 꺼렸다.

    각별히 정혁과 친분이 있었던 드웨이크는 이를 심히 아쉬워했고 하늬안은 상당히 재수 없어 했다.

    엘라는 2주 내내 대장간과 정혁의 사택 마당에 심긴 은행나무를 돌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라테는 사택 내의 화목 난로의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냈다.

    그 사이 정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장 기술 숙련도를 놓치지 않고 올려 댔고 드웨이크의 레이드 팀이 구해 오는 각종 광물과 고급 재료들을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하며 조 패더럴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가 만든 장비들은 이번 전쟁에 큰 공을 세운 각 팀의 플레이어들에게 돌아갔고 망가진 장비들과 방어구들을 수리하는 데도 많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사실 정혁은 대장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이는 안나 때문이 컸다.

    안나는 그가 대장간에서 사택으로 나올 때마다 자기의 키만 한 서류 더미를 책상 위에 빼곡히 세워 놓고 결재를 기다렸다.

    대륙 전체를 제논의 관할 지역으로 세우다 보니 소요 거리가 차고 넘쳤다.

    당장 제논의 본성 이주 건부터 시작해서 카탈 전체에 큰 도시 8개에 대한 보호 관찰 치안에 관련된 부분, 더불어 중립 지구에서 제논의 영역으로 완전히 흡수된 몇몇 지구에 대한 여론 정리와 관련 보수 사항 등등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혁은 대장간까지 전해지는 살벌한 살기를 느낄 때만 죽지 않기 위해 대장간을 나왔다.

    안나는 여지없이 책상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그때마다 정혁은 울상으로 책상에 앉았다.

    “아니, 어차피 그쪽이 다 확인했을 거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에헤이. 시끄럽고 서명이나 하세요.”

    정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몇 시간이고 서명을 계속했다.

    여느 때처럼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어느 날 안나가 인상을 구기며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정혁을 불러 화목 난로가 있는 거실 쪽으로 데려다 앉혔다.

    테이블에는 유자차가 김을 내며 담겨 있었다.

    안나는 정혁의 곁에서 퐁퐁거리며 돌아다니는 에트론을 보다가 말을 꺼냈다.

    “최근에 정황 보고가 올라왔어.”

    “정황 보고?”

    “반대쪽 대륙 말이야.”

    “타이런?”

    안나는 작게 마나를 펼쳐 오아시스의 거대 지도를 펼쳤다.

    카탈의 세배 크기의 거대한 대륙 타이런 그리고 중앙해 그것을 지나 대륙 카탈.

    최근까지 타이런에서는 세 집단으로 나뉘어 영토 분쟁이 한참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몇몇 작은 왕국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각각 거대 세력들과 연합의 관계 속에서 공생을 하고 있었으니 결국은 세 집단이 힘 싸움을 하는 장이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첫 번째는 왕국 에도라.

    현재 랭킹 1위부터 5위까지를 보유한 왕국으로 제일 강하고 제일 영토가 넓다.

    이 영토 내부에 나이트 엘프와 하이 엘프의 왕국이 포함되며 호전적인 오크 부족들과 평화를 추구하는 야수 부족들이 영토 내에 뒤섞여 있다.

    두 번째는 강철의 제국 안도리니인데, 이들은 현실 세계와 비슷한 도시를 건축했고 현실 세계의 무기와 같은 무기들을 생산했다.

    게임이지만 마치 현실과 같은 공간들을 구현했으며 마법보다는 총과 폭탄 같은 것을 제조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랭킹 7위와 9위가 이곳에 있다.

    마지막은 풍요의 땅 욘마곤.

    안도리니와 에도라가 건들지 않는 땅인 욘마곤에는 왕국이나 제국의 개념이 없다.

    욘마곤에는 오직 중립 지구만이 5개 존재하며 각각의 치안대가 유지되고 있다.

    물과 바람의 정령왕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이 있고 욘마곤은 아직 용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고도 전해진다.

    욘마곤 어딘가엔 랭킹 6위와 8위가 있다고 한다.

    더불어 욘마곤의 땅에는 정령들이 넘치고 자연의 종족들이 서로 도와 가며 살아간다.

    위기의 때마다 그들은 함께 뭉쳐 욘마곤을 지켜 낸다.

    “…최근까진 그랬지만 마계의 대침공이 있고 나서는 각축의 양상이 많이 바뀌었어.”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어때?”

    “밝고 아름다웠던 욘마곤의 땅은 상당수 타락에 잠식되었고 위기를 느낀 안도리니는 에도라와 휴전 협정을 맺은 채 서로 불가침을 공공연한 원칙으로 지키고 있다고 해. 욘마곤에서 도망친 난민들이 안도리니와 에도라에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고 있고. 우리 쪽에서 카탈로 들어올 수 있는 차원 문의 모든 연결 통로를 막아 놨기 때문에 아직 타이런 대륙의 난민들이 유입되고 있진 않지만 심심찮게 중앙해를 건너오는 난민들도 있다고 보고가 들어오고 있어.”

    “갈 때가 됐네.”

    “타이런에?”

    “그래.”

    정혁은 차를 들어 은은한 향을 느낀 다음 한 모금 넘겼다.

    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은 일러.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이런 상황뿐만이 아니야.”

    “……?”

    정혁이 의문 섞인 표정으로 안나를 보았다.

    “우리에게 ‘오아시스’라는 특별한 칭호가 있는 이유, 너를 죽이려는 이상한 집단의 출현, 갑작스런 마계 악마들의 금제 해제, 그리고 네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사기 캐릭터가 된 사연들까지.”

    분명 정혁이 궁금했던 부분이다.

    최근의 몇몇 대형 전투들을 통해서 정혁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이상한 뉘앙스의 말들이 있었다.

    마치 그가 굉장히 중요한 존재 마냥 표현한 이들도 있었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착잡하게 다음의 걸음을 예고하던 자들도 있었다.

    안나는 정혁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전부 알고 있을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절대로 그녀의 입으로 정혁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않았었다.

    정혁은 그녀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아니, 알려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또 말해?”

    그 순간 정혁의 팔찌가 주황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정혁은 갑작스레 빛나는 자신의 팔찌와 그 색을 보고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안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상황이 급박해졌으니 우리도 조금 빠르게 움직이기로 했어.”

    동시에 안나의 곁에서 동그란 차원 문이 형성되고 차원 문 안에서 어떤 남자가 등장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마나가 정혁의 팔찌와 공명했다.

    안나가 예고한 주황빛 마나를 지닌 남자였다.

    그러나 예상 밖의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리안!”

    사택의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며 엘라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거실로 뛰어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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