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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89화 (89/200)
  • ◈89화

    엔트의 형상이었던 엘라가 정혁의 지원 요청 전음을 듣고 첨탑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 혼자서 처리한 고위 악마들만 열 명이 넘었다.

    군주급 악마들만 아니라면 어렵지 않게 놈들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자연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흡수해야 하는 특성상 이렇게 타락해 버린 대지에서는 장기간 현재의 상태로 버티는 것은 신체에 무리를 주는 일이었다.

    어제의 전투로 쌓인 피로도도 정상적이었다면 이미 숲의 기운으로 회복했겠지만 주변의 환경상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엘라도 지금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정혁의 도움요청 에는 반응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정혁이 저 징글징글한 놈과 싸워 이겨야지만 전세가 마무리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엘라는 기합을 넣고서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지상에 있던 여러 병력들이 즉각적으로 산개했다가 다시 밀집하며 전투를 계속했다.

    [공간에 제약을 줘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정혁의 물음에 엘라는 즉각 자신의 은행잎을 전부 정혁이 전투를 벌이는 공간으로 날려 보냈다.

    은행잎은 파도처럼 날아가 정혁과 데카 주위를 둥글게 회전했다.

    엘라는 정신을 집중해 은행잎 하나하나에 데카가 불쾌해 할 만한 자연의 마나를 가득히 주입했다.

    만약 외부로 빠져나가려 한다면 겹겹이 둘려서 회전하고 있는 은행잎에 부딪칠 테고 큰 데미지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의 충격과 거북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은행잎의 엄청난 회전력과 함께 공간이 완벽히 분리되었다.

    엘라는 외부에서 다른 악마들 역시 그 공간으로 침입할 수 없게 경계를 자처하며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데카와 정혁은 다시 격돌 중이었다.

    에트론이 말한 그 ‘종’을 무기고에서 소환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때까진 두 망치와 몇 개 남지 않은 염구, 라테의 화염과 스스로의 피지컬로만 상대해야 했다.

    데카는 이 또한 즐겁다는 듯이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온전히 정혁에게 집중했다.

    번개가 지면을 때리고 화염이 폭발한다.

    정혁은 그때그때 망치와 주먹을 번갈아가면서 데카의 공격을 방어하고 또 역습했다.

    데카는 이미 넝마가 된 몸을 천천히 회복시키면서 정혁의 공격 앞에 광기로 화답했다.

    천계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보니 상처들의 회복 속도에 탄력이 붙는 모양이었다.

    그는 쾌감에 젖어서 비명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날이 선 손톱에 암흑 마법이 끊임없이 주입되었고 정혁은 그것에 데미지를 입지는 않았지만 피부가 찢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에트론…?!]

    정혁이 슬슬 한계에 다다름을 느끼면서 에트론을 찾았다.

    행여 시선을 올려 보았다간 에트론의 소환에 데카가 개입할까 봐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라테의 말대로 폭력의 군주답게 폭력에 의한 환희가 가중될수록 데카의 신체 능력과 공격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 같았다.

    “내가!”

    데카가 고함을 내질렀다.

    “정말 기인 세월을 살아가면서!”

    맹렬한 기세의 공격이 쏟아진다.

    “이렇게 한 녀석에게 집중한 적은 햐하!”

    데카의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하다.

    “정말 처음이야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엄청난 암흑 마법이 폭발했다.

    정혁은 검붉은 폭발을 자신의 화염 보호막으로 막아 냈지만 폭발력에 의해 한참을 뒤로 밀려났다.

    회전하는 은행잎에 닿을 뻔한 그는 정신을 부여잡고 데카를 바라보았다.

    “하핫! 야, 인간! 이야, 너 진짜. 장난 아니구나?”

    데카의 전신이 암흑 마나로 뒤덮이고 양쪽 눈이 완전히 검게 변했다.

    공중으로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폭발적인 마나의 힘은 이전과 다른 강도로 정혁의 전신을 위협했다.

    그의 전력 망치처럼 번개의 형상으로 암흑 마나가 데카의 온몸을 휘감고 파지직거리는 소리를 위협적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내가 마계에 갇혀 있을 때 말이야.”

    데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 땅에 웬 암살자라는 놈이 날 뛰는 걸 봤었거든?”

    [주의하게. 자네 덕분에 놈이 자신의 완전한 힘을 발휘하게 된 것 같네.]

    정혁은 침을 한 번 삼켰다.

    “‘한’이라나 뭐라나. 그 놈 참 악마같이 잘 싸우더라구. 비열하고 잔혹하며 자비 없이 도륙 내며.”

    데카가 흥분하여 양손을 넓게 펼쳐 부들부들 거렸다.

    그의 표정은 마치 그때의 ‘한’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아주,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될 자질을 가진 녀석. 아니,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도구가 되었던 녀석.”

    데카의 말에 정혁의 눈썹이 움찔 거렸다.

    도구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힘이지, 녀석이 가진 힘은. 10만 명을 홀로 찢어 버렸던 그날에, 나는 그것이, 그날에 깨달아 버렸어. 그날에.”

    데카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살기가 잔뜩 서렸다.

    “녀석은 자신의 힘만으로 세상에 홀로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하핫, 아하하하핫!”

    정신이 나간 것 같이 데카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정색하며 차가워진 얼굴로 정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일까.”

    데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왜 너에게도, 그런 냄새가, 날까.”

    정혁은 양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때 에트론이 전음으로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마나를!]

    정혁이 에트론에게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자 에트론이 상공에서 엄청난 빛을 발산했다.

    데카가 그 힘을 눈치채고 움직이기도 전, 그 짧은 순간에 허공에 어떤 거대한 문이 열리더니 문 속에서 엔트가 된 엘라의 덩치만 한 종이 떨어져 내렸다.

    종은 데카의 위에 충격음과 함께 떨어졌고 데카는 종 안에 갇힌 신세가 되어 버렸다.

    [종에 계속해서 마나를 주입해야 해요! 일종의 결계가 되어야만 합니다!]

    정혁은 에트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을 집중했다.

    데카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 지옥에서나 들어 볼 것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여명의 종]

    - 무기고 빅토리아 중앙의 종으로 천계의 무기를 만든 대장장이의 마지막 작품.

    - ???

    - ???

    - 유지 시간 03:00

    정혁은 여명의 종에 마나를 집중시키면서 알 수 없는 표시로 설명을 읽을 수 없는 종의 상태에 의문을 잠시 가졌다.

    그러나 발악하는 데카의 움직임을 느끼고서 고개를 저은 뒤 다시 종에 집중했다.

    [이 다음은 어떻게 해?]

    [예?!]

    [이 다음은!?]

    [모… 모르죠!?]

    정혁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에트론을 보다 종으로 시선을 돌렸다.

    종은 내부에서 오는 충격에 들썩거렸다.

    혹시나 땅을 파고 튀어나올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아마도 종의 영역 안에서는 어떤 행위도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정혁은 고민하다가 뭔가 번뜩 생각난 것처럼 종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두 망치로 있는 힘껏 종을 내려쳤다.

    데엥-

    종소리가 울리고 그와 함께 데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연달아 정혁이 두 망치로 종을 난타했고 데카의 끔찍한 비명 소리와 종의 고철 소리가 괴이한 하모니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공격으로 데카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뭔가 더 큰, 울림을 발휘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정혁은 에트론에게 물었다.

    [망치! 망치 아무거나 겁나 큰 걸로!]

    [겁나 큰 거?!]

    [그래, 인마!]

    [아, 아예!]

    에트론이 또 한 번 무기고를 열었다.

    [이, 이번이 한계에요! 더 열 순 없습니다!]

    [알았어!]

    정혁은 지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열린 문 끝에 걸쳐진 자루를 양손으로 쥐었다.

    거대한 둔기가 정혁의 힘에 맞춰 딸려 나왔는데 문에서 완전히 바깥으로 나온 둔기의 크기는 정혁의 키를 훌쩍 넘었고 그 무게 역시 엄청났다.

    [라테! 제발……!]

    정혁이 이빨을 깨물며 소리쳤다.

    라테는 그의 반응에 응답하듯 회복된 가이아의 파편들에 자신의 힘을 불어 넣어 손을 하나 더 만든 뒤 둔기 자루를 같이 붙잡았다.

    무게 때문에 뒤로 휘청거렸던 정혁이 라테의 도움으로 버티게 되고 몸의 반동을 이용해서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겨 숙이면서 둔기를 그대로 강하게 종을 향해 내리 꽂았다.

    거대한 둔기가 공중에서부터 힘을 받아 종과 부딪치자 전장 전체에 평온하면서도 따뜻한, 동시에 웅장하면서도 강렬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전장 전체에 살아남아 격전을 치르고 있는 악마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고 제논의 병력들과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에게는 그들을 쉽게 쓰러트릴 기회를 주게 되었다.

    종 안에서 공명하는 소리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던 데카는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의 비명보다 종소리가 더욱 컸기에 종소리가 멎을 때쯤 돼서야 데카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둔기는 종과 맞닿자마자 정혁의 손에서 사라졌다.

    정혁은 종을 내리치는 동시에 자루를 놓치고 바닥에 나뒹굴었으며 종 역시 한껏 소리를 퍼트리다가 잠잠해질 때쯤 서서히 사라져 갔다.

    에트론은 정신을 잃은 것 같은 정혁을 걱정하며 그의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다행히도 정혁은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켜 다리를 지탱하며 섰다.

    종이 빛과 함께 사라지면서 무릎을 꿇고 양쪽 귀를 막은 채 입을 벌리고 눈이 뒤집힌 데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종소리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정혁은 흐릿한 시야로 데카의 신체가 조금씩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데카는 소멸되어 가는 중이었다.

    만약 폭력의 군주인 데카가 그의 마지막 힘을 폭발시켰을 때 정혁과 싸웠다면 어땠을까? 아마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라테의 힘도 데카의 연속 타격을 막아 내느라 거의 바닥에 가까운 상황이었고 정혁 역시 체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에 데카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에트론의 말도 안 되는 능력 덕분에 정혁은 겨우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겼다.

    [여명의 종은 천계의 마지막 대장장이의 혼이 담긴 걸작입니다. 오랜 시간 울린 적이 없었는데 중간계에서 울릴 줄 누가 알았을까요.]

    에트론이 정혁의 곁에서 전음으로 이야기했다.

    [무리수였지만 통해서 다행입니다….]

    정혁은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은행잎들이 모두 흩어져 엘라에게로 돌아갔다.

    소멸하던 데카의 눈동자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귀를 막고 있던 양손을 내리고 자신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정혁을 보았다.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다.

    “재밌었다.”

    데카는 미소를 지으며 정혁을 바라보았다.

    “억겁의 시간을 갇혀 있다 몇 분의 짜릿함을 맛보고 가네. 그래도….”

    자신의 사라지고 있는 몸을 보면서도 데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는 편히 쉴 수 있겠지.”

    그렇게 데카는 사라졌다.

    이후로 악마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만이 전장에 남았다.

    라테는 건틀릿에서 다시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와 정혁의 곁에 앉았고 에트론 역시 작은 구체안의 꼬맹이로 돌아와서 정혁의 상태를 살폈다.

    김창수와 박달수는 거의 다 무너져 버린 첨탑까지 달려와서 정혁의 곁을 지켰다.

    주변에 제논의 병력들은 잔여 악마들을 모조리 처치했다.

    데카가 사라지자 하늘을 가득 덮었던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이 정혁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으며 엘라는 인간형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가 타락한 땅에 남은 힘으로 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비치는 빛 사이로 정혁의 까마귀가 울음소리를 뱉고 김창수가 기운 빠진 채 앉아 있는 정혁의 앞에 서서 손을 건네며 말했다.

    “축하하네, 이제 카탈은 자네의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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