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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87화 (87/200)
  • ◈87화

    다시 현재.

    데카는 일부러 전장에서 벗어난 정혁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전투의 한가운데로 그를 데리고 왔다.

    녀석은 전형적인 쇼맨이었다.

    정혁은 빛나는 마법구 에트론과 건틀릿 라테를 착용하고 마치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신나있는 데카 앞에 서 있다.

    엘라는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님을 깨닫고서 정혁이 부르기 전까지 지상에 살아남은 악마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 거대한 엔트의 모습으로 변해 제논의 병력들과 함께 진군하고 있었다.

    측면을 공격하던 은행나무 엘프의 병력들도 난데없이 떨어진 전방위 강력한 공격에 놀랐다가 전열을 정비하고 살아남은 악마들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다.

    정혁은 데카 뒤로 보이는 거대한 첨탑을 보았다.

    “이게 전부는 아니잖아, 그치? 그치?”

    데카가 격양된 목소리로 정혁을 뜯어보며 말했다.

    마치 지금의 모습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발언에 정혁은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녀석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들 착각하다 보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살과 살이 맞붙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장에선 한 번의 실수가 큰 희생을 초래한다.

    무리 없이 혼자 독단적으로 전투에 임한다면 모든 책임을 혼자 감당하면 되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전투라면 말이 다르다.

    “얼마나 죽였냐?”

    정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자 데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정혁은 서늘한 눈빛으로 데카의 눈을 보았다.

    데카는 잠시 눈알을 굴리다가 알겠다는 듯 손뼉을 한 번 치며 대답했다.

    “아아! 저 아래 연약해 빠진 인간들?”

    데카는 양손의 손가락을 몇 번 접다가 말고 머쓱하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음, 모르겠네. 그래도 많이 죽이진 않았어! 오늘까지 살려 뒀잖아?”

    정혁은 작은 한숨을 뱉었다.

    대장간에 있을 때는 바깥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여러 번의 들락거림 덕분이었다.

    그러나 에트론이 펼친 결계 안의 느낌이 정혁의 대장간과 비슷하다는 데서 출발한 착각은 결국 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 가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정혁이 전날의 전투에 함께했다고 해서 아무도 죽지 않고 첫째 날을 마무리할 순 없었을 것이다.

    다만 정혁은 출정을 떠나기 전 그들 앞에서 선포한 내용을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와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을 의지할 곳 없는 두려움 속에서 싸우게 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목적이 없는 전투는 스스로의 내면을 갉아먹는다.

    이유가 없는 죽음은 슬픈 법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정혁은 에트론 덕분에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가장 의지했던 지도자 없이 칠흑 같은 어둠을 견뎌 냈다.

    주변의 동료들이 죽어 나가고 로그아웃당해도 스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혁이 다시 나타날 것임을 믿었다.

    그렇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정혁의 살기 어린 발언에 데카의 입이 귀에 걸렸다.

    흥분도가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정혁은 그대로 공중에서 사라졌다가 데카의 정면에서 다시 나타났다.

    누군가는 이런 정혁의 움직임이 순간이동 마법이라고 여기겠지만 엄청나게 향상된 숙련도와 에트론 덕분에 다져진 채광 활성화 스킬의 질적 향상을 기반으로 한 순수한 신체 능력의 가속이었다.

    데카가 놀랄 새도 없이 정혁은 양 주먹을 뻗어 데카의 가슴 정중앙에 내질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화속성 폭발이 데카의 가슴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바로 아래에 얽혀 있던 제논의 병력들과 악마들이 충격파로 나뒹굴었다.

    데카는 그대로 후방으로 밀려났지만 정혁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날아가는 데카가 자신의 속도를 이겨내기도 전에 다시 공중에서 그의 복부에 양 주먹을 내리 쳤다.

    데카가 충격파와 함께 지면으로 떨어졌다.

    눈 깜짝할 새였지만 그가 지면으로 떨어질 때 벌어질 병력들의 충격을 막기 위해 정혁이 떨어지는 데카를 낚아채 거대한 첨탑을 향해 날려 버렸다.

    [자, 잠깐만, 천천히 하게!]

    오히려 당황한 쪽은 라테였다.

    라테는 전신에 밀려드는 정혁의 힘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마음껏 휘둘린 터라 정신을 잃을 뻔했다.

    라테가 에고 장비가 되면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과 경험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자신의 힘에 대한 제약이었다.

    라테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났다 사라져 간 몇몇의 에고 장비를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 태어나 주인의 힘에 따라 함께 성장하고 강해지며 각자만의 독특한 특성을 지녔다.

    실질적으로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던 것이 에고 장비가 된 경우는 들어본 적 없었기에 라테는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에고 장비가 되면서 그가 알았던 에고 장비만의 특성을 본인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전과 같은 정령왕으로서의 완전한 힘을 펼칠 수 없었다.

    정혁이 천천히 성장해 가면서 라테는 자신도 비슷하게 힘의 폭이 증가하고 있다고 느꼈다.

    또한 정령의 모습보다 건틀릿의 모습일 때 더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최근에 정혁의 숙련도가 증가하면서 점점 정령왕에 근접하는 힘을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갑작스럽게 정혁의 힘이 폭발하듯 강해지자 그 힘 자체를 신체가 감당해 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정혁은 건틀릿을 보면서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뭐랄까, 전보다 조금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러운 힘이 이렇게 주입되면 과부하가 올 수도 있다네!]

    “과부하라면 어떻게 된다는 거야?”

    라테는 정혁의 물음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보니 과부하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과부하가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네만, 좋진 않을 걸세!]

    “알겠어, 최대한 조절해볼께.”

    정혁은 웃으면서 저 멀리 한쪽이 붕괴되어 무너진 거대한 첨탑을 바라보았다.

    데카를 집어 던지면서 바닥에 내려왔었는데 주변에는 정혁을 보호하기 위해 급히 진영을 짠 제논의 병력들이 동그랗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에트론?”

    “옙!”

    빛나는 마법구가 허공에 흐릿하게 흡수되었다가 빛을 내며 확장되었다.

    빛 사이로 두 자루의 단검의 자루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정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빛 속에서 단검을 빼냈다.

    [법과 정의의 단도 로저드]

    - 집행의 천사장 소유의 단검

    - 에트론과의 계약으로 임시 대여가 가능

    - 잔여 사용 시간 ……10:00 ……09:59

    정혁은 타이머를 당겨 시야에 항상 닿을 수 있도록 설정한 뒤 휘파람을 불어 까마귀를 불러냈다.

    날렵하게 까마귀의 등에 올라탄 정혁은 천계의 어떤 문양이 새겨진 두 단검을 휙휙 돌려보며 첨탑을 향해 날아갔다.

    첨탑의 박살난 부분에 데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그곳에 없었다.

    고개를 올려 보니 데카는 어느새 첨탑 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는 정혁을 보더니 흡족한 얼굴로 어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정혁은 까마귀의 등을 살짝 차고 첨탑의 벽을 디딘 뒤 꼭대기를 향해 달려 올라갔다.

    정혁이 점점 좁아지는 첨탑의 꼭대기로 향하자 데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급 악마술을 펼쳤다.

    각종 저주와 암흑마법들이 난무했다.

    그러나 정혁은 이미 암흑 마법에 완전한 면역 상태였고 데카의 공격은 모두 그의 전신에서 발산하는 빛무리에 의해 무효화 되었다.

    데카는 인상을 살짝 구기곤 그에게 달려들었다.

    데카의 양손에는 거대한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정혁은 자신 있었다.

    이 정도의 신체 능력이라면 자신이 기존에 익히고 있었던 단도술을 정확히 구현해 낼 수 있다.

    여전히 대장장이라는 제약 덕분에 ‘한’ 만큼의 화려함을 보여 줄 수는 없겠지만 그에겐 그 외의 특별함이 있다.

    빛의 마법구는 염구보다 훨씬 강력하고 빠르며 효과적으로 이용이 가능했다.

    원한다면 동그란 모양에서 적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모양으로 변화가 가능했다.

    그는 에트론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데카의 신체 균형을 무너트리기 위해 그를 끊임없이 교란했다.

    그와 동시에 데카와의 칼춤을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첨탑이 지상인 것마냥 그때그때 박살나는 첨탑의 틈을 잡고 발로 디디거나 혹은 차고 공중에 뜨면서 경합을 다졌다.

    라테의 화염이 폭발했다가 꺼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마법구가 수도 없이 많은 빛을 발산하고 사라진다.

    정혁의 단도와 데카의 대검이 부딪칠 때 가까이서 들었다면 두 고막이 완전히 찢어졌을 정도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위풍당당했던 데카도 정혁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다른 일행과 달리 카탈 대륙에 찾아왔는지는 짐작해서 알고 있다.

    만약 에트론을 만나기 전의 모습이었다면 데카의 바람대로 서로 호각의 전투를 벌이거나 혹은 그가 만족하지 못했을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에트론 덕분에 정혁은 암흑 마법에 완전히 면역이 되었고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이며 회복마저 더디게 만드는 데카와의 극상성 무기를 쥐고 있다.

    게다가 원치 않았던 수련으로 인해 채광 활성화 스킬의 등급이 거의 최고치로 향상된 상태다.

    “짜리잇하구만!”

    정혁의 빈틈없는 공격을 대검의 힘만으로 밀쳐 내며 데카가 소리를 내질렀다.

    여기저기 정혁의 공격으로 인해 베인 상처들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점점 더 광기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정혁은 녀석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검을 휘두르는 녀석을 상대하며 힘이나 신체 능력으로 밀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묘한 기분이 엄습한다.

    데카의 텐션이 올라갈수록 찝찝함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다.

    [폭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요!]

    순간 에트론이 정혁의 얼굴 옆을 빠르게 날아가며 전음으로 외쳤다.

    에트론은 데카의 오른 팔을 관통하려 했지만 튕겨나갔다.

    정혁은 왼쪽 사선으로 날카롭게 베어 들어오는 데카의 대검을 흘려보내고 반대쪽 옆구리로 날아드는 다른 쪽 대검을 쳐내며 한 바퀴 회전한 뒤 첨탑 면을 박차고 데카와 약간의 거리를 벌렸다.

    “에이, 안 돼, 안 돼!”

    데카는 그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대검은 소용돌이치듯 정혁을 계속해서 위협했다.

    정혁은 대검이 지난 자리를 비집고 틈을 만들어 데카의 양 옆구리를 깊게 베어 냈다.

    데카의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 순간 데카는 자신의 대검을 양손에서 놓아 버리더니 옆구리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쳐 올려 정혁의 눈에 뿌렸다.

    정혁은 눈에 들어간 데카의 피 때문에 주춤거렸고 그 타이밍에 데카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라테가 가이아의 파편을 건틀릿에서 정혁의 가슴으로 끌어내려 데카의 공격에 대한 직접적인 충격을 막았음에도 정혁은 뒤로 나뒹굴었고 기울어진 첨탑 지붕 측면을 타고 낙하하기 시작했다.

    정혁은 단도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재빨리 눈을 닦았다.

    다음 숨을 들이 쉴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이 전해졌지만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작은 틈이라도 생긴다면 녀석의 치명적인 다음 공격이 밀고 들어올 것이다.

    “아이, 정신 차려야지!”

    섬뜩한 데카의 목소리와 함께 정혁에게 데카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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