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85화 (85/200)
  • ◈85화

    정혁의 발에 힘이 풀린 것을 느꼈는지 구체는 재빠르게 그의 발아래에서 빠져나갔다.

    시련 어쩌고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 톤에 정혁은 실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구체를 바라보았다.

    구체는 정혁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다음엔 진짜 터트릴 거야. 그 전에 말해, 너 뭐야.”

    정혁의 목소리에 구체는 그의 눈높이에서 가만히 떠서 멈춰 있었다.

    고민하는 것 같았다.

    사실 정혁의 상태는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진이 다 빠진 채여서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혹여 빈틈을 보였다가 저 속내를 알 수 없는 녀석이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다시 몸을 회복시켜 악마와 암살자 놈들과 싸움을 붙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두 번 다시 징글징글한 놈들과 붙고 싶지는 않았다.

    구체는 작은 범위에서 변칙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정혁을 찬찬히 살피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정혁은 정신을 꽉 부여 쥐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

    구체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어린 목소리였다.

    정혁은 대답하지 않고 성난 눈으로 구체를 노려보기만 했다.

    “…힘들지?”

    녀석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였다.

    힘드냐는 단어에 맥이 풀려 버린 정혁은 더 이상 서 있을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에 힘을 유지하기 위해 얕은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는 주저앉자마자 참았던 거친 호흡을 마구 들이 쉬고 내쉬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구체는 어느새 정혁의 곁에 다가와 바닥에 내려앉았다.

    정혁은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다시 손에 쥐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가 그 마저도 풀어 버린 그는 바닥에 완전히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때문에 별도 달도 없는 칙칙한 하늘이다.

    “너 뭔데?”

    정혁은 거친 호흡 중에도 구체에게 물음을 던졌다.

    구체는 누운 정혁의 신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를 완전히 살피고는 그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구체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그때서야 정혁의 눈에 구체 안에 있는 어떤 꼬맹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구체의 크기는 두 주먹만 했다.

    사실 이것은 구체라기보단 일종의 베리어였다.

    빛의 보호막 같은 것을 동그랗고 단단하게 두른 뒤 그것에 지속적으로 마나를 공급하여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작은 꼬맹이는 이런 속임수를 통해서 동그랗고 미스터리한 구체로 자신의 정체를 속이며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녀석에게는 희미하지만 백색의 날개가 붙어 있었다.

    정혁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젠 하다 못해 천사들까지 나타나는 거냐.”

    그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녀석이 베리어를 거두며 당당히 정혁의 가슴 위에 섰다.

    녀석의 크기는 정혁의 주먹만 했다.

    아주 조그마한 꼬맹이였다.

    백색의 가죽옷과 망토를 걸치고 머리에 금색 테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열쇠 다발이 걸려 있었다.

    그의 덩치에 비해 훨씬 더 크고 위용 넘치는 날개는 이상하게도 그 형태가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다고 해야 하나? 마치 중간계에 소환되다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감히 천계의 전사에게 그런 불손한 단어를 뱉다니!”

    녀석이 그의 가슴 위에서 방방 뛰었다.

    데미지를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정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전사는 무슨, 무기도 없는 주제에.”

    녀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열 받았는지 허리춤에 걸려 있던 열쇠 꾸러미를 거칠게 쥐고 뭔가 하나를 골라 낸 뒤 허공에 꽂아 넣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허공에 키 홀이 그려지더니 이 홀에서부터 빛이 퍼져 나와 거대한 문이 생성됐다.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빛에 둘러싸인 거대한 방패가 정혁의 정수리를 향해 공중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혁은 깜짝 놀라서 급히 양손에 망치를 생성해 내고는 그것을 교차해 들어 떨어지는 방패를 막아냈다.

    방패는 망치에 튕겨 저 멀리로 나가 떨어졌다가 사라졌다.

    녀석은 기고만장해져서 어땠냐는 표정으로 정혁을 보았지만 짜증이 더해진 정혁은 손가락을 튕겨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녀석은 욱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서부터 뒤로 한참을 날아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진짜, 별게 다.”

    정혁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카락을 몇 번 헝클었다.

    긴 머리는 전투에 좋지 않다.

    늘 짧은 머리를 고수했던 그는 이런 긴 머리가 낯설고 불편했다.

    당장에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그보다 제논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력이 회복되면 일어서서 다시 임시 주둔지로 향하면 된다.

    그곳에서 회복을 받고 나면 내일은 나쁘지 않은 컨디션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서 다시 밝은 구체가 형성되더니 재빠르게 정혁의 앞으로 날아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녀석은 자신의 금발 머리에 얹어진 금빛 테를 벗어 던지고는 정혁에게 소리쳤다.

    “나를 날려 보내?! 그것도 손가락 튕기기로!?”

    “아니, 도대체 뭘 원하시는데요?”

    정혁은 한숨을 쉬곤 녀석의 장단에 잠시 맞춰 주기로 했다.

    “나는 천계의 무기고 빅토리아의 열쇠지기 에트론이다!”

    나름 쩌렁쩌렁하게 소리치고 싶었겠지만 글쎄, 정혁에겐 어린아이의 땡깡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에트론은 엄지를 보곤 어깨를 잔뜩 끌어 올렸다.

    거의 머리가 어깨 안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이 에트론 님께서 인간인 네놈에게 볼일이 있어서 친히 중간계로 오셨다, 이 말이야!”

    “아아.”

    ‘그래, 그래 그래. 들어나 보자.’

    아직 기력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정혁이 일전에도 궁금했던 것.

    마계의 금제가 풀렸다면 천계의 금제도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녀석에게 물어서 답을 찾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볼일인지 궁금하지?!”

    “예에. 궁금하네여.”

    정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제 가슴까지 당겨 올린 에트론은 땅바닥에 떨어트린 금색 테를 다시 머리에 얹고는 뒷짐을 지며 허공을 당당히 걸었다.

    걸을 때마다 희미한 날개가 펄럭거렸는데 정혁은 그의 움직임이 꽤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인간에게 묻는다! 솔직히 대답할 수 있도록! 어떻게 마계의 금제를 풀었지?”

    “예?!”

    에트론이 좌우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정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당황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고 그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에트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좌우로 걸었다.

    “그래! 몰랐던 거군!”

    ‘잠깐만. 이 자식 이거.’

    정혁은 속으로 이 녀석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저기, 에트론 님?”

    “뭐지?”

    에트론이 다시 멈춰서 정혁을 보았다.

    정혁은 약간 능글맞은 미소로 에트론과 시선을 맞췄고 뭔가 들킨 사람마냥 녀석은 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당당히 폈던 가슴을 다시 품으로 밀어 넣었다.

    “제가 이게, 느낌이 말입니다요?”

    “…어…?”

    “에트론 님께서 제게 뭔가 부탁할 게 있는 것 같단 말이지요?”

    “…내…내가? 내가 인간한테 부탁을 해? 내가? 허 참, 이 녀석 보게? 건방진 거 봐 아주 그냥 어?”

    에트론은 정혁의 말 한마디에 당황한 듯 이런 저런 말을 주저리주저리 뱉었다.

    그 사이 정혁이 몸을 일으켰다.

    ‘됐다. 이제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을 만큼은 기력이 회복되었다. 이공간은 대장간의 느낌과 비슷했으니 이곳에서 긴 시간이 지났다 해도 결계를 벗어나기만 한다면 실제 시간에서 아직 전쟁은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자. 에트론이라는 녀석을 떠봐야 한다.’

    정혁이 일어나는 것을 본 에트론이 당황한 듯 재빨리 구체로 날아올라 정혁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어, 어딜 가느냐!”

    “저는 이제 제 볼일 보러 갑니다. 그, 천계의 열쇠지기님을 못 알아 뵙고 무례를 범한 점 죄송합니다아.”

    정혁은 몸을 숙여 인사를 꾸벅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구체가 다시 정혁의 눈앞에 섰다.

    에트론은 구체 앞에서 양손을 뻗어 정혁을 저지하며 소리쳤다.

    “아직! 아직 내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 멈춰라!”

    정혁이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은 정확히 동그랗게 말려 언제든 발사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트론은 침을 꿀꺽 삼켰지만 비켜서지 않았다.

    정혁이 한숨을 쉬며 다른 손까지 들어서 똑같이 발사 준비를 마치자 결국 사색이 된 에트론이 힘없이 옆으로 비켰다.

    “쯧.”

    정혁은 녀석을 비켜서서 바깥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였다.

    “…그… 이, 인간!? 아, 아니 저, 정혁… 니, 님! 니, 님아!”

    정혁은 녀석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덩달아 의문이 생겼다.

    역시 이 방법이 잘 들어먹히고 있다.

    말하는 톤도 그렇고 행실도 그렇고 영락없는 꼬맹이다.

    원하는 것이 있지만 자존심 때문에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 꼬맹이.

    ‘이대로 가긴 나도 아쉽지.’

    “왜여?”

    정혁이 고개만 돌려서 에트론을 보았다.

    에트론은 쏜살같이 날아와 정혁의 앞에 섰다.

    “제, 제가 정혁 님께 부탁드릴게 있, 있습니다.”

    “부탁이요? 아이구, 위대에에하시이이인 천계의 무기고 빅토리아의 열쇠지기 천사님께서어 인간 나부랭이한테 부탁이라니요오?”

    정혁이 한껏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에트론이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혁은 잠시 이 상황이 즐거워서 속으로 키득거렸다.

    “아니, 그,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하진, 예, 않습니다. 그, 그냥 열쇠지기구요, 예. 천사장님들에 비하면 뭐, 아무것도 아, 아니지요. 결례를 버, 범해서 죄송해요.”

    이젠 에트론이 반대로 고개를 숙였다.

    정혁은 팔짱을 끼고 녀석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래, 알겠고 진짜 원하는 게 뭔데?”

    “아… 음….”

    에트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정혁 님이 가진 능력을 알고 있어요. 대장장이이시면서 ‘오아시스’라는 중간계의 이름을 짊어지고 에고 장비까지 제작할 수 있다죠.”

    정혁은 생각보다 디테일하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에트론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제가 정혁 님의 에고 장비가 될 수 있을까요?”

    정혁은 잠시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아니, 사실 뭐 경험이라고 해 봐야 두 번이 다긴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상대 쪽에서 스스로 자진하여 에고 장비가 되겠다고 찾아오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하지만… 아무나 다 에고 장비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에고 장비에 빈자리는 3개.

    에트론은 겉으로 봐선 전투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메리트라고 하면 천사인 것인데.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만 하니까요?”

    그 순간.

    [오아시스 대장장이에게 탐이 나는 재료가 등장합니다. 히든 스킬을 활성화 합니까? Y/N]

    정혁은 갑자기 등장한 상태 알림 창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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