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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84화 (84/200)
  • ◈84화

    능선을 내려가는 병력들의 발걸음은 충분히 가벼웠다.

    거의 포기에 가까웠던 이들이 타이밍 좋게 등장한 자신의 지도자 덕분에 다시 기력을 찾은 것이었다.

    보급받은 무기와 방어구는 자신들을 더 굳건히 보호해 주고 엄청난 힘을 발휘할 거라는 믿음의 근거도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앞으론 자신의 지도자가 모두를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와 함께 걷는 팀장들의 움직임도 어제보다는 훨씬 당당했고 패기 넘쳤다.

    옅은 해의 기운은 다시 검은 구름 사이로 갇혔다.

    어두움과 축축함이 감도는 전장엔 시체가 없었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파괴된 장구류들과 여러 물건들이 치열함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했다.

    정혁은 일렬로 늘어선 자신의 병력들의 두세 보 앞에 당당히 섰다.

    악마들은 제각기의 모습으로 응집해 어제와 같이 인간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그들에게 전쟁은 그들의 갈증을 해소할 완벽한 장소였다.

    마다할 것 없는 축제의 자리다.

    어제보다 더 흥겨운 것 같았다.

    침을 뚝뚝 흘리거나 아직도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각자의 무기 날을 핥으면서 어서 그들이 달려들기를 기다렸다.

    김창수는 정혁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들어 내리는 순간 모두가 부딪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정혁은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가더니 김창수를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을 하곤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거대한 까마귀가 돌풍을 일으키며 정혁에게 날아와 착지했다.

    정혁은 까마귀 등에 올라탔다.

    악마들도 제논의 병력들도 날아오르는 정혁을 바라보았다.

    정혁의 허리춤에서 염구 8개와 밝게 빛나는 투명한 구체 하나가 같이 튀어나왔다.

    염구는 즉각 흩어졌지만 밝게 빛나는 구체는 정혁의 머리 위에서 움직이다가 빛을 내며 갑자기 사라졌고 빛 속에 손을 뻗은 정혁에게 쥐어진 것은 거대한 활이었다.

    김창수는 그 활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다가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여…영궁. 아르간티아…!”

    그는 숨을 삼키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정혁의 손에 쥐어진 아르간티아의 시위가 잔뜩 당겨졌다.

    시위에 화살이 걸쳐져 있진 않았다.

    다만 시위만큼은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김창수는 이내 저 멀리서 어제 느꼈던 강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나 이미 정혁의 손에서 활시위가 떠난 뒤였다.

    활시위는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이 광활한 대지의 상공 전체에 빛의 화살이 비처럼 솟아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시위가 튕겨짐과 동시에 악마 군단의 병력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만큼의 화살이 공중에 생성되었다.

    눈도 깜박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햇빛보다도 강렬한 빛이 허공을 가득 메웠고 이 빛은 그대로 낙하했다.

    화살은 단순한 길이가 아니었다.

    마치 창처럼 두껍고 길었으며 화살촉은 갈퀴가 세 갈래로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으며 화살은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회전하며 지면으로 낙하되었다.

    악마들은 이 광범위한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거니와 자신들의 속성과 철저히 반대되는 천계의 힘을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아르간티아의 광명의 화살 비는 그렇게 지면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제논과 함께 전투를 시작하려던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도, 제논의 병력들도 침묵에 잠겼다.

    악마들은 제각기의 모습으로 관통당해 바닥에 고꾸라졌다.

    개중에 강한 놈들만 이 공격을 겨우 막아 내거나 피해 냈다.

    나머지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몰살당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말이다.

    라테는 고개를 저으며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정혁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김창수는 정혁의 시선을 느끼고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전 병력에게 전진하라는 전음을 맹렬히 외쳤다.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제논의 병력들이 일제히 잔여 악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혁 역시 앞으로 비행해 가려는 찰나 뭔가가 앞에서 빠르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까마귀의 고삐를 비틀어 쥐었다.

    까마귀는 빠르게 방향을 틀어 병력들의 외곽으로 회피 비행을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제논의 병력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 그는 치열한 전장의 함성이 닿지 않는 곳으로 까마귀를 유도했다.

    까마귀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 앉아 주었다.

    정혁은 까마귀에서 내려 녀석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까마귀는 다시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정혁은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선 아주 단단해 보이는 악마와 마주할 수 있었다.

    사실 라테와 엘라를 모두 전장에 합류시켜야 하지만 다가오는 녀석이 엄청난 수준이라는 것을 느낀 정혁은 라테를 건틀릿화시켜서 다급히 손에 장착시켰다.

    염구가 회전하며 악마 곁을 돌았다.

    악마는 그것이 재밌어 보였는지 빙글빙글 돌던 염구 하나는 낚아채 손에 쥐어 보았다.

    염구는 너무나 손쉽게 부서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보자 정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염구를 모두 날려 보냈다.

    [폭력의 군주….]

    라테가 전음을 보냈지만 갑자기 그의 앞에 있던 악마가 손사래를 쳐 정혁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소개해야지! 내가!”

    마치 정혁과 라테의 전음을 듣고 있었다는 듯이 반응하는 녀석 때문에 정혁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평정심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정혁은 자신 있었다.

    상대가 악마라면 더더욱 말이다.

    “나는 폭력의 군주 데카야. 너는?”

    데카는 밝은 목소리로 경쾌하게 정혁의 이름을 물었다.

    “정혁. 그렇게 불러.”

    “정혁이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데카는 약간 흥분한 어조로 정혁에게 물었다.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부정도 긍정도 아닌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데카가 재빨리 물었다.

    “제로니막스하고 안트로이아를 소멸시킨 게 네가 맞아?”

    정혁은 잠시 그 둘을 떠올리고는 한 번 고개를 끄덕했다.

    그러자 데카의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선 박수를 쳤다.

    박수를 칠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진동했다.

    진동은 잔잔히 정혁의 피부를 타고 울렸다.

    “방금 영궁 아르간티아를 쏜 것도 네가 맞고?”

    그의 물음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 데카는 신이 난 듯 방방 뛰었다.

    그는 즐겁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 강해? 강하지? 그치?!”

    “궁금해?”

    정혁의 역질문에 데카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곤 귀 옆에서 데카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당연하지이.”

    속삭임을 끝으로 데카의 공격이 시작했다.

    소리가 들렸던 쪽에서 날아든 발길질을 막아냈지만 정혁은 몇 걸음 옆으로 밀려나야 했다.

    데카는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정혁을 보며 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의 표정은 마치 자신에게 딱 맞는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라테가 물었다.

    정혁에게 완전 귀속된 에고 장비인 라테는 정혁의 힘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엘라보다도 더 깊게 연결되어 있는 둘이기에 그렇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정혁의 힘은 조금 더 강해진 수준이었다.

    그것도 피지컬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대장장이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로부터 발현되는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부분에서 비약적으로 힘이 상승했다.

    ‘어째서 단 하룻밤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영궁을 다루게 되었다니.아니, 그리고 염구 사이에 있었던 밝은 구체는 아마도…….’

    그러다 라테는 정혁의 힘의 근원에 심어진 엘라와 라테 이외의 또 다른 느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상황을 납득했다.

    [오랜만입니다, 불의 정령왕님.]

    [당신이군요, 천계의 무기고 빅토리아의 열쇠지기 에트론.]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라테가 반응하며 대답했다.

    그때 정혁의 머리 위로 그의 새로운 칭호가 반짝였다.

    [칭호 : 빅토리아 열쇠지기]

    - 당신은 에트론과 협력관계가 됩니다.

    - 모든 암흑 속성의 공격에 면역됩니다. / 암흑 속성의 적에게 치명타 효과가 100% 상승합니다.

    - 에트론은 당신에게 천계의 무기를 일시적으로 제공합니다.

    - 에트론과의 호감도가 상승할수록 더욱 높은 등급의 천계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그날.

    그러니까 도대체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그 지옥 같은 날.

    정혁이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구체를 따라 숲을 걷고 있었다.

    그 퐁퐁거리는 괴이한 녀석을 따라 말이다.

    몸은 전부 회복되어 있었고 발걸음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공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며 빛이 공중에 솟구쳐 올랐다가 사라지면 이리 떼처럼 암살자와 악마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정혁은 한계에 부딪치고 부딪쳤다.

    그나마 정혁의 대장간에서 조와 함께 했었던 대장기술 숙련도 상승을 위한 훈련은 끝을 정할 수 있었지만 이 반복적인 혈투는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정혁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면 똑같이 초기화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전투의 굴레에 갇혀야 했다.

    머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 얼마나의 시간이 지났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굴레가 대장간과 비슷한 메커니즘이라면 현실의 시간은 더디게 흐를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누가 시작했고 누가 끝을 맺을지 모르는 이 시련이 마무리되기를 정혁은 간절히 바랐다.

    결국 정혁은 끝없는 반복 끝에 자신의 힘으로 모든 적들을 처리해 내게 되었다.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던 놈들에게도 끝이 있었고 라테와 엘라의 힘 없이 자신의 숙련도와 채광 활성화, 그리고 염구만으로 정혁은 놈들을 모두 해치운 것이다.

    그러자 공중에 흩뿌려졌던 빛이 중앙으로 모이더니 거의 탈진하여 쓰러진 정혁의 눈앞으로 밝은 구체의 모습이 되어 다가왔다.

    “…시련을 이겨 낸 자여….”

    정혁은 탈진한 상태에서도 저 빌어먹을 구체를 쥐어 터트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막을 수 없었다.

    한껏 무게 잡은 목소리가 구체에서부터 들려왔지만 정혁은 그것을 무시한 채 아직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염구를 그대로 구체를 향해 날려 보냈다.

    구체는 당황한 듯 재빨리 염구를 피해 냈다.

    하지만 분노에 가득 찬 정혁의 손아귀를 피할 수 없었다.

    오직 분노로 몸을 일으킨 정혁은 녀석을 손에 쥐고 발아래로 옮겨 밟은 뒤 왼손에 전력의 망치를 쥐고 높게 손을 뻗어 올렸다.

    구체는 당황한 듯 마구 진동했으나 정혁의 맹렬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의 망치가 구체에 정확히 내려치려던 순간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구체에서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 제발! 제발요! 미안합니다!!”

    정혁은 그 목소리에 당황해서 내려치려던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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