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거의 모든 병력들이 반 빈사 상태로 후퇴했다.
안나의 작전이 들어맞은 건지 아니면 아까의 그 데카라는 군주가 정말 제논과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을 봐준 건지 모르겠다.
온통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만 가득하다.
능선까지 올라오지 못한 병력들을 그나마 후방에서 체력적 피해를 덜 입은 병사들이 들고 나르며 옮겼다.
팀장들은 생존한 팀원들을 확인하고 숫자를 파악하느라 정신없었다.
안나의 곁에 어느새 엘라가 다가와서 축 처진 어깨를 기댔다.
안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벌어진 이 사태를 통해 앞으로의 가능성을 판단해 보고 있었다.
라테는 임시 주둔지 곳곳에 모닥불의 불길을 피워 주며 돌아다녔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치유 계열의 마법사들이 탈진하며 쓰러졌다.
그래도 곡소리는 전보다 줄어들었고 임시 주둔지에는 하루 전까지만 해도 넘치던 활기찬 분위기와 패기, 그리고 전쟁을 앞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진 채 적막만 돌았다.
가장 먼저 안나를 찾아온 인물은 박달수였다.
그는 텅 빈 화살통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키만 하던 활은 보이지 않았다.
양날 도끼도 없다.
그는 한껏 피폐해진 몰골로 라테가 지펴 놓은 모닥불 앞에서 모든 힘을 풀어 버린 듯 주저앉아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를 시작으로 김창수와 다른 팀장들도 언덕을 올라와 지휘부로 모였다.
그 누구도, 어떤 단어도 꺼내지 않았다.
라테마저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안나는 초조했다.
이들은 아직 데카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오늘의 후퇴가 그들의 선의에 의한 요행이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감히 이들 앞에서 훨씬 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안나라고 했나? 혹, 데카가 왔다 갔는가?”
그러나 적막을 깨고 첫 마디를 던진 것은 라테였다.
라테는 타닥거리는 불꽃 위에 손을 올리며 작은 불꽃 회오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말에 김창수가 바로 반응했다.
“데카? 내가 느낀 강한 기운이 그자였나? 상상… 이상의 강함이 공중을 스쳐 지나갔었어.”
다른 팀장들의 동공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예. 말씀 대로입니다.”
안나의 곁에 있던 엘라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어렴풋이 들리기론 단어 끝에 정혁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분명 온갖 욕을 퍼붓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데카? 뭔데, 뭐하는 새낀데요?”
하늬안이 대검을 거의 집어던지듯 바닥에 내리꽂으며 라테에게 거칠게 물었다.
“폭력의 군주지. 마계의 군주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한 자일세.”
“아니, 빌어먹을. 군주는 도대체 몇 놈이나 있는 겁니까?”
이제껏 물자 보급과 서포터 계열의 팀원들을 통솔했던 리디안이 다 찢어진 가죽 장갑을 벗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생각해 보게. 마계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중간계인 이 오아시스에 난입하기 어렵다네. 금제는 강할수록 더 강하게 적용되기 때문이지. 마계의 군주는 총 아홉 명일세. 우리가 정혁과 함께 처지한 두 군주 역시 그 아홉에 속하는 자들이고. 각기 힘의 크기는 다르지만 두 군주는 적어도 가장 강한 쪽은 아니였을 거야.”
“참도 기쁜 소식이네요.”
드웨이크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라테는 불길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침울해진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다.
왠지 정혁을 욕하는 엘라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자식은 지가 우리 앞에서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고 해놓….”
하늬안이 욱해서 소리쳤다가 김창수의 날 선 눈빛에 놀라 말끝을 흐렸다.
김창수는 다 깨진 어깨 갑옷을 고정하던 끈을 풀었다.
갑옷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마치 모두의 마음 같았다.
저 나락으로,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잠식된 느낌.
“보고들 하시게.”
김창수의 말에 각 팀장들이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하루의 전투로 8분의 1 정도의 병력을 잃었다.
긴 전투 시간을 고려해 보았을 때 생각보단 잃은 병력의 숫자가 적은 편이다.
각자 보급된 상당한 수준의 장비가 병사 개인의 능력을 크게 증폭시켜 준 탓이었다.
더불어 그동안 쌓아 왔던 훈련의 성과와 딱 맞춰 보급된 물품들, 더불어 후방 지원들까지 전쟁의 진행 상황만 봤을 때 깔끔한 수준의 싸움이었다.
정혁이 없어 힘을 잘 쓰지는 못했지만 광범위한 공격을 퍼부은 엘라와 라테의 존재도 컸다.
전방에 몰렸던 적의 수가 은행나무 엘프 병력에 의해 분산된 것도 피해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대다수의 병력들이 소유한 무기와 방어구 내구도가 거의 바닥입니다.”
리디안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태 창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보였다.
여기 있는 팀장들조차 각자의 장비가 부서지거나 갈리고 혹은 없어졌다.
정혁이 건네준 염구가 박힌 무기들은 각각 화려한 불길들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내일의 전투 이후에 어떻게 될진 미지수다.
“안나, 어떻게 생각하나?”
김창수가 무겁게 안나에게 화두를 돌렸다.
안나는 여전히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단호해질 때다.
단호히 그들에게 명백한 사실을 전달해야 할 때다.
“내일의 전투를 이어 가긴 불가능 합니다.”
모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문장으로 듣게 되니 어둡고 무거웠던 분위기가 더욱 다운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김창수가 굳은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내일도 전장으로 나갈 걸세.”
누구도 그의 말에 반론하지 않았다.
안나만이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
끝나지 않았으면 했던 밤이 지나고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팀장들은 새벽바람을 걷어내며 병력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미리 움직였다.
조그맣게 변해 혼자서 불길을 안고 있던 라테가 고개를 들었고 나무 위에서 잠을 청했던 엘라 역시 뜨기 싫은 눈을 떴다.
안나는 이미 능선 절벽 끝에서 꿈틀거리는 악마 군단의 병력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어제 처리했던 시체들을 전부 치워 놓았고 다시 전열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모습에 안나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녀의 곁으로 김창수가 다가왔다.
“병력을 물려야 하겠나?”
“당연하죠.”
안나는 즉각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사령관님께서 기대하고 있는 장면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만약 적당한 때에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닐세, 안나. 그는 분명 나타날 거야.”
“어째서 장담하시는 겁니까.”
“주인공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하…!”
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김창수는 희미하게 웃으며 징글징글하게 모여 있는 악마 군단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의미 없는 싸움이 아니라 다행이네.”
“그런 의미를 찾고자 했던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김창수는 안나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병력들에게 나아갈 것 같았던 김창수가 그녀의 등 뒤에서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을 느낀 안나가 의문이 들어 몸을 돌렸다.
“내가 그랬지? 주인공은 늘 이런 타이밍에 등장한다고.”
안나는 김창수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장발이 된 정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움보다도 안나는 저 멍청한 표정에 주먹을 한 방 날려 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주, 준비는 다 되었어요?”
정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안나와 김창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분명 말끔했었는데 다들 한 차례 전쟁이라도 치른 것처럼 여기 저기 상해 있었다.
시야에 보이는 다른 팀장들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들뿐이 아니라 주변에 보이는 다른 병력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 원망과 기쁨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이들의 표정과 상태에서 이미 하루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겠다.
더불어 그들끼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 또한 알겠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팀킬 당하기 싫으면 모르쇠 작전을 써야겠다.
나는 몰랐던 거야.
그래,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어.
나도, 나도 피해자야.
자기 암시를 걸고 있던 정혁은 자신의 오른쪽 뺨에 날아오는 하늬안의 주먹과 왼쪽 뺨에 날아오는 엘라의 주먹을 동시에 맞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되려 하늬안과 엘라가 각자의 주먹을 쥐며 잔뜩 인상을 구겼다.
“왜, 왜들 이래요? 무슨 일 있었나요?”
안나는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풀어 내야 저 빌어먹을 자식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러다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정혁에게 다가가서 손목에 걸어 두었던 고무줄을 이용해서 장발의 머리를 반쯤 솎아 묶어 주었다.
“어제 뒤질만큼 힘들었으니까 오늘 다 갚아 줘야 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귓속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안나에게 정혁이 진심을 가득 담아 물었지만 안나는 더 물어봤다간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살벌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정혁은 헤진 옷을 갈아입었다.
라테는 그에게 다른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전해지는 소유자의 강력함 힘을 말이다.
라테는 터질 듯이 요동치는 가이아의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고 엘라 역시 갑작스레 회복된 컨디션에 놀라고 있었다.
“리디안.”
정혁이 보수 팀장 리디안을 불렀다.
“시간은 충분 할 테니 대장간에서 장비를 교체하세요. 조가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그가 열어 준 이공간 포탈을 타고 리디안이 안으로 들어갔다.
보수 팀은 일사분란하게 모든 진영의 훼손된 무기와 방어구들을 회수하여 정혁의 대장간으로 이동시켰고 동시에 작업되어 새것이 된, 아니 오히려 이전에 제작된 것보다 더 나은 등급의 무기와 방어구들을 다시 보급받았다.
더불어 팀장들도 무기를 손볼 수 있었고 박달수에게는 대량의 화살이 담긴 화살통과 최상급 나무 재료라고 여겨지는 모르가나 떡갈나무로 제작된 활, 그리고 지난 안트로이아 토벌 덕분에 챙긴 그의 몸체를 구성한 광석을 주원료로 한 한 손 도끼 두 자루를 지급받았다.
박달수는 바뀐 무기의 힘을 느끼곤 얼른 전장으로 튀어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다른 병력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에 감돌던 패배의 기운은 사라지고 정혁의 등장과 함께 진영 전체에 활기가 돌았다.
정혁은 모든 병력들이 준비될 때까지 안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들었고 자신이 무려 하루라는 시간을 사라져 있었다는 사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공간이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는 것과 또 그곳에서 엄청난 시간을 보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곤 놀라움을 금치 못한 척을 했다.
또한 정혁은 데카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옅은 미소를 띄웠다.
안나는 그의 미소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가 전장을 밟은 순간, 그 말도 안 되는 장면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