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82화 (82/200)
  • ◈82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이 빌어먹을 밤은 여명의 기운조차 없이 계속해서 칠흑과 같다.

    정혁은 주변에 산처럼 쌓여 가는 적들의 시체를 밟으며 또 한 번 망치를 치켜들었다.

    낙뢰가 사방으로 번쩍거리며 내려쳐지고 땅에 흡수됐던 전력이 다시 땅을 치고 올라와 공중으로 솟구친다.

    번개에 맞은 대상은 각각 검게 그을려 격렬한 경련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화염의 소용돌이가 정혁의 주변을 맴돌며 적들을 화상 이상의 고통으로 인도하고 염구는 처음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협적으로 적들의 사지를 관통하며 날아다니고 있다.

    쉴 틈이 전혀 없었다.

    체계적으로 공간을 만들어 가는 적들의 공격 앞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오는 녀석들에게는 전력의 망치나 화염의 망치가 내리 꽂혀졌다.

    악마들의 짙은 녹색 혹은 자줏빛 피에 범벅이 됐다가 암살자들이 흘리는 붉은 피에 얼굴을 씻는다.

    그는 오른쪽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헬하운드 한 마리를 피하려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의 다리에 걸려 주저앉았다.

    그에게 달려들었던 헬하운드는 염구에 의해 머리를 관통당해 죽어 버렸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 전신에 수십 번 외쳤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은 그의 명령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근육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도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한 전장에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다.

    이들은 계속해서 나무 사이사이에서 등장해 공터로 달려들었다.

    빛나는 구체가 사라지고 어떤 반응도 없었다.

    전투는 시작되었고 호기로웠던 정혁도 몇 시간이나 지속되었는지 모를 적들의 반복되는 인해 전술에 이미 지친 지 오래다.

    전투 중간중간에 고민해 봤다.

    이미 새벽이 되었어도 충분히 밝아졌을 시간이다.

    마치 정혁이 대장간에 들어가 있는 것마냥 어떤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쓰러트리고 있는 이 많은 적들도 과연 실제적 존재란 말인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이 정혁의 신체 곳곳을 도륙내기 위해 휘두르는 각종 무기들만큼은 실제인 것 같아 가만히 당해 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뒤지겠네, 진짜.”

    강해지고 나니 정혁에게 죽음이라는 마수가 멀어진 것 같다고 느낀 요즘이었다.

    신이 경고했던 대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데도, 이곳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처지에 비해 너무도 과감한 걸음들을 이어 왔다.

    그래서일까, 홀로 죽음 앞에서 줄다리기하는 느낌은 오랜만이다.

    익숙지 않고 힘겹지만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한다.

    대장장이로서의 신체 능력은 이미 한계다.

    염구의 회전 속도나 비행 속도, 자체 온도는 처음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순간순간에 집중해서 마나를 흘려보내야지만 겨우 적들의 중심부를 꿰뚫을 수 있었다.

    공터를 빙 둘러 도망치고 있는 지금도 그냥 다리를 멈추고 싶었다.

    좌측에서 치고 들어오는 암살자의 검기에 정혁은 재빨리 다리에 브레이크를 걸고 멈춰 섰다.

    검기가 지난 자리로 비수 몇 자루가 정혁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정혁은 그것을 두 망치로 전부 쳐 내면서 공중으로 크게 도약했다.

    수십 번 이렇게 날아오르듯 도약했지만 그때마다 사방은 고요한 숲속일 뿐 어떤 특별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동일한 배경 앞에 정혁이 다시 몸을 돌려 아래로 안전히 착지하려다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추락하듯 떨어져 지면과 충격했다.

    ‘한계다, 한계다.’

    되 뇌이던 몸이 결국 비명을 지르며 모든 움직임을 포기한 것이다.

    이제는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전신에 강한 고통이 퍼지면서 정혁은 그냥 대 자로 뻗었다.

    [HP 경고! 잔여 HP가 10% 남았습니다!]

    정혁은 정말 오랜만에 HP 경고 창을 마주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 찰나의 순간에 제논의 병력들과 팀장들을 떠올렸다.

    주마등처럼 오아시스 안의 정혁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현실의 삶보다 더 현실 같은 이곳의 삶이 아련하기만 하다.

    악마들의 광기 어린 울음소리와 암살자들의 은신 해제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워진다.

    그들의 총공세가 정혁의 전신으로 쏟아져 내린다.

    정혁은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

    안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전장을 살폈다.

    김창수의 의지를 이어받아 각성한 팀장들을 필두로 박달수의 치안대가 선봉을 맡으며 전장으로 제논의 병력들은 호기롭게 돌진했다.

    정혁이 없다는 사실은 제논의 모든 병력들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렇다고 병력들의 사기가 떨어지진 않았다.

    반드시 정혁이 합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마들과의 전투는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전장의 뿔피리가 울리고 제논의 병력들이 길게 늘어서서 포효하며 달려들자 오른쪽 측면에서 은행나무 엘프의 병력들이 합류해 밀어 붙었다.

    엘라와 라테도 전투에 참여했다.

    다만 정혁이 없어서인지 그들의 힘은 조금 부족해 보였고 또 빨리 지쳐 갔다.

    전쟁에 쉬는 시간은 없다.

    누군가 후퇴하거나 모두 몰살당하지 않는 이상 적도, 아군도 쉴 수는 없다.

    제논의 팀장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병력들 중 대다수는 이런 거대한 전쟁의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꾸준히 훈련해 온 덕분에 마치 하나의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악마들을 분쇄시킬 수 있었다.

    버프를 가진 마법사들이 꾸준히 최전방의 전사 라인들을 회복시키고 힘을 북돋는다.

    여러 특성을 지닌 서포터들이 각지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아군의 공격을 돕고 물자를 보급하는 병력들이 여기저기 보급 상자들을 공수한다.

    화살이 계속해서 빗발치고 강력한 마법들이 악마 진영에 쏟아진다.

    이 모든 힘을 하루 온종일 쏟아 부어도 전투의 균형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악마 군단의 병력이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미미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전의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상대가 악마여서 그런지 몰라도 녀석들에게 쉼이라는 개념은 더욱 없을 것 같았다.

    안나는 김창수에게 전음을 보냈다.

    [곧 해가 집니다. 아시죠?]

    [알고… 있네!]

    안나는 밤까지 전쟁을 이끌 생각이 없었다.

    밤에는 무조건 후퇴해야 했다.

    악마들을 밤에 상대한다는 것은 불구덩이에서 라테와 겨루는 것과 같다.

    녀석들에게 완전히 유리한 환경에서 싸울 수는 없다.

    병력들이 쉴 수 있는 타이밍을 재야 한다.

    안나는 번뜩 무언가를 떠올리고 급히 하늬안을 호출했다.

    [하늬안 팀장님! 아린 국왕님과 연결해 주세요!]

    하늬안은 안나의 다급한 요청에 아린 국왕과의 전음 채널을 연결해 주었다.

    [국왕님! 제논의 안나라고 합니다. 급히 한 가지만 요청드립니다!]

    […뭐, 뭐죠?!]

    [국왕님의 영혼의 군대를 최대한 펼쳐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말입니까?]

    [염치불구 하지만 제논의 병력들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들과 밤에 싸울 수는 없어요! 그건 은행나무 엘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다고 이들이 쫓아오지 않을까요?]

    안나는 아린의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번쩍 뜨며 전음을 보냈다.

    [추, 추측이긴 합니다만 이제까지의 데이터로 봤을 때 이들은 그들이 정한 일정한 경계 이상을 벗어나려 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눈앞의 적이야 죽이려 들지 몰라도 아린 국왕님의 영혼 군대가 시야를 가렸을 때 모두가 일제히 후퇴하여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이들도 영토를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꽁무니를 쫓으려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아린의 전음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안나는 속이 바짝 타 들어감을 느끼면서 지고 있는 석양을 보았다.

    저 해를 묶어서 어디에 고정시켜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네요.]

    그때 반가운 아린의 전음이 닿았다.

    안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은행나무 엘프 측도 데미지가 상당하겠지만 저희도 동일합니다! 그쪽도, 저희도 오늘은 후퇴해야만 해요! 도와주십시오, 국왕님!]

    […알겠습니다. 제가 신호하면 전선을 조금 후방으로 후퇴시키세요. 무엇보다 빠르게 이탈하셔야만 합니다. 저희 영역뿐만 아니라 제논의 전선까지 모두 둘러 이들의 시야를 가릴 만큼의 병력 소환은 길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몇 분 뒤가 좋을까요? 해가 빠르게 지고 있어서….]

    안나가 초조한 마음으로 지는 해를 보았다.

    [5분 뒤에 작전을 개시하겠습니다.]

    아린의 전음을 끝으로 안나는 마나를 모아 제논의 전 병력에게 아린과 나눈 전략을 전음으로 발산했다.

    지쳐 가는 것이 보였던 제논의 병력들에게 잠시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저 멀리에서 까마귀 편대가 날아올랐다.

    안나는 직감적으로 저 편대 중에 아린 국왕이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같은 5분이 흐르고 초록빛 마나가 전선의 전방에 마치 띠처럼 둘러지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제논의 병력들은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악마 군단의 병력들이 선조들의 군대로 시선을 돌렸다.

    김창수와 팀장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모두 임시 주둔지로 전력질주하게 독려했다.

    “그러니까. 이게 끝이라는 거지?”

    순간 안나는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바로 오른쪽에서 전해지는 엄청난 힘에 전율했다.

    침조차 삼킬 수 없었고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나름 세계로부터 이어받은 힘을 쓸 수 있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숨도 쉬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꼬박 하루를 기다려 줬는데도, 아쉽구나, 아쉬워.”

    안나는 고개를 돌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목소리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김창수정도? 아니다.

    그와 팀장들이 사력을 다해 덤벼야지만 겨우 몇 합을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그녀에게 말을 거는 자가 저 악마 군단의 군단장이자 군주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혁의 강함에 반해 그와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악취미의 악마.

    그러나 이 악취미는 그가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 된다.

    “한입거리도 안 되는 은행나무는 볼 것도 없고 그 대단하다는 불의 정령왕 양반도 겨우 저 정도 수준이라면 정말 실망인데, 안 그래 아가씨? 뭐, 대꾸 좀 해 줘 봐.”

    안나는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악마를 보았다.

    머리에 긴 뿔을 가지고 뿔 사이에 불타는 왕관을 쓰고 있는, 말라 보이지만 탄탄한 구릿빛 몸과 벗은 상체 그리고 찢어진 반바지로 적당히 가린 하체.

    양손에 길고 날카롭게 손질된 손톱을 가지고 있었으며 발은 맹수의 발과 같았다.

    작은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으며 좌우 눈 아래, 콧등까지 연결되어 그어진 긴 상처 자국이 인상적이었다.

    양 귀에는 반달 모양의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요! 나는 폭력의 군주 데카야.”

    자신을 데카라고 소개한 악마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을 보고 있는 안나에게 개구쟁이처럼 인사하고는 후퇴하는 병력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싸우긴 하네, 너희. 가지고 있는 장비들도 수준급이고 말이야. 근데 그런 거에 의지하면 비겁한 거야. 원래 힘은 이 주먹, 어? 이 주먹에서 나오는 거거든.”

    데카는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더니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뭐, 좋아. 후퇴하는 놈들 붙잡는 건 내 스타일도 아니고. 멍청이 둘을 삭제시켜 준 고마운 놈한테 인사하고 싶었지만 없으니 어쩔 수 없네. 알아서 도망가도록 하렴. 봐주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데카는 안나에게 윙크를 찡긋 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원 이동을 한 것도 아니다.

    순수한 움직임만으로 안나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안나는 넋을 놓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정혁, 이 개새끼…. 어디 있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