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81화 (81/200)
  • ◈81화

    숲속은 굉장히 어두웠다.

    아크 제국의 전 지역이 안개와 먹구름으로 가득해서 더 어두운 것 같았다.

    밝은 달빛이라도 함께했으면 좋으련만 구름이 빈틈없이 가려 버렸다.

    다행히도 이 알 수 없는 밝은 구체 덕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나뭇가지에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도 녀석의 퐁퐁거리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안나에게 전음을 보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전음 채널에 간섭이 있는 것처럼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엘라도, 라테도 없다.

    지금은 오롯이 정혁 혼자이지만 생각보다 두렵지는 않았다.

    이 녀석이 자신을 위험한 곳으로 안내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깊은 어둠 속에 있어서일까, 녀석의 빛이 마음 깊이 따뜻함을 전해 주는 것 같다.

    정혁은 암흑이 침전한 숲을 녀석의 빛에 의지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좁고 정리되지 않은 능선을 따라 걷다가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조금 위로 올라갔다가 어느 순간 주변의 나무들이 하나도 없는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현실의 헬기장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사방의 나무들이 동그랗게 원을 두르고 있고 공터 같은 이곳에만 잔풀들이 돋아 있다.

    그곳의 한가운데로 녀석이 재빠르게 나아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몇 번 퐁퐁거리며 정혁을 기다렸다.

    정혁은 주변을 살짝 경계하다가 여전히 그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정혁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녀석은 갑자기 정혁의 눈앞으로 붕 떠올랐고 구체 안에서 전처럼 조그만 두 손이 튀어나와 마치 하이파이브라도 할 것처럼 양 손바닥을 보였다.

    정혁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녀석의 손에 맞닿아 댔다.

    밝은 구체의 녀석은 손바닥이 닿자마자 폭발하듯 빛을 터트렸다.

    어둠의 공간이 갑작스럽게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정혁의 시야로 원형으로 둘러진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과 또 하나의 암살자 무리가 들어왔다.

    그들의 숫자에 정혁은 숨이 턱 막혔다.

    밝은 빛에 정혁을 일시에 노리려던 그들이 당황하며 눈을 가렸지만 오히려 코앞에서 빛을 맞이한 정혁의 시각은 괜찮았다.

    빛은 물결처럼 나무들 사이로 퍼져 나갔고 그와 동시에 강한 빛무리가 공중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빛은 다시 어둠이 잠식했다.

    물결처럼 흩어져 뿌려진 빛의 파도는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빛줄기 역시 몇 번 깜빡거리다가 사라졌다.

    옅은 바람이 볼을 스친다.

    풀벌레 소리도 없는 완벽한 정적 속에서 정혁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라테도, 엘라도 없다.

    누구도 응답하지 않는다.

    함정일까?

    날이곳으로 인도한 녀석은 무엇이었을까? 악마의 끄나풀이었을까? 검은 말 집단의 어떤 환각 마법이었을까?

    어쨌든 보기 좋게 걸려든 꼴이다.

    정혁의 허리춤에서 8개의 염구가 솟아올라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염구의 불빛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공간을 약간 밀어냈다.

    정혁의 양손에 번개와 화염이 휘몰아쳤다.

    어느새 쥐어 든 두 망치가 열렬히 빛을 발했다.

    전력이 정혁의 왼손을 타고 팔과 어깨까지 감아 올랐다.

    화염이 정혁의 오른손 가득 고여 마치 용암처럼 뚝뚝 떨어졌다.

    완벽한 정적.

    정혁은 알고 있다.

    이 정적은 균형이라는 것을.

    누군가 이 균형을 깨는 순간 공터는 곧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장 한가운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늘 그랬듯.

    정혁은 미소를 지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시작과 끝은 내가 해야지.”

    그의 염구가 사방으로 날아감과 동시에 암살 계열의 도적들과 어둠에 완벽히 몸을 숨긴 채 정혁의 주변으로 다가왔던 악마들이 각자의 무기들을 쥐고 정혁에게 달려들었다.

    ***

    동이 텄다.

    안나는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엘라는 이미 수십 번 산을 돌아다니다 다시 임시 주둔지로 돌아왔고 라테는 고개를 저을 뿐 엘라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따로 반응하지 않았다.

    김창수는 붉고 날카롭게 연마된 양날 도끼를 등에 지고 능선의 끝 절벽을 향해 나아가 저 멀리 진을 친 악마 군단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김창수만이 조금 여유로워 보였다.

    사실 다른 팀장들도 당황스러운 반응들이었다.

    간밤.

    정혁이 사라졌다.

    그와의 어떤 연락도 닿지 않는다.

    심지어 엘라와 라테마저도 두고 갔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던 정혁의 대장간마저 출입이 불가능해졌다고 했다.

    마치 그와 자신들의 계약 관계가 완벽히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다들 모여 보지.”

    김창수가 절벽 끝에서 돌아와 팀장들을 불렀다.

    그들은 중앙에 크게 놓인 전장 지도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각자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표정엔 당혹감이 여전했다.

    안나는 차가 담긴 머그컵을 들고 있으면서도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큰 한숨을 뱉으며 엘라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마도 다시 산을 뒤져 볼 생각인 것 같았다.

    라테는 엘라가 날아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그맣게 변해서 탁자를 앞에 두고 섰다.

    모두가 모였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팀장들은 안나와 김창수를 번갈아 볼 뿐 어떤 단어도 꺼내지 못했다.

    정적을 깬 것은 김창수였다.

    “예정대로 진행하겠네.”

    “하지만 사령관님, 우리로는 역부족입니다.”

    김창수의 선언에 드웨이크가 재빨리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김창수는 얼핏 공포가 서린 드웨이크의 표정을 눈치채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들의 뒤로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와 함께 김창수와 비슷한 덩치의 남자가 걸어왔다.

    그는 지휘 본부 입구를 지키는 제논의 병사들에게 제지당했지만 김창수가 힐끔 뒤를 보더니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자 지휘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신네들도 별거 없군요.”

    박달수였다.

    그는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과 자신의 키만 한 활, 그리고 짧은 양날 도끼 두 자루를 허리춤에 결속한 모습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그들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섰다.

    안나가 그의 말에 불쾌한 표정을 띄우자 박달수는 되레 쐐기를 박는 말을 꺼냈다.

    “이럴 거였으면 거두어 달라는 부탁 따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이런 도발적은 발언은 다른 팀장들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하늬안이 욱해서 등 뒤에 고정한 두 대도의 손잡이로 양손을 옮겼지만 드웨이크가 그녀에게 손을 뻗어 제지했다.

    “건방지시군요. 이게 동네 전쟁놀이로 보이십니까?”

    안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박달수에게 이야기했다.

    다만 김창수만큼은 박달수의 발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더 말해 보라는 듯이 잠자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죠. 이런 전쟁놀이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박달수가 제논의 포효하는 사자가 자수된 자신의 검은 안대로 손을 올려 위치를 몇 번 조정하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언제까지 정혁 님 혼자서만 모든 일을 해결하게 하시려는 겁니까.”

    지휘부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하늬안은 언젠가 그에게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 말라는 말을 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김창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팀장들도 유구무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룰이 뚜렷한 이 세계에서 우리가 강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모습이라면 우리가 과연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가 잠시 떠났다고 해서 그가 선포한 3일이라는 대업의 시작도 못하는 집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박달수는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번갈아 보면서 말하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창수의 눈을 보며 말했다.

    “당신네들이 쥐고 있는 그 무기, 그 장비. 그리고 출정 전에 보여 줬던 패기와 용기, 비록 상대가 우리보다 월등히 많고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이곳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 그 모든 것이 전부 정혁님 덕분이라고 한다면 우리도 그에게 ‘우리 덕분에’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사령관?”

    “…‘총사령관님’이다, 건방진 녀석아.”

    그의 물음에 김창수가 헛웃음을 뱉으며 대꾸했다.

    박달수는 옅게 웃음을 지었고 김창수 역시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안나는 잠시 눈을 감고 정혁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 보았다.

    그는 단시간에 말도 안 되게 강해졌고 그의 강함이 제논을 엄청나게 성장시켰다.

    제논은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세력들이 합쳐지고 어부지리, 자유 연맹까지 삼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보수적이던 은행나무 엘프 왕국은 제논에게 확고한 동맹국이 되었지 않은가.

    정혁만 있다면 머지않아 카탈 전체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안나에게 카탈 대륙은 굉장히 중요했다.

    이곳이 있어야지만 반대 대륙을 향한 보다 안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제논보다도 더 위의 목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왜 마지막 카드로 그를, ‘한’을 선택했는지 더불어 왜 직업을 대장장이로 했는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 속에서 결국 그녀는 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혁에게 매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목도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그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이 전투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하늬안의 목소리가 장내의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지나갔다.

    아린이 도착한 것이다.

    하늬안은 부끄러웠다.

    그 꼬맹이도 악마들 앞에서 전투에 앞장서는데 자신들은 어떠한가.

    나름 오아시스에서 힘깨나 쓴다는 양반들이 머리 맞대고 지도자의 묘연한 행방에 당황해서는 대의를 그르치려 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과 염려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얼마나 정혁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가 부끄럽게 고백된다.

    “나의 오랜 친구들.”

    김창수가 탁자에 양손을 올리며 안나를 비롯해 팀장들과 눈을 마주쳤다.

    김창수는 한 명씩 꽤 오래 눈을 마주 보며 무언의 어떤 마음을 전달했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함께 제논의 기사단을 만들고 함께 왕국 제논을 건설하며 또 함께 그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지도자와 함께 연합의 기틀을 닦아 지금까지 달려왔다네. 함께 말일세. 이게 쉬운 일인가? 혹 그대들의 마음에 우리의 위업이 지워지고 정혁의 강렬한 존재감만이 남아 있는가? 생각하고 떠올려 보게. 우리가 사력을 다해 처치했던 적들과 그 날 전장의 내음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사지에서 도망칠 때도 있었고 또 누군가를 압도하며 사자의 포효를 만방에 떨쳤던 날도 있었다네. 그런 우리의 기억들과 경험이 우리가 이끌었던 각각의 팀원들에게 전달되고 우리는 함께 힘을 닦으며 결전의 의지를 다졌지. 비록.”

    김창수의 말이 이어질수록 팀장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비쳐 보였다.

    안나는 그제야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정혁이 이곳에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비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을 입장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지도자가 자랑스러워할 모습이 되어야지 않겠는가. 나의 친우들이여. 두려워 말고 나아가세. 각자의 어깨에 서로 기대어 전장의 한가운데서 마음껏 날뛰어 보세나. 정혁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할 것일세.”

    안나는 다시 한번 그녀가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선택하고 따랐던 김창수라는 인물에게 감탄하며 그 한 모금에 차를 남김없이 비워 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