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80화 (80/200)
  • ◈80화

    밤은 금방 지나갔다.

    나무를 태우며 피어오르던 불꽃의 타닥거림이 꺼지면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아침이 찾아온다.

    사람들의 몸에서 번지는 소음이 점점 커지며 제논의 병력들의 움직임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인다.

    정혁의 까마귀가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정혁을 태우고 비상한다.

    대다수의 제논 병력들이 말을 타고 움직이고 플레이어들은 각자만의 탈 것들을 가지고 진군한다.

    아직 악마를 마주한 경험이 없는 자들이 대다수여서 그런지 아직까진 활기찬 모습이다.

    각자에게 지급된 우수한 장비와 플레이어 간의 전투가 아니라 악마와의 전투여서 그런지 대형 레이드에 참여한 것 같다는 여론이 강하다.

    이런 활기참은 제논의 병력 전체에 사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꼬박 하루를 더 걸었다.

    해가 정오를 지나 서쪽으로 기운다.

    점점 악마의 영역 즉, 아크 제국의 경계 근처로 다다를수록 불쾌한 기분과 냄새를 감출 수 없다.

    활기차던 제논의 병력들도 이런 기운들 때문인지 웃음이나 대화가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늘이 검게 물든다.

    밤의 느낌보다 불쾌한 어둠은 마음을 축축하고 답답하게 만든다.

    공기가 무겁고 딛고 서 있는 땅이 낯설다.

    질감 자체가 낯설다.

    바람에서 악마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땅마저 검게 변했다면 이제 곧 눈앞인 것이다.

    그러나 제논은 어둠을 걷으며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곧 거친 경사의 산을 만나고 계곡을 피해 능선을 따라 오른다.

    이내 정상에 올랐을 때 마주한 반대편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자유 연맹이 퇴각하긴 했지만 그곳에 남은 아크 제국의 병력들과 자유 연맹 병력들의 사라지지 않는 시체가 아직 많다.

    그리고 그 위를 거니는 악마들의 군세가 상당하다.

    흑녹색의 마나를 두른 악마들은 두서없이 모여 있거나 흩어져 있었지만 산 아래에 전선 전체를 뒤덮고 있을 만큼 많았다.

    중심부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올라가 있었는데 마름모꼴의 건축물 가운데에는 네 개의 문이 뚫려 있었고 지상에서의 접근과 출입이 불가능해 보였다.

    오직 공중으로 네 개의 문을 통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보였고 실제로 날개가 달린 악마들만 그곳으로 돌아다녔다.

    산 아래는 급격한 비탈이었다.

    정상에 길게 펼쳐진 능선을 따라 제논의 병력들은 침묵한 가운데 야영을 준비했다.

    정혁은 까마귀를 타고 어둠을 따라 능선 위를 비행했다.

    동시에 공한 악마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추가적인 침공은 없어 보이는군.”

    라테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혁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미 상당한 양이긴 하지만 마계와 오아시스를 잇는 차원 문이 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물량 공세의 위협은 배제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수세에 몰리면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지만 뒤늦게 차원 문을 열려고 시도해 봤자 금세 알아차리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급 악마는 있겠지?”

    “아마도. 그러나 둘 이상은 아닐 것일세.”

    “왜?”

    “마계의 군주들은 신의 금제에서 해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드디어 금제가 풀렸다면 어떨 것 같나?”

    “그놈들 특성상 지들 멋대로 날뛰겠지.”

    라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제로니막스를 소멸시켰을 때 불길한 기운이 자네에게 엄습함을 느꼈다네. 아무래도 악마 군주를 둘이나 그 자리에서 소멸시켰으니 마계에서도 자네를 위험인물 혹은 반드시 처단해야 할 인물로 낙인찍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고 해서 군주들이 자네 하나를 잡기 위해 총출동할까? 그들에게 전우애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네. 각자 끔찍이도 긴 기다림의 달콤한 보상을 위해 날뛰고 있을 거야. 그런 원대한 꿈의 무대가 상대적으로 작은 카탈 대륙에서 이뤄질 리 없지 않은가?”

    정혁은 라테의 말에 충분히 동의가 되었다.

    마계에도 분명 지도자가 있다고 들었다.

    악마왕이라고 했던가? 군주들의 여러 악들을 전부 지니고 있다는 그는 군주들이 망나니이면 망나니일수록 추측컨대 그 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놈에게 정혁은 단순한 유흥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정혁에겐 아직까진 악마왕을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다.

    사실 제로니막스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지 못했었다.

    겨우겨우 라테와 엘라의 에고 무기화를 통해 그 능력으로 소멸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다만.”

    “다만?”

    “아마도 내 생각엔 호전적인 군주가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네. 자네에게 흥미를 느낀 자가 말이야.”

    “힘 겨루기를 하고 싶은 놈이 있다는 거지?”

    “그렇지.”

    라테는 불타는 눈동자로 저편의 악마들을 바라보았다.

    정혁은 고삐를 당겨 까마귀를 능선 아래로 몰았다.

    까마귀는 바람을 일으키며 산 위에 앉았고 정혁은 재빨리 까마귀의 등 위에서 내렸다.

    그는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부르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그의 말과 함께 까마귀는 검은 눈동자를 잠시 굴리다가 곧바로 날아올랐다.

    까마귀가 떠나자 김창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막상 코앞에 오고 나니 병력들도 조금은 긴장한 모양일세.”

    “그게 정상이겠죠?”

    “적당한 긴장은 몸을 데우는 데 도움이 되지. 효율적인 전술과 유연한 동작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둘은 천천히 안나와 팀장들이 마련한 야영지 텐트를 향해 걸었다.

    주변에선 여기저기 병력들이 각자의 야영지를 마련 중이었다.

    전날 저녁과 같은 흥겨운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상기된 표정도 없고 피워 놓은 모닥불의 불길마저 차갑고 어두워 보인다.

    걱정과 염려는 사람의 행동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야 했을 때에 국한된다.

    이곳은 전쟁터이고 우리는 그들을 사지로 내몰 것이다.

    각자의 이유로 싸우지만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떠밀려 지는 것이다.

    잘 훈련된 시간들과 몇 배의 힘을 내 줄 무기와 방어구가 함께 있는 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걱정과 염려는 기대와 환희가 되어 내일 빛을 발할 것이 분명하다.

    팀장들과 안나는 마법으로 구현한 전장의 상세도를 보며 각자 위치와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

    정혁이 선포한 탓에 무조건 3일 내에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미 정찰 팀이 안나에게 상대 진영의 특이사항을 보고했고 안나는 이를 브리핑하면서 굳은 표정으로 회의를 주관했다.

    김창수도 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석했다.

    정혁은 그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진 않았다.

    회의가 끝나 갈 무렵 안나가 정혁을 힐끔 보았다.

    그러곤 그의 방관적인 태도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던졌다.

    “저기, 마스터님? 궁금하시거나 알고 싶은 점 없으신가요?”

    정혁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커피를 마시려다 놀라서 잔을 내리고 쏟아진 시선들에 민망해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안나의 못마땅한 표정에 난관에 부딪친 것처럼 난감해 하던 정혁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가, 강한 놈은?”

    그의 질문에 안나가 고개를 저으면서 큰 숨을 들이 쉰 후에 대답했다.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드웨이크 팀장의 레이드 팀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상대방 진영의 모든 악마들이 따르는 군주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내가 맡을게.”

    “당연하지요!”

    오히려 안나가 역정을 냈다.

    ‘아니, 그래도 그렇게 딱 잘라 당연하다고 해 버리면….’

    “잘 들어요. 마스터는 우리의 전략 같은 거 무시하고 힘 대 힘의 싸움으로 승기를 잡으려고 하겠지만 지난 ‘측면 돌파 전쟁’의 상황으로 봤을 때 마스터의 싸움으로 비롯된 희생도 적지 않아요. 우린 피해를 최소화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스터는 최대한 놈을 붙들고 전장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하기야 그때는 정말 난장판 그 자체였다.

    아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당시 지상에 있던 병력들은 정혁에게 그렇게 중요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혁도 그런 희생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며 전투를 지속적으로 이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카탈 대륙을 통일하는 데 최소한의 비용이 들어야 한다.

    이 비용절감에는 병력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은행나무 엘프와의 협공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안나의 말에 의하면 내일 전쟁이 시작되면 아린의 병력도 우리 진형의 동쪽에서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적들의 우회로를 막으며 양쪽에서 밀어붙여 대륙의 북쪽 해안까지 놈들을 압박할 작정인 것이다.

    걱정되는 주요 적들은 팀장과 김창수가 맡는다.

    가장 핵심이 되는 군주는 정혁이 맡는다.

    나머지 악마 잔챙이들은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과 제논의 병력들 그리고 아린의 선조들이 수월하게 정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정혁은 안나의 장황한 부가 설명을 들으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진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펼쳐진 자신의 숙소형 텐트를 향해 걸어갔다.

    사실 정혁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특히 이번 경험에 있어서는 정혁에겐 낯선 상황이서 그런지 몰라도 더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제논의 지도자이자 길드의 마스터가 되고서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는 이들과 함께 나서는 첫 대형 전쟁이다.

    ‘한’이었을 때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겪고 있다 보니 정혁은 독고다이 기질이 올라와 다 귀찮아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려 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심장이 쿡쿡 쑤시듯 불편해지기도 했다.

    걸어오면서 라테가 이야기해 줬던,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친히 카탈에 침공해 주신 그 이름 모를 군주를 빨리 만나고 싶다.

    놈과 부딪친다면 잡다한 생각은 없어질 텐데 말이다.

    숙소형 텐트 앞에 모닥불을 지펴 놓고 정혁은 조금 떨어진 곳에 여전히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팀장들과 안나, 그리고 김창수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발목 쪽에서 무언가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시 줄기에 바지 깃이라도 걸렸나 싶어서 내려다본 곳에는 의외의 것이 있었다.

    그건 밝고 동그란 구체였다.

    그 밝고 동그란 구체는 정혁의 두 주먹을 합친 것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작은 크기 안에서 손 같은 것이 나와 정혁의 바지 깃을 몇 번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근처에 엘라도, 라테도 없어서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위협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 보였다.

    정혁은 정체 모를 구체가 자신을 어느 방향으로 당기고 있는지 가만히 느껴 보았다.

    역시 녀석은 일정한 힘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바지 깃을 당기고 있었다.

    정혁은 잠시 아래와 팀장 일행을 번갈아 보다가 녀석이 당기는 방향으로 한 발 내디뎌 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작게 두 번 퐁퐁 뛰며 반응하더니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다시 같은 방향으로 똑같이 바지 깃을 당겼다.

    “뭐야.”

    정혁은 재밌다는 얼굴로, 녀석이 당기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짙은 어둠이 깔린 숲속 방향이었다.

    정혁이 걸음을 옮기자 녀석은 바지 깃에서 손을 놓고 정혁을 인도하듯이 앞서 나아갔다.

    정혁은 녀석을 따라 깊은 숲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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