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79화 (79/200)
  • ◈79화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플레이어들과 여러 종족들이 함께 하나의 절대 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만큼 그들의 진군과 걸음엔 자부심과 활력이 넘쳤다.

    다른 국가 간의 마찰로 빚어진 전쟁과는 목적 자체가 다르다.

    불필요한 피 흘림이 아니라 세계를 위한 피 흘림이라는 명분이 있고, 또한 악마 군주를 단신으로 둘이나 쓰러트린 지휘관과 함께하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앞길에 거침이 없었다.

    북쪽으로 향하는 길 빼곡히 제논의 병력들이 들어찼다.

    각 팀별로 다른 색의 망토를 두르고 있다.

    선두에는 김창수와 팀장 일행이 앞장서고 있으며 제일 후방에 박달수의 치안대가 따라 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혁은 까마귀 위에 올라타 있다.

    차원 문을 통해 부유성으로 오면서 아린이 한 마리 빌려주겠노라 했었는데 부유성에 도착하고 며칠을 보내는 동안 정혁의 명패를 목에 건 거대한 까마귀가 도착했다.

    다른 까마귀들보다 월등히 크고 힘 있어 보였다.

    프로 탈것 방치러(?)였던 정혁은 이번만큼은 꼭 까마귀를 잘 챙겨 다니겠다고 다짐했다.

    까마귀를 잃어버렸을 때 빗발칠 은행나무 엘프들의 욕설 없는 비난의 표정들이 떠올라서 몸서리쳤던 그였다.

    북쪽 자유 연맹과 아크 제국이 싸우던 전장까지 지금 진군 속도로는 이틀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것이다.

    3일째 되는 날 초입에 도착하면 임시 주둔지를 세우고 전열을 가다듬어 다음 날부터 전투를 시작하게 되겠지.

    데릭에게 호기롭게 3일이라고 단언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어 내야 한다.

    한편으로 내심 그가 긍정적으로 추측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카탈 대륙에 침공한 마계의 악마들은 그렇게 강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대륙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리 아크 제국으로 인해 반대쪽 대륙보다 기반이 잘 닦여 있다고 할지라도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기를 좋아하는 그들의 특성상 셀 수도 없는 시간 금제로 묶여 있던 제약이 풀린 순간에 끓어오르는 투기를 이 작은 대륙에 전부 다 쏟아 부었을 리가 없다.

    ‘녀석들은 이곳을 별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테지.’

    문득 정혁은 제로니막스가 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불길한 상태 창의 알림을 다시 떠올렸다.

    “마계에서 나를 주목한다라.”

    귓가를 스쳐 지나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면서 정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엘라가 불쑥 그의 곁에 다가와 물었다.

    “쫄았어?”

    정혁은 이제 이런 식의 깝죽거림에 이골이 났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엘라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젠트라는 이제 잊었나 봐?”

    번쩍.

    정혁은 갑자기 쑥 들어온 이 오랜 여정의 시작과 관련된 단어에 정신이 들어 엘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맞다!”

    엘라를 만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때와 지금은 상황도, 입장도 많이 바뀌었지만 사실 정혁이 그렸던 젠트라로부터 출발한 계획이 실현만 된다면 전쟁이고 자시고 거리낄 것 없이 두 대륙 전체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다.

    이전에 라테에게 들었던 과거 이야기를 통해 유추해 봤을 때 젠트라의 힘은 가히 추측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모든 용 군단의 시초가 되는 고대룡 젠트라를 꼭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분명 토큰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젠트라의 콧바람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건지.

    애초에 엘라를 만나게 된 것도 젠트라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였는데 말이다.

    정혁은 하마터면 까마귀 위에서 중심을 잃을 뻔했다.

    엘라는 이제야 재밌어졌다는 듯이 웃으면서 정혁의 주변을 놀리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 불쑥 라테 역시 대장간에서 튀어나와 한마디 거들었다.

    “젠트라를 찾고 있나?”

    ‘아니, 이 양반들이 진짜.’

    정혁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엘라 한 번, 라테 한 번 번갈아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나도 못 만난 지 꽤 되었다만, 나조차 모르는 것을 나무때…엘라, 당신이 알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라테가 재빨리 엘라를 굉장히 불쾌하게 할 뻔한 단어를 바꾸면서 말했다.

    엘라는 빙글 돌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듯 멈춰 서서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라테를 노려보다가 마치 공중에 침대라도 펼쳐 놓은 것처럼 팔베개를 하고 누운 자세로 정혁을 여유롭게 쳐다보았다.

    “뭐, 나는 그렇게 급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얄밉다.

    정말 상당히 얄밉다.

    정혁은 얄미운 데 한도가 있다면 저 녀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도 초과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그나마 여유 있을 때 좀 알려 줘 봐.”

    정혁이 화를 꾹 참으며 엘라에게 물었다.

    엘라는 누운 자세로 손가락을 까닥거렸고 정혁은 알겠다는 듯이 소중히 품에 보관하고 있던 토큰을 꺼내 던졌다.

    “내가 젠트라, 그 양반과 인연이 있는 이유가 이 토큰, 초대장 덕분이지.”

    엘라는 은행나무 재질의 토큰을 몇 번 돌리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 젠트라의 초대장은 이 시대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정혁이 ‘한’이었을 때 남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한참을 찾아다녔었지만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만큼 귀한 물건이자 전설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실마리를 가진 물건이기도 하다.

    고대룡 젠트라의 초대장은 대전쟁이 벌어지기 훨씬 전.

    용 군단이 아직 오아시스의 세계에 관여하고 있었던 그 시절에 오아시스 전체는 마계와 천계의 침공과 전쟁으로 시끄러웠다.

    당시 오아시스라는 본연의 영토권을 주장하지 못했던 오아시스의 종족들은 연합하여 마계와 천계에 대항했고 결국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감복한 젠트라가 전쟁의 일선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종족 대표 영웅들을 초대하기 위해 만든 초대장이 바로 ‘고대룡 젠트라의 초대장’이다.

    젠트라는 당시 자아조차 없었던 그저, 은행나무인 엘라를 찾아가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조금 나눠 주는 대가로 초대장을 만들 조각들을 얻어 갔다고 한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라서 마계와 천계의 대격전을 그려 낸 책은 이제 거의 볼 수도 없고 이를 노래하는 음유시인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대룡 젠트라의 초대장만큼은 전설을 실제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진실의 조각이라는 믿기지 않는 소문으로 세계를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하나야.”

    엘라가 초대장을 손바닥에 얹어 놓으며 말했다.

    “내가 알지. 내 피부와 같은 것이니까. 강력한 유지 마법이 걸려 있고 젠트라의 각인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가 아니면 파괴할 수 없지만 그를 만나게 되면 자연히 소멸되고 말아.”

    이제까지 엘라가 떠들어 댄 여러 이야기들은 정혁도 넘겨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다.

    정혁이 진짜 알고 싶은 건 그것이 아니라 젠트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이다.

    정혁이 젠트라의 초대장의 소유권자가 되었을 때 분명 젠트라가 그를 만나고 싶다고 했으며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오히려 정혁이 젠트라를 찾아다니고 있을 뿐 그가 정혁을 만나고 싶어서 어떤 신호를 보내거나 기회를 주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정혁이 두문불출 엘라도 찾고 자신의 힘을 기르고 막연히 카탈보다는 반대쪽 대륙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에 더 강해져서 그곳에 진출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돌아간다 해도 결국 정혁의 여정은 젠트라를 만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야만 ‘신’을 다시 만나 한바탕 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더불어 용의 가호를 받고 있는 랭커들을 만나도 어깨를 펼 수 있을 테고, 자신도 대장장이로 랭킹 1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론만 이야기하면?”

    정혁의 말에 엘라는 다시 토큰을 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뭐, 나도 잘 몰라. 그가 어디 처박혀 있는지. 너어어어무 오래 됐고, 너어어어무 긴 시간을 침묵해 왔으니까.”

    정혁은 혈압이 뒤통수를 타고 치솟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라테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엘라는 약하게 살기가 돌고 있는 정혁을 보며 손가락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너 말 잘해, 진짜.”

    “네가 불의 정령왕, 저 양반을 에고 장비로 귀속시켰을 때. 젠트라의 초대장에서 작은 파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어. 왜일까? 왜일 것 같아?”

    라테를 에고 장비로 만들었을 때 젠트라의 초대장에서 반응이 있었다? 정혁은 그때를 회상해 보며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음을 되새겨 보고 엘라에게 되물었다.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사실을 어떻게 안 거야?”

    “말했잖아. 그 초대장은 내 피부와 같다니까. 외부에 떨어져 있는 피부 조각이 울리는 것이니 나에게는 꽤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어서 단박에 그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어. 젠트라가 사용하는 마나는 황금빛. 아이러니하게도 네가 사용하는 마나와 같지.”

    “시간의 주관자가 사용하는 마나.”

    “그래, 젠트라는 신이 처음 만든 용. 그리고 그를 통해서 갈라진 다섯 용들은 그들만의 원소를 가지고 군단을 만들었어. 젠트라는 그들보다 늘 뛰어났는데 그가 무슨 힘을 가졌길래 정령왕들과 필적하고 마계의 악마왕이나 천계의 대천사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겠냐고. 그는 시간을 관리하는 존재야. 그렇기에 늘 모든 문제에서 한 걸음 뒤에 물러서 방관의 입장을 취했지.”

    ‘이건 좀 충격적인 이야기 인데. 그가 가진 이 독특한 마나가, 그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시간의 주관자가 결국 젠트라였다니. 우연일까? 이걸 우연이라고 여겨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본인이 직접 나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젠트라는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오아시스의 고난을 훌륭하게 이겨 내 준 당시의 위대한 영웅들에게 감사하여 초대장을 제작했고 긴 시간이 흘러 아직 남아 있던 마지막 초대장을 우연히 네가 찾아내게 된 거지.”

    “비슷한 얘기 계속 하지 말고 조금 더 괜찮은 소스 없어?”

    정혁의 말에 엘라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쉽게도 더 알려 줄 만한 것은 없지만… 그냥 내 추측을 전해 주자면.”

    정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젠트라는 일정 조건이 달성되기 전까지 너를 만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너에게 어떤 조건이 매겨져 있단 느낌이 강하게 들어. 라테를 에고 장비로 만들었을 때의 울림은 그것에 대한 어떤 증거 같고. 젠트라는 이미 이후의 모든 미래도 알고 있을지 몰라. 그가 주관하는 것은 시간 자체니까.”

    “…그건 좀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한데.”

    정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래까지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가 짜 놓은 판 위에 정혁이 하나의 말로 움직이는 거라면 썩 유쾌하지는 않다.

    뭐, 다른 대안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문득 만들 수 있는 에고 장비의 개수가 제한적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남은 자리는 세 자리.

    ‘혹 이 모든 자리가 채워지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뜻인가?’

    아니, 애초에 젠트라는 그를 만나고자 했던 것일까?

    그래서 자신이 강철망치 대장간에 이 몸으로 떨어지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와 신은 무슨 관계인가?

    정혁은 최근 들어 자신을 괴롭히는 꿈과 벌어진 여러 상황들, 그리고 안나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상기시키며 어쩌면 자신이 오아시스 전체에 벌어질 어떤 사건의 핵심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연이라고 단순히 치부해 버리기엔 이미 선을 세게 넘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해가 지고 있다.

    김창수가 근처의 넓은 들판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많은 행렬들도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오늘은 이 들판에서 야영을 할 것 같다.

    정혁은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내려 앉아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

    필요하면 녀석은 되돌아올 것이다.

    그는 산개하는 병력들을 내려다보며 인벤토리에서 야전 세트를 꺼내 작은 숙소를 펼쳐 설치했다.

    설치된 숙소형 텐트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정혁은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엘라가 대장간으로 들어간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몇 번 저었다.

    당장에 결론이 나오지 않는 것에 괜히 체력 낭비하지 않는다.

    일단 정혁은 당장의 피로를 조금 풀고 싶어서 숙소형 텐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