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78화 (78/200)

◈78화

무너져 가는 돌다리를 건너던 데릭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다리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분노로 떨리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그리곤 결국 안경을 거칠게 벗어 집어 던졌다.

늘 중립적이며 평온한 모습을 보였던 데릭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어깨의 들썩거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데릭의 반응에 동요를 느끼고 있는 의원들을 보며 잭슨이 조용히 데릭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고정하시죠, 의장님.”

그러나 데릭의 요동치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못했다.

아직 자유 연맹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카탈뿐 아니라 반대쪽 대륙까지 진출할 셈으로 분할한 잔여 세력들이 남아 있다.

실제로 그들은 주요 도시를 기점으로 다시 밀집되고 있으며 이는 마계의 악마 침공으로 혼란스러워진 반대쪽 대륙의 분위기에 힘입어 신흥 세력으로 잘 정착해 가고 있다.

그쪽에서 이쪽으로 차원 문을 열어 이동한 뒤 세를 다시 넓히고 규합해 카탈로 넘어올 수만 있다면 빈틈을 공략해 제논을 무너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는데.

“…3일밖에 걸리지 않아?”

데릭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뻔뻔하다.

뻔뻔하기 짝이 없다.

아크 제국의 영토가 작은 것도 아닌데 그 넓은 땅을 수복하는데, 심지어 악마들이 침공한 땅인데, 겨우 3일을 당당히 외치다니 말이다.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데릭은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질 만큼 정혁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절대 믿을 수 없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신뢰가 갔다.

그들이라면 정말 3일 만에 카탈 전체를 제논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다음 시야는 당연히 겨우 활로를 열고 있는 자유 연맹의 잔여 세력이 디딘 땅, 그곳이 될 것이다.

애초에 많은 세력들이 자유 연맹을 이탈해 제논으로 향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지원하고 도왔던 자들이 순식간에 배신한 것이다.

그들이 제논에서 누리고 있는 호사와 혜택은 상당하다.

제논에는 자신보다 더 훌륭한 책사, 안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유 연맹보다 훨씬 가능성 있는 제논을 그곳에서 홍보하고 나선다면 보수 세력 대부분이 크게 손실된 지금의 자유 연맹은 결국 재기의 함성도 질러 보지 못하고 산화될 것이다.

방법? 모르겠다.

데릭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잭슨 사령관님.”

데릭이 작은 목소리로 잭슨을 불렀고 주변을 살피던 잭슨이 눈을 돌려 데릭을 바라보았다.

“예, 의장님.”

“그들이 말한 3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잭슨은 가만히 데릭의 뒷모습을 보다가 한탄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렇지요.”

데릭의 목소리엔 이제 완전히 힘이 빠졌다.

잭슨은 그곳에 모인 제논의 병력들에게 쥐어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장비들을 보며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팀장급의 지도자들은 모두 화속성의 전설급 무기들을 장비하고 있었으며 말단의 병사들이나 플레이어들의 방어구와 장비 수준도 상당했다.

이건 제논의 재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며 동시에 정혁이라는 인물이 가진 칭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이 본 일부의 제논 병력들만 이런 장비를 쥐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정말 만약 제논의 모든 군대의 병사들이 상위급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다면 제논은 카탈,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바다를 건너 거대한 대륙으로 향할 것이다.

카탈에서 악마를 몰아낸 신생 연합 제논, 대륙을 통일하고 무수한 물자들이 자유로이 거래되며 이 물자들을 흡수해 엄청난 장비를 제공하는 경제 호황 상태의 연합 제논.

이 타이틀 앞에 혹하지 않을 플레이어도, 상단도, 세력이나 집단도 없다.

더불어 수십 년간 기록에도 없고 찾아보지도 못했던 에고 장비를 둘이나 소유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그 에고 장비의 ‘에고’가 세계에 없었던 자아가 아닌 마치 소환수 개념의 에고 장비라는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닌 연합의 지도자, 길드 마스터 정혁의 이름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도 없다.

“잭슨 사령관님.”

“예, 의장님.”

생각에 잠겼던 잭슨이 달라진 데릭의 목소리를 느끼며 대답했다.

“…자유 연맹을 포기합시다.”

“예? 다시 말씀을….”

“우리는 타이런의 삼국에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잭슨이 당황한 얼굴로 데릭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표정에선 굳건한 결단이 비쳐 보였다.

***

오랜만에 정혁은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논의 병력들이 온전히 부유성으로 진격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 숙련도를 올렸고 결국 바깥 시간 기준 일주일여 만에 마지막으로 200레벨을 달성했다.

이제 더 이상 카운터 될 수치도 없거니와 아쉽게도 200레벨이 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던 칭호와 관련된 시스템의 상태 알림도 없었다.

조는 대장간에서 제논을 통해 전달받은 다양한 재료들을 이용해 각종 방어구와 장비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냈다.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또 이곳은 시간의 개념을 달리하는 이공간의 대장간이기 때문에 지침이 없이 본인의 의지로 수도 없이 많은 물량의 장비와 방어구를 만들고 쌓아 놓을 수 있었다.

정혁의 숙련도가 증가함에 따라 대장간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고 대장 용품들의 퀄리티와 장비 제작에 관련된 부가 스탯 확정치도 급증했다.

그런 덕분에 거의 대부분의 장비들은 레어급 이상으로 제작되어 제논의 플레이어들은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경매장에서 침만 흘리고 있었을 방어구와 장비들을 무료로 풀 세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정혁의 힘이 깃든 장비는 정혁의 의지에 의해 본연의 재료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제약이었으며 이는 그들이 제논에 충성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완벽히 그의 추측대로 흘러간 것이다.

한번 엄청난 힘을 맛본 플레이어들과 제논의 여러 세력들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고 자신의 힘이 강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정상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은 정혁이라는 존재앞에 경외감을 드러냈다.

정혁은 어쩌면 제논의 모든 민중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정혁은 묵묵히 200레벨이 넘었음에도 자신의 숙련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혁이 제로니막스와 안트로이아라는 두 악마 군주를 소멸시켰을 때 그는 대장장이라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스태프와 건틀릿을 사용해 전혀 밀리지 않는 전투력을 보여 주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한계가 없어 보이는 자신의 대장 기술 숙련도 덕분이었다.

대장 기술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정혁은 마치 올스탯이 상승하는 것 같은 느낌의 강함이 천천히 올라왔다.

이는 단순히 신체적 강함이라기보다 장비와 방어구, 그리고 각종 연마 재료, 천연 재료들의 이해도가 상식 밖의 선까지 올라가는 수준이었고 이 이해도는 곧 정혁의 머리에서 사용 방법에 대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공식으로 해석되었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 이외에 ‘자연의 수호자’와 ‘염제’라는 칭호의 힘, 그리고 채광 모드 활성화를 통한 신체 능력의 향상은 이런 이해도와 접합되어 가공할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날 경험했듯 결국 대장장이의 특성상 에고 무기를 쥐고 싸우기엔 애초에 신체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한된 시간에 폭발적인 데미지를 우겨넣기 위해서 더 깊은 이해와 효과적인 사용 방법을 체득하려면 숙련도의 상승 말고는 당장에 해답은 없을 것이다.

이제 좀 나오라는 엘라의 재촉과 함께 대장간에서 나온 정혁은 부유성 광장에 모인 수많은 제논의 병력들을 발견하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가 나온 장소는 무너진 부유성 본채의 최상층 제논의 다섯 팀장과 사령관, 그리고 안나가 그를 맞이했고 그의 등장과 함께 엄청난 함성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울렸다.

저 아래 수많은 군사들이 치켜든 포효하는 사자상의 깃발은 푸른색으로 펄럭이며 마치 파란 바다의 물결처럼 파도쳤다.

정혁은 앞에 마련된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군사들 앞에 당당히 섰다.

그는 잠시 ‘한’이었을 때를 떠올렸다.

뒤틀어진 생각과 고약한 성격에 얼룩진 오아시스의 최고이자 최악이었던 플레이어.

그 모습이었던 자신.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것만이 게임을 게임답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던 교만한 과거.

언제나 혼자였고, 혼자였기에 자신에게 혹독했던, 그리고 한없이 외로웠던 기억들.

그러나 지금은 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주변의 도움으로, 강철 망치의 대장간에서 깨어나 결국 절망 속에 죽을 것 같았던 자신이 지도자로 우뚝 서 있다.

정혁은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안나는 푸르고 긴 망토를 들고 있다가 정혁의 등에 걸쳐 주었다.

황금 사자가 강렬하게 포효하고 있다.

정혁은 양쪽 어깨에 망토를 결속하고 다섯 팀장과 사령관 그리고 안나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드, 들리나?”

정혁의 이름과 환호가 뒤섞여 폭발적으로 흔들리던 광장의 기운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안나는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고 김창수 역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늬안은 속으로 키득대며 소리 없이 웃어 댔다.

아래의 모든 군사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정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지만….”

정혁은 말끝을 흐리다 큰 숨을 들이쉬더니 자세를 고쳐 잡고 당당히 선포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우리는 이제 오아시스의 역사에 첫 도장을 찍는 위대한 걸음을 시작한다! 카탈을 통일하는 첫 번째 세력이 될 것이며 더불어 악마의 침공을 완전히 몰아낸 최강의 연합이 될 것이다! 그 역사의 중심에 그대들이 있다! 나를 위해 싸우지 마라! 제논을 위해 싸우지도 마라! 그건 위선일 뿐이다! 너희 스스로를 위해 싸워라! 싸워서 이기고 대가를 쟁취하라! 이 땅, 이 역사에 너희의 이름을 새겨라! 사력을 다해 자신을 지키고 여유가 된다면 주변을 도와라! 그리하며 결국 카탈의 북쪽 끝에 우리의 사자기가 나부끼는 순간 우리는 더 큰 대륙을 향해 또 한 번 도약할 것이다!”

정혁은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다만 나는! 제일 처음으로 적진에 들어가 제일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결국 반드시 너희와 함께 승리할 것이다! 제논은 반드시 승리한다! 함께하자! 함께 역사에 우리를 기록하자!”

정혁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곁에 있던 라테가 광장 외곽으로 날아가 자신의 몸을 본래의 상태로 거대하게 키운 뒤 굉음을 토해 내며 화염을 솟구쳐 올렸다.

마치 전쟁의 신호탄 같았다.

그의 포효와 함께 다시 광장은 군사들의 환호와 패기로 가득 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