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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77화 (77/200)

◈77화

그날 밤.

정혁은 다시 한번 꿈을 꾸었다.

‘한’은 꿈에서 또 한 번 정혁을 압박한다.

숨이 막혀 왔다.

저번보다 더욱 강렬한 생동감에 정혁은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한’의 맹렬한 기세에 눌려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가슴팍 앞까지 다가왔던 악몽의 비수가 살갗을 뚫고 가슴 안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붉은 피가 악몽의 비수 날을 타고 손잡이를 지나 ‘한’의 손목 끝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정혁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한’의 웃음은 잔인하고 살벌했다.

그 순간 이마 한가운데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마음을 채우는 따스함에 정혁은 고통을 잊으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몸부림치던 전신이 축 처지면서 눈앞의 ‘한’도 어떤 것도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잠식되어 의식조차 사라지는 것 같았다.

***

라테는 정혁이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신음 소리와 몸부림이 심해지자 천천히 다가가서 이마에 손가락을 댔다.

붉은 기운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이마로 흡수되었다.

라테는 가만히 자신의 힘을 그에게 주입했고 발작에 가까웠던 정혁의 몸부림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라테는 정혁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다시 자신이 앉아 있었던 낡은 나무 의자로 돌아왔다.

엘라는 라테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말에 라테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네.”

“천하의 정령왕도 알 수 없는 게 있나 보지?”

“비꼬지 마시게, 이건 이 세계 누구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일일세.”

라테의 말투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엘라는 평온히 잠들어 있는 정혁의 얼굴을 보았다.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애잔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그 기분이 약간 불쾌하다 느껴서 고개를 저으며 털어 냈다.

그러곤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보름달을 눈에 담았다.

달은 말끔하고 깨끗한 은쟁반 같았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그녀가 서 있는 반쯤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가 라테의 따뜻한 기운과 맞닿아 공중으로 솟구친다.

“안타깝지.”

라테의 말에 엘라는 자칫 ‘그러게’라고 동의할 뻔했다.

그녀는 곧 코웃음 치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불필요한 동정이야.”

“왜?”

엘라는 라테를 보았다.

라테의 타오르는 눈동자 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가 담겨 있다.

그의 공허는 어디서 출발 한 것일까? 하긴, 그래, 알 것도 같다.

엘라는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존재의 출발 자체가 다르니까.”

“그런가? 이곳에서 우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말이지.”

“…그래. 결국 이곳에서일 뿐이잖아?”

엘라의 입에 작게 지어진 미소가 쓰다.

라테는 가슴에서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박동과 그것을 감싼 가이아의 기운을 느끼면서 잠시 혼란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

아침 해가 떠오르고 새벽녘에 잠에서 깬 정혁은 이미 모든 채비를 끝낸 채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간밤에 엘라가 서 있었던 창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제논의 병력들을 바라보았다.

저쪽 구석에는 제논의 병력들보다 조금 피곤해 보이고 여기저기 상한 곳이 보이는 다른 병력들이 모여 있다.

그들 중심에 박달수가 있었다.

박달수는 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결국 치안대를 흡수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당장에 껄끄러움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박달수도 오아시스에서 네임드에 속하고 그의 병력들은 믿을 만하다.

더불어 과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김창수와 박달수의 명품 콤비 모습을 전장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잡생각에 빠져 있던 정혁이 조금 멀리서 다가오는 여러 무리들을 발견하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에 시야가 잠시 뿌옇게 변했다가 명확해지면서 곧 정혁은 그들이 자유 연맹의 남은 기둥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유 연맹의 붕괴는 어제 정혁의 쐐기로 인해서 확실시되었을 것이다.

자유에는 여러 이면이 있다.

그중에 제일은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게임이기에 게임을 즐기는 데 있어서 개인의 자유는 상당히 중요하다.

사회만큼의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자유 연맹은 집단의 이름답게 이런 자유 안에서 여러 세력들의 결속력을 유지해 왔다.

아니, 그렇게 믿었었다.

데릭은 연결 고리를 단단히 다져 왔다고 생각했던 데릭이었겠지만 자유 연맹은 말 그대로 자유라는 이름 아래 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어쩌면 오아시스 속에 존재하는 상당히 많은 집단이 왕국이나 제국같은 엄격한 규칙과 강력한 지도자가 집권하는 집단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그 편이 더 안정적이고 더 유리할 거라는 생각 때문일까?

그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데릭과 잭슨, 그리고 남은 여러 의회 위원들이다.

그들의 표정에서 어떤 의지가 보인다.

정혁은 그들의 의지가 제논의 의지와 같은 노선을 따라가지 않을 거라는 느낌을 받는다.

정혁은 들고 있던 찻잔을 부서진 원형 테이블 한쪽에 떨어지지 않게 아슬아슬 내려놓고 어깨를 몇 번 털며 비명을 지르는 나무 계단을 하나씩 밟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늬안이 그를 찾아 올라오려다 내려오는 정혁을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그녀는 곧 바깥에 누가 찾아왔는지 알려 주려는 듯 했으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정혁을 보고 함구했다.

하늬안은 정혁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정혁이 문밖으로 나오자 제논과 자유 연맹 그리고 박달수의 치안대 사이의 껄끄러운 기류가 피부로 와닿았다.

데릭만이 간단히 정혁에게 고개를 숙였고 잭슨은 여전히 박달수와 치안대를 바라보며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표했다.

일전의 기사단장도 상당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가뜩이나 짙은 눈썹을 한껏 구기며 서 있었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덩달아 불편해진 정혁이 데릭의 인사에 화답하며 재빨리 화두를 꺼냈다.

그러자 잭슨의 시선도 정혁에게로 향했다.

고울 리 없는 시선이 정혁에게 꽂힌다.

이미 익숙한 시선이라 별다른 타격은 없다만 조금 건방지다는 생각은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든다.

데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저희 자유 연맹은….”

데릭이 말끝을 흐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데릭을 따라 온 몇몇의 위원들과 잭슨 총사령관, 그리고 기사단장 산쵸는 여전히 정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서 있었다.

확고한 의지의 표현 같았다.

데릭 역시 큰 숨을 들이마시며 굳건히 말을 이었다.

“제논과 함께하지 않겠습니다.”

안나는 데릭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약간의 조소가 섞인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

“자꾸, 연맹, 연맹 하는데, 그 뭐 있긴 한 거예요? 연맹이란 게?”

제논의 병력들 사이에서 약간의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데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더불어 우리는 카탈 대륙에서의 모든 이권을 포기합니다. 이곳에서 물러나 반대쪽 대륙의 잔여 세력을 규합할 겁니다.”

그래, 예상했었다.

데릭은 멍청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작은 카탈 대륙에만 자유 연맹의 모든 것이 심어졌을 리 없다.

분명 더 넓은 반대 대륙에도 자유 연맹의 조각들이 심겨져 있겠지.

어쩌면 그곳의 조각들이 더 단단히 결집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곳이 훨씬 이들에게 척박하고 험난했을 테니.

‘그러나 내가 지금 이곳에서 이들을 고이 보내 줄 이유가 있을까?’

정혁은 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눈을 감고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보았다.

데릭의 이런 행동은 두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도발이다.

이건 좀 어리석다고 생각이 드는데 어제 한 대 맞은 곳이 너무나 억울해서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대는 때리고 가겠다는 심산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냥 빠르게 대륙을 빠져나가도 제논의 입장에서 달라질 건 없다.

어차피 악마들의 침공을 몰아내는 데 잔여 자유 연맹의 힘을 기대하진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혁 앞에서 우리는 우리대로 살길을 도모하겠다고 하는 건 어제 기세 좋게 밀어 붙였던 자유 연맹이 네놈이 생각하는 것만큼 하찮지 않다는 데릭의 조잡한 자존심 세우기 같아 보인다.

두 번째로는 홍보다.

대다수의 제논 병력들이 밀집한 이곳에서 야반도주보다는 독자 노선 선포를 선택한 이들이 얻을 수 있는 건 ‘입소문’이다.

자유 연맹의 의회 위원들과 의장은 제논으로의 흡수를 택하지 않고 자유 연맹의 건재함을 드러냈다.

다른 대륙에서의 재기를 공표한 것이다.

여러 세력들이 규합된 제논의 특성상 이 소문은 금방 여기저기로 퍼질 것이다.

이는 분명 반대쪽 대륙에 남아 있는 자유 연맹의 잔여 세력들에게도 전파되어 갈 것이고 이는 그들의 불안한 현실 속 실낱같은 믿음으로 번질 것이다.

여기서 정혁이 이들을 곱게 보내 주지 않게 된다면 카탈 대륙의 지배자가 될 제논의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데릭이 나름 좋은 전략을 가지고 등장한 셈이었다.

정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데릭에게 물었다.

“그래서요?”

데릭은 숨을 골랐다.

정혁의 눈빛과 표정에서 정확히 그가 자신의 의중을 간파했다는 느낌이 든다.

저 안나라는 여자도 동일하게 느꼈을 것이다.

아니, 그녀는 이미 자신과 무리가 이곳으로 오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파악한 듯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를 조롱하며 먼저 검을 빼 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의 무력 충돌은 절대 안 된다.

이들에게 조금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당당하게 카탈에서 물러나 두 번째 라운드를 준비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당했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다.

이미 연락해 놓은 몇몇 곳에서 규모가 있는 몇 개의 도시를 규합하는 중이다.

시간이 있다면 충분히 카탈로 재진입 할 수 있다.

이들이 깨끗하게 정리해 놓은 카탈 대륙에 다시 입성해 원래 주인의 힘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요?”

정혁이 빙글 웃으면서 데릭을 보고 있다.

데릭은 흠칫 놀라 정혁을 보며 안경을 올렸다.

“우리가 이곳에서 악마를 밀어내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정혁은 데릭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물었다.

데릭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데릭의 계산으로는 적어도 일 년 이상이다.

“아니,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정리할 거야. 혹시 뭐 년 단위로 생각하고 있진 않았죠?”

정혁은 다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위압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다.

“3일.”

정혁이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그러자 데릭이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말했다.

“헛소리!”

점잖은 태도로 일관했던 데릭이 드디어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 모습에 정혁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안 될 것 같죠?”

안경을 고쳐 잡는 데릭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선언에 놀란 건 자유 연맹 쪽만이 아니었다.

제논의 병력들도 덩달아 놀란 눈치였다.

“아크 제국의 영토에서 그들과 전쟁을 시작한 뒤 3일입니다. 단언컨대 우리는 3일 안에 모든 악마들을 카탈에서 몰아낼 겁니다. 그리고 이곳 전역에 제논의 깃발을 꽂을 겁니다. 근데.”

정혁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데릭의 코앞이다.

그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데릭에게 묻는다.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커지고 강해져서 우리의 뒤통수를 쳐 볼 심산인 걸까요?"

정혁은 그의 귓가에 사고를 멈추게 만드는 한마디를 던져 놓고 그의 옆을 스쳐 잭슨과 기사단장 그리고 자유 연맹 위원들을 둘러 본 후 몸을 돌렸다.

그러곤 원래 서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 과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손을 흔들며 말했다.

“가세요, 바쁘실 텐데. 어서 가서 또 짱구 한 번 굴려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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