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심했나?”
본부 건물을 나서면서 정혁이 안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묻는 거냐는 표정으로 멀뚱히 정혁을 바라보았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앞서 걷는 하늬안의 뒤를 따랐다.
“결국은 힘이 있는 자가 세상을 쥐는 법이다.”
김창수가 정혁을 거드는 발언을 했다.
안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김창수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끄떡없다는 듯 한마디 더 던졌다.
“나는 개인적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네.”
정혁은 안나가 보지 못하게 손을 숨겨 김창수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고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부유성 외곽, 제논의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는 폐허가 된 지구에 도착한 일행은 수비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나마 집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한 건물에 들어갔다.
이미 모두가 떠나 버린 이 넓은 지구에는 앞으로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제논의 병력들이 여기저기 산개해서 각자 먹을 것들을 꺼내 먹으며 사담이나 나누고 있기에 망정이 아니었으면 정말 폐허 그 자체였을 것이다.
라테는 꺼져 있는 화목 난로 안으로 들어가 불을 지폈다.
그러자 엘라가 지펴진 불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 장면이 상당히 이질적이었지만 워낙 변덕스러운 양반인지라 정혁은 그러려니 하면서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라테는 적당히 불길이 타오르자 불 속에서 작은 몸집으로 걸어 나와 정혁의 곁으로 돌아왔다.
안나도, 김창수도, 하늬안도 그 악명 높았던 불의 정령왕이 저렇게 귀여운(?) 모습으로 엘라보다 훨씬 순종적인 자세를 겸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거듭 놀라는 중이었다.
정혁은 삐걱거리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정혁이 의자를 앞뒤로 움직이자 일정한 삐걱거림이 방 안을 울렸다.
소리가 은근히 마음에 들어 그는 반복적으로 의자를 흔들었다.
김창수는 반대편 가죽 의자에 앉았고 안나는 엘라의 곁에 앉았다.
하늬안은 문 앞에 팔짱을 낀 채 섰다.
“대충 전달을 해서 알고 있어.”
침묵을 깬 건 안나였다.
“그들이 노리는 사람이 우리 마스터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녀의 말에 김창수도 하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능력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만하지.”
김창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일전과는 많이 다르던데. 마스크를 착용한 플레이어들이 엄청 많았지만 그중에 이니셜을 가진 사람은 셋. 그뿐만 아니라 힘도 전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했고.”
하늬안이 김창수의 말을 받아 이어 상황을 전달했다.
하늬안과는 제논의 기사단 건물에서 정혁과 함께 그들을 마주한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라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염구 덕분에 불리했던 상황을 극적으로 극복했었다.
당시 마스크를 썼던 자는 상황 자체를 굉장히 얕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치명타를 먹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정혁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면 완전히 끝을 내기 위해 이곳에 달려들었을 터.
‘그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했겠지.’
“아무리 자유 연맹이 위축되어 있었다곤 하지만 이 정도의 데미지를 입을 정도로 놈들이 강했다는 건가?”
정혁의 질문에 셋은 서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안나가 입을 열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장기전으로 이어졌을 경우 우리도 휘청했을 거야.”
그녀는 모았던 다리에 쥐가 났는지 쭉 펴며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미리 움직이긴 했다만 도착했을 땐 이미 자유 연맹 쪽의 거의 대부분은 파괴되어 있었어. 그들은 우리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 내고 역으로 우리에게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피했어.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움직임에서 유쾌함까지 느꼈을 정도야.”
“유쾌함?”
“마스터를 품었던 자유 연맹의 완전한 몰락을 유도하며 그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보여 주는 고약함이라고 표현해야 되려나? 침공하고 플레이어들이나 자유 연맹의 다른 소속 세력들을 정말 끔찍이도 압살해 놓은 광경이 광기를 넘어서 즐겁게 보이기까지 했거든.”
“그랬단 말이지?”
정혁의 한쪽 눈썹이 움찔했다.
‘그 정도였다고?’
일종의 경고였다고 이해해도 될까? 내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그들이 자유 연맹을 습격했다면 한편으로 제논은 자유 연맹 쪽에 미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어진다.
괜히 잭슨에게 했던 행동이 무안해지는 그였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한 사람이 문을 불쑥 열고 들어왔다.
하늬안이 저지해 보려 했지만 워낙 순식간에, 또 약간의 억지가 담긴 힘에 그녀도 놀라서 밀려나 버렸다.
들어온 자는 박달수였다.
약간 상기된 표정의 박달수는 정혁에게 거침없이 다가왔다.
김창수가 몸을 일으켜 그를 막아섰다.
“비키게”
“…선을 넘지 말게.”
김창수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세가 퍼져 나왔다.
정혁은 그들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의자를 삐걱삐걱 움직였다.
뭐 하는 건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혁은 알고 있다.
박달수 입장에서는 많은 동료들을 잃은 이 순간 거릴 것 없이 분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혜안을 가지고 있는 그이기에 이 상황의 원인을 완벽히 파악해 냈을 것이다.
또한 의회에서의 사건 역시 들었을 테지.
그러나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해도 정혁이 태도를 바꿀 필요는 없었다.
이건 어린이 소꿉놀이가 아니다.
피 튀기는 세력 싸움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을 뿐.
자유 연맹의 몰락을 사주한 자는 정혁이 아니기에 그에겐 실질적 잘못이 없다.
게다가 이미 내부가 썩어 들어간 자유 연맹이 먼 미래에 맞이했을 순간을 조금 앞당겨 경험한 거라고 생각해도 나쁠건 없지 않은가.
“비켜 주세요.”
정혁의 말에 김창수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돌려보았다.
정혁은 빙긋 웃었고 김창수는 찝찝한 얼굴로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났다.
박달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피로도는 아마 정혁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전쟁이란 전쟁을 다 겪고 있다.
그것도 연속적으로 말이다.
승리를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의 마지막 전투는 그를 깊은 나락으로 이끌었다.
몸담았던 조직이 무너지고 그 끝자락에 아등바등 매달린 꼴이다.
갑옷 이곳저곳이 박살나고 뜯겨있다.
장갑은 한쪽이 없다.
등에 멘 활의 시위는 끊어졌고 화살 배낭조차 없다.
짧은 손잡이의 양날 도끼 두 자루 중 한 자루는 자루만 남아 있고 남은 도끼도 양날 전부 굉장히 상했다.
왼쪽 눈에 착용했던 안대는 온데간데없어졌고 검은 고무 조각이 아슬아슬하게 안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박달수는 편안하게 앉아 손가락을 깍지 끼고 있는 정혁의 앞에서 한참 말없이 거친 숨을 쉬었다.
정혁은 그의 성난 표정에서 다양한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아니, 지금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박달수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상 외의 행동에 정혁이 조금 놀라서 앞뒤로 계속 움직이던 의자를 멈췄다.
두 발을 바닥에 대고 몸을 앞으로 숙여서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박달수를 멍하니 보았다.
자유 연맹을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들었습니다. 이미 제논의 책사, 안나 님께서 자유 연맹의 떨어져 나간 조직들에게 연락을 취했더군요.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 연맹의 완패입니다. 데릭 의장님께서 끝까지 남은 세력들을 붙잡아 보려고 하시지만 글쎄요. 저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박달수가 고개를 들어 정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자유 연맹의 역사는 여기서 마무리될 겁니다.”
냉정한 사람이다.
정말 저 덩치에 맞지 않을 만큼 사리 분별이 명확하다.
김창수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혁은 늘 김창수를 보며 제논의 기사단 길드가 그나마 이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안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김창수 역시 그동안의 많은 경험을 통해 가끔씩 허점을 찌르거나 빈틈을 찾아내는 발언을 하곤 했지만 그것만으로 하나의 집단 전체를 이끌어 가기엔 무리가 있다.
다행히 전체를 바라보고 획기적인 이익을 챙겨 왔던 안나가 있었기에 제논의 기사단은 성장하고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달수는 김창수와 안나를 합쳐 놓은 것 같다.
안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박달수의 정치적인 식견과 판단은 훌륭하다.
지금 박달수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연맹을 침공한 세력이 정혁을 목표로 그의 보금자리를 뭉개 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이었던 자는 이렇게 뻔뻔하게 보금자리였던 땅에서 쉬고 있지만 앞으로를 바라봤을 때 박달수는 결국 정혁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달수 또한 그의 식구들이 있는 치안대라는 조직의 장이기 때문이다.
박달수의 치안대는 자유 연맹의 수비대와 정규 병력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별동대였다.
도돈치아뿐 아니라 카탈 대륙에 각 분쟁지역에 일선에 파견되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들을 챙겨 주는 자는 잭슨뿐이었다.
수비대 산쵸는 치안대를 항상 무시했고 정규 병력들을 움직이는 다른 대장들은 치안대를 동네 건달 취급했다.
그러나 결국 이 사달 속에서도 제일 많이 살아남은 쪽은 늘 전투의 현장에 있었던 치안대원들이었다.
“제 치안대를 거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정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치안대는 실로 훌륭한 전력이다.
상당히 많은 수의 병력들을 잃긴 했겠지만 남은 자들의 전투 실력은 이미 이번 일로 보증받은 셈이다.
그러나 당장에 그들을 받아들일만큼 정혁은 조급하지도, 섣부르지도 않다.
“저도 사실은 무늬만 마스터라서요.”
그는 웃으며 몸을 일으켜 박달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박달수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 혼자서 이런 사항들을 결정할 순 없습니다. 저희들 안에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죠.”
“예. 알겠습니다.”
박달수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처량함이 느껴졌다.
그는 몸을 돌려 들어왔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김창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박달수를 쏘아보았지만 박달수는 그의 시선을 개의치 않아 했다.
그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정혁이 입을 열었다.
“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여러모로 고생 많으셨잖습니까. 저는 다방면에서 박달수 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로 자유 연맹 쪽에는 언지하지 않을 테니 소속 대원들의 상태를 잘 돌봐 주십시오. 귀한 제논의 인재들이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문밖을 나서는 박달수의 뒷모습이 조금 편안해 보였다.
그가 나가자 안나, 김창수, 하늬안이 앞다투어 각자의 견해를 쏟아 냈지만 정혁은 그들의 모든 말을 손가락 하나로 함구시킨 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야기했잖습니까. 무늬만 마스터라니까요.”
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2층으로 올라가는 정혁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받아들이기로 정했으면서 말만 번지르르 하지 않은가.
그렇게 자유 연맹의 폐허가 된 어떤 지구에서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