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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75화 (75/200)
  • ◈75화

    떠나기 전의 부유성과 지금의 부유성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웅장한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손실되었다.

    본성과 연결되어 있었던 부유 대지들 중 멀쩡히 남아 있는 부유 대지는 두 개 남짓이었다.

    나머지는 연결 브릿지만 끊어진 채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러 지구들로 이루어져 있던 부유성 내부도 이전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다.

    텅 빈 건물들이 훨씬 많고 공중으로 접근하던 여러 비행 탈것이나 상인 집단들의 발길도 보이지 않는다.

    단 며칠 만에 이런 상태로 변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정혁은 등 뒤로 사라지는 차원 문의 마나를 느끼면서 척박하다 못해 소름까지 돋는 폐허가 된 뒷골목 어딘가를 빠져나갔다.

    그나마 중앙 본부로 향하는 제법 넓은 메인 도로에는 몇몇의 플레이어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정혁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고개를 숙였다.

    다른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장간이 열리고 엘라가 불쑥 튀어나와 황량함이 감도는 부유성 위를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은행나무 군락지에 두고 온 줄 알았더니 이제는 알아서 잘 찾아온다.

    라테는 무게를 잡고 정혁의 곁에서 팔짱을 낀 채 그를 따랐다.

    반쯤은 붕괴된 중앙 본부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플레이어들이 더 많이 보였다.

    모두들 정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따라 시선을 쫓을 뿐이었다.

    저 멀리서 말 몇 마리가 달려온다.

    정혁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제논의 병력들일 거라고 추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이 그를 반겼다.

    하늬안이었다.

    “마스터.”

    하늬안은 급히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여 정혁에게 예를 갖추었다.

    조금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정혁 역시 평소와는 다른 반응으로 그녀의 인사를 정중히 받아 주고서 하늬안이 끌고 온 다른 말 위에 올라탔다.

    “자세한 보고는 본부에서 받으시죠.”

    “그럽시다.”

    이런 대화가 참 어색한 그였지만 어쩔 수 없다.

    보는 눈이 많으니 말이다.

    하늬안 역시 약간 불편한 속마음을 완벽하게 숨길 순 없는 모양이었다.

    고삐를 채는 손길이 거칠다.

    날이 축축하다.

    비가 내릴 것 같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하늘에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비 냄새가 아니라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라테는 자신의 머리 위에 대지의 정령왕 잔해를 이용해 동그란 석판을 만들어 올렸다.

    비가 온다고 그의 불길이 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힘이 약해질뿐더러 기분마저 불쾌해지는 모양이다.

    “대장간에 들어가 있지 그래?”

    정혁이 라테에게 물었지만 라테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걸어갈 길들을 모두 눈에 담고 싶네. 그녀가 말한 자이니 말이야.”

    정혁은 의외로 순정파인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조금 더 빠르게 본부로 향했다.

    ***

    함성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무너져 있는 곳곳을 수리하고 있는 바쁜 인부들의 걸음과 뿌연 먼지 사이로 보이는 의회장 의 문 안에서 들리는 소리다.

    정혁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를 따르던 하늬안과 수비대 팀원들도 정혁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안에 누가 더 있습니까?”

    “안나 님과 사령관님 그리고 자유 연맹의 의장 그리고 남은 자유 연맹의 위원들 몇이 있습니다.”

    “잭슨은요?”

    “잭슨과 박달수는 아스칼 건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알겠습니다. 들어오진 마시고 바깥에서 기다려 주세요. 금방 끝날 겁니다.”

    하늬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곁에 다가온 엘라와 라테를 좌우측에 두고서 정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앉아 있는 안나와 김창수가 보인다.

    일전에 만났던 데릭이라는 자는 의장의 자리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다른 위원들은 반대편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몸 다툼이 없다 뿐이지 상황은 거의 싸움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혁의 등장에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장내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데릭은 안경을 올리며 약간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고 다른 위원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져 저마다 정혁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안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하고 인사했고 김창수는 정혁을 보자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육중한 갑옷의 절그럭거리는 마찰음이 유독 크게 들려왔다.

    위원들과 데릭은 라테와 엘라를 번갈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데릭에게 말로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다.

    사실인지 믿어지지는 않는다만 며칠 전 측면 돌파 전쟁에서 군주급 악마 둘을 소멸시킨 남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제논의 기사단 팀장급들이 지닌 전설 무기를 제작한 대장장이.

    제논에 엄청난 실력자들이 모이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

    위용과 기개가 넘치는 모습도 아니고 강렬한 인상과 거대한 무기를 지닌 모습도 아니지만 정혁은 그만의 어떤 아우라가 있었다.

    아직 200레벨도 되지 않은 플레이어가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이 말이다.

    정적을 깬 것은 라테의 헛기침이었다.

    차가운 비 때문에 한껏 기분이 나빠진 라테가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찾아보고 있었는데 마땅히 편안해 보이는 의자가 보이지 않자 언짢은 티를 낸 것이었다.

    정혁은 살짝 웃음을 지어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가뿐히 데릭과 위원들을 무시하고 안나와 김창수에게 다가갔다.

    김창수는 정혁의 앞에서 주먹을 쥐고 자신의 가슴을 두 번 두드리며 예의를 갖추었다.

    강철의 타격음이 강렬하게 귓전을 울린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닐세. 마스터야말로 고생이 많았지.”

    안나는 어느새 엘라에게 눈인사를 건넸고 엘라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듯이 그녀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 애는 잘 있어?”

    아마 제논에 있는 그의 사택 앞 은행나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안나는 단번에 엘라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럼요! 잘 자라고 있답니다.”

    엘라는 싱긋 웃으며 안나의 등 뒤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정혁은 안나를 보며 물었다.

    “무슨 대화 중이었죠?”

    “아….”

    안나가 대답을 하려 하자 그녀의 말을 끊으며 데릭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자유 연맹의 앞날에 대한 대책 회의 중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날이 잔뜩 서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생전 처음 보는 불쾌한 세력에게 자유 연맹의 심장이 공격받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정혁은 등을 돌려 데릭을 바라보았다.

    다른 위원들도 긴장감 섞인 표정으로 데릭과 정혁을 번갈아 보았다.

    “총사령관이 일전에 습득했던 브로치에서 어떤 신호가 전해졌습니다. 우리의 좌표가 전달되고 무수히 많은 차원 문이 부유성 여기저기에 나타나더니 무차별 공격이 퍼부어졌습니다. 총사령관이나 기사단장님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더 큰 인명 피해가 날 뻔했죠.”

    데릭이 다시 한번 안경을 올리며 의장석 위에서 걸어 내려왔다.

    그는 정혁에게 조금 더 접근하며 말을 이었다.

    기사단장이라는 직급이 불리자 위원들에 섞여 앉아 있던 어떤 사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사내는 상당히 지쳐 보였는데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잔뜩인데도 아직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상태로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에 들어보니 그 브로치는 정혁 님과 총사령관이 소규모 전투를 벌였을 때 습득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3명의 암살자는 정혁 님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듣고 보니 웃기네.’

    정혁이 다가온 데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데릭의 입술 근육이 작게 떨렸다.

    살짝 금이 간 한쪽 안경알이 보인다.

    안경도 깨끗하지 못하다.

    얼굴에는 옅은 상처가 났다.

    눈썹은 잔뜩 성이 나 있고 눈동자에 깊은 분노가 어려 있다.

    정혁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몇 번 긁고는 팔짱을 낀 뒤 물었다.

    “저 때문에 자유 연맹이 타격을 입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 태도는 뭡니까!”

    “자유 연맹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우리의 대표에게 예의를 갖추십시오!”

    정혁의 말에 위원들이 제각기 한소리씩 던졌다.

    데릭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혁은 고개를 살짝 빼 위원들을 데릭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혁의 시선이 닫자 다시 수그러들었다.

    “말해 보세요. 그런 겁니까?”

    정혁이 다시 한번 데릭에게 물었다.

    ‘그렇다!’ 라고 데릭은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파워 게임에서 자유 연맹은 이미 한참 밀려나 버렸다.

    도돈치아에서부터 꼬인 실타래가 결국 풀리지 않고 더 얽히고 설긴 것이다.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고 적절히 대응하지도 못했다.

    긴 시간 이어졌던 자유 연맹의 찬란한 역사가 이렇게 삽시간에 뭉개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혁은 데릭의 이런 태도에 상당한 불쾌함을 느꼈다.

    이런 자들에게 더 이상 차려 줄 예의 같은 건 없다.

    “잘 들어.”

    정혁이 딱딱한 표정으로 데릭의 어깨를 밀며 의장석을 향해 걸어 나갔다.

    데릭은 그의 거친 손길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항하지 못했다.

    “자유 연맹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정혁이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곤 검지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쥐며 말을 이었다.

    “재기 불능의 상태에서 제논의 도움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는 대신 제논 연합에 소속되든가, 혹은”

    그의 손이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접고 중지손가락으로 이동했다.

    “지금과 같은 주제를 모르는 태도로 자유 연맹 자체를 주장하다 여기 모두는 우리에 의해 추방되고 그나마 자기네들 살겠다고 조직을 데리고 도망친 놈들이 이곳에 돌아와서 제논에 소속되어 떵떵거리는 걸 지켜보거나. 만약에 첫 번째를 선택한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두 번째를 선택하고자 한다면야.”

    정혁은 남은 중지 손가락만 보인 채 당당히 말했다.

    “여러모로 뭐 되는 거지.”

    안나가 이마에 손을 대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쥐새끼처럼.”

    그 순간 라테가 정혁의 손 안에 건틀릿으로 장착되더니 그의 다른 손이 허공을 갈랐다.

    허공에서 목덜미를 붙잡힌 잭슨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 때문에!”

    그는 격분하며 고함을 내질렀지만 정혁은 피식 웃으면서 잭슨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쩜 웃는 상에 이런 폭발적인 증오가 담길 수 있는지 놀랍다.

    정혁의 손아귀에 잡힌 잭슨이 사력을 다해 발버둥을 쳐 봤지만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정혁은 자유 연맹의 총사령관의 멱살을 쥔 동시에 데릭과 위원들에게 중지손가락으로 상큼한 욕을 날리는 명장면을 연출하게 되었다.

    잭슨 정도의 상위급 랭커는 이제 정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습을 숨기는 데 있어서 오아시스의 최고 수준이라 일컬어지는 잭슨인데도 불구하고 정혁은 기척을 느끼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반응했다.

    김창수는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은 정혁을 보면서 속으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을… 주십시오.”

    데릭이 이빨을 깨물고 작게 말했다.

    그의 말과 함께 정혁은 잭슨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잭슨은 벽에 부딪쳤다.

    가뜩이나 데미지를 입은 벽이 잭슨의 부딪침에 무너져 내렸고 사람 두 명만 한 구멍이 생겼다.

    잭슨이 무너진 벽돌을 신경질적으로 밀쳐 내며 몸을 일으켰다.

    김창수가 그의 곁에 서서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잭슨은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정혁은 뒷짐을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드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여기 계신 모두를 다시 뵙도록 하죠.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정혁이 말을 마치고 안나와 김창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김창수는 잭슨을 한 번 더 강하게 바라보고는 안나와 함께 정혁의 뒤를 따라 의회장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한참 의회장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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