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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74화 (74/200)
  • ◈74화

    정혁은 잠시 아린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에 홀로 남았다.

    라테는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고 엘라는 어느새 창밖으로 훌쩍 날아가 사라졌다.

    아린은 정리가 끝나는 대로 다시 불러 달라고 부탁하며 밖으로 나갔다.

    안나는 담담하게 자유 연맹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했다.

    안나 역시 유르겐이라는 자에게 언질을 받았다고 했다.

    자유 연맹은 소위 빈집털이를 당한 상태였는데 그것도 흑막 속에서 움직이는 집단에게 공격을 당해 당시 상황은 아비규환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부실한 연맹의 결속력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미 아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연맹 내부에서 각종 볼멘소리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는데 거기에 본부인 부유성까지 공격당하자 의회의 각 위원들은 제각기 각자의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본부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위원들과 연맹 조직은 소수에 불과했고 본부를 쳐들어온 검은 말 조직은 거저먹기식으로 연맹을 거의 함락 직전까지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러나 총사령관 잭슨의 실력과 잔여 수비대 및 치안대의 탄탄한 전술은 제논의 병력들이 도착하는데 시간을 벌어 주었고 제논의 병력들이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밀어붙여 긴 시간의 산발적 전투 끝에 잔여 세력들까지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

    승리하고 하기는 모호한 것이, 그들은 목적을 가지고 자유 연맹 본부를 공격한 터라 목표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불필요한 전투를 피해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해 갔다.

    제논은 그저 쫓아내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 큰 타격 없이 부유성을 탈환했다.

    [자유 연맹 쪽에서 손실이 좀 컸지.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잭슨은 여전히 회복중이고 의회 위원의 과반수가 도망쳤어. 이제 연맹이라고 부르기에도 꼴사납지. 나는 개인적으로 데릭이 꽤나 잘 이끌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봐. 많은 플레이어들이 본부를 방어하다가 죽었어. 아, 그 아스칼? 그자도 죽었고.]

    [아스칼이?]

    [이미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던데 물러나던 녀석들을 무리해서 쫓아가다가 일격에 로그아웃되었어.]

    [우리 쪽은?]

    [네가 만들어 준 무기가 워낙 질적으로 훌륭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팀장들도 호각으로 잘 싸워 줬어. 다만 내 추측으로는 앞서 말했듯 네가 없어서 더 힘 빼기는 싫었던 모양이야.]

    [결국, 나를 찾아온 거였네?]

    [그래. 네가 ‘키’니까.]

    정혁은 안나의 전음을 듣고 큰 숨을 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자꾸만 안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직설적이지 않은 태도를 유지했다.

    일전에도 솔직하게 전부 다 이야기해 주면 될 것을 뭔가 계속해서 숨겨 왔다.

    주황색 빛으로 이어지는 자에게 모든 사실을 들으라고는 했지만 이 대륙에서 만날 수 없는 자를, 언제 볼지도 모르는 자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정혁은 일전의 꿈이 생각났다.

    너무나 생생했던, 과거의 ‘한’이 등장해서 지금의 정혁을 협박했던 꿈.

    조금씩 알 수 없는 말들을 던지며 사라지는 적들이 늘었다.

    에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아크 제국에서 뭔가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듯 했다.

    정혁은 눈을 떠 라테를 보았다.

    라테가 이전해 해줬던 세계의 기원.

    이는 정혁이 알고 있는 오아시스의 역사와는 조금 달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오아시스의 모든 플레이어가 알고 있는 오아시스 창조에 대한 겉핥기식의 지식뿐이다.

    ‘신’이라는 자가 존재하고 (사실 이 조차도 ‘한’이었을 때 정혁은 믿지 않았다.) 그자가 세계를 만들었다 정도?

    과거부터 존재했던 신의 창조물들 역시 정혁은 잘 알지 못했다.

    마계와 천계가 있다는 소문은 돌았었다.

    그러나 오아시스 외 필드였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접근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괴이한 존재나 악마들이 오아시스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만 어림잡아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헛소문이 아니라 실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라테를 제외한 정령왕들의 존재는 명확했지만 그들은 세계에 큰 관여를 하지 않았으며 꽤 오래전,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오아시스의 역사를 짊어지기 전에 존재했다 사라졌다는 용족들을 만날 기회도 굉장히 드물었다.

    그러나 라테가 말한 그 신이 과거 정혁이 만났던 그 신과 동일하다면 도대체 정말 그 ‘신’이라는 놈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는 이 세계를 이렇게 방치했고, 왜 그는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지닌 자들을 소수 만들었으며, 왜 자신에게는 이런 제약을 걸어 ‘한’보다 더 강해질 빌미를 제공했을까?

    아니, 왜 안나는 내가 ‘키’라고 확신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미궁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대륙을 벗어난다면 분명 더 깊이 있는 내용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된 거 속전속결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때?]

    [사실 사람들을 좀 뿌려 놨어.]

    [사람들?]

    안나는 흩어진 연맹의 핵심 조직들에 다시 팀장들과 병력들을 함께 보냈다.

    반은 협박이고 반은 협력이라는 이름하에 그들을 모두 흡수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각 조직들은 모두 조직을 지킬 대다수의 병력들을 잃은 상태였다.

    북쪽의 아크 제국과 대응하기 위한 병력들은 뜬금없는 악마의 대침공 때문에 더 큰 손실을 입었다.

    의회에서 정확한 사실 전달 자체를 쉬쉬했던 상황이었기에 사실 조직의 리더이자 의회 위원들도 자유 연맹을 이탈하면 당장이 난감한 상황이었다.

    반면 제논에는 엄청난 물자들이 매일 쌓여 가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고 종족들이 모이며 플레이어들이 계속해서 유입된다.

    덩치가 커지는 만큼 큰물이 필요했다.

    또한 지도자의 의지에 맞는 조각들이 필요했다.

    능숙하고 노련한 자들이 그대로 제논에 흡수된다면 좋을 일, 산산조각 난 연맹의 조직들이 유용하다면 받아들이고 불편하다면 없애 버리면 된다.

    멍청한 위원들은 생각보다 적었다.

    안나는 빠르게 모든 상황들을 정리해 갔다.

    [수고했습니다.]

    정혁은 짧게 안나의 고생을 치하했다.

    며칠 안으로 자유 연맹은 완전히 제논 연합에 흡수될 것이다.

    제논은 카탈 대륙의 2/3을 거친 피 흘림 없이 차지하는 업적을 달성할 것이고 속히 재정비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쪽에 악마 세력을 이 땅에서 밀어내기만 한다면 카탈 전체를 통일하게 된다.

    [그들이 다시 공격할 가능성은?]

    정혁의 전음에 빠르게 답변하던 안나의 전음이 조금 늦게 돌아왔다.

    [유일한 변수지.]

    [내 생각에는 많이 봐주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어때?]

    [동감이야.]

    [분명 카탈을 통일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거야. 그래서…….]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얄짤 없이 죽여 버릴 거야.]

    정혁이 이를 갈았다.

    깔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까지 간만보다 사라진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아직 ‘한’ 정도는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정혁은 이제 많은 적들을 압살할 수 있는 수준은 된다.

    라테와 엘라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어쩌면 소규모의 군대쯤은 혼자서도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개인 대 개인이 된다면 더 자신있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든 상관없다.

    압도적인 공포가 필요하다.

    정말 압도적인 공포가 말이다.

    정혁의 두 손 가득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라테가 눈빛을 반짝였다.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그의 살기와 폭력성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일단 그쪽을 잘 정리해 주시고 부유성으로 와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그래. 그렇게 할게.]

    마지막 전음을 끝으로 정혁은 이마를 감싸 쥐며 목을 의자에 기대었다가 생각을 정리한 뒤 몸을 일으켰다.

    라테가 천천히 그를 따랐다.

    라테에게 이곳의 엘프들이 불편해할 거라 넌지시 이야기했지만 라테는 알 게 뭐냐는 표정으로 정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의 집무실까지 가는데 사색이 된 엘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모습을 계속해서 마주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건틀릿으로 바꾸거나 대장간에 밀어 넣고 싶었지만 지난 전쟁에서의 고생을 생각해서 이번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기로 했다.

    왕의 집무실 앞에서 두 수행원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양쪽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라테는 그 모습이 즐거운지 자신의 덩치를 조금 키웠다 줄였다 하며 그들을 겁주었다.

    그들은 손에 쥐고 있는 창을 겨눠야 할지 아니면 내려놓고 도망쳐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정혁이 라테의 등을 툭툭 치며 그의 장난을 중단시키고 집무실에서 거대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린을 향해 걸어갔다.

    아린은 정혁을 보고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한 뒤 책을 덮었다.

    거대한 책은 꾸웅 소리를 내며 먼지와 함께 덮였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나요?”

    “응. 제논의 입지가 더 나아진 모양이야.”

    “자유 연맹까지 흡수하게 되셨나 보죠?”

    “그렇게 될 예정이고.”

    “…우리까지 흡수하실 생각인가요?”

    “음… 응?”

    뜬금없는 아린의 말에 정혁이 그의 책상에 걸터섰다가 미끄러질 뻔했다.

    당황한 그가 재차 물었다.

    “무, 무슨 소리야.”

    아린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라고 마무리 짓고 싶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린은 걸음을 옮겨 집무실 옆에 길게 놓인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여러 책 중에 하나를 꺼내 정혁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선조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물론 정혁 님 같은 분도 간혹 계셨죠.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류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혹은 정혁 님 같은 태도에서 변한 분들도 많았구요. 최근에 가장 흥미롭게 봤던 자료에는 ‘한’이라는 인간이 나옵니다. 마계에도 없을 악마 같은 자라고 불리더군요.”

    정혁은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 같아 정신이 아찔해졌다.

    “정혁 님께서 만들어 주신 모습이긴 하지만 저도 왕인지라 이 왕국의 미래를 늘 걱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제가 가진 힘이 아무리 제 것이라고 해도 이 목걸이의 제작자는 대장장이이신 정혁 님이기에 가끔은 불안할 때도 있죠.”

    “내가 그것을 다시 취할까 봐?”

    “글쎄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아린이 책을 살짝 흔들며 말을 이었다.

    “세상엔 참 다양한 인간이 있었으니까요.”

    정혁은 조금 불쾌해지긴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물론 정혁 님이 그러실 거라는 가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정혁 님과 이어진 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분란의 씨앗이 될까 두려운 거죠.”

    이쯤 되니 아린이 원하는 것이 있어 보인다.

    정혁은 곧바로 아린에게 물었다.

    “뭘 원해.”

    아린은 손을 턱에 잠시 괴었다가 쩝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제논과의 영구 불가침 협약을 원합니다. 더불어 북쪽 영토까지 수복되면 일정 부분을 저희에게 할애해 주시면 좋겠구요.”

    “그렇담 국왕께서는 당연히 이번 악마 토벌에 참여해 주실 거구요?”

    “그것은 물론입니다.”

    대륙의 통일에 아린의 왕국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다.

    은행나무 엘프를 적으로 돌리면 결코 제논의 앞날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겨우 타 종족에 대한 마음을 열고 있는 처지에 이를 다시 과거로 회귀시키는 최악의 선택이 될뿐더러 아린의 목걸이의 힘은 일반 병력들을 가볍게 무력화시키는 데 굉장히 특화되어 있다.

    그저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며 앞으로는 카탈 대륙을 함께 지키고 공생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앞서도 말했지만 저는 왕인지라….”

    “알아, 꼬맹아.”

    정혁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 거, 참. 꼬맹이도 이제는 실례라니까요.”

    아린이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정혁은 팔짱을 끼고 더 크게 웃었다.

    “박달수의 여러 조언들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다행이네. 그래. 늘 그렇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거야. 좋아. 협정을 체결하도록 하지. 악마 토벌 전쟁이 끝나면 영토 할당도 함께 논의해 보자구.”

    아린은 바깥의 수행원들에게 준비된 불가침 협약서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그러자 곧 여러 신하들이 불가침 협약서를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정혁은 협약서를 상세히 읽어 보고 서명했다.

    아린은 정혁에게 악마 토벌을 위한 병력들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로 준비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더불어 아린은 상급 마법사들에게 부탁해 안나가 전송해 준 좌표로 이어지는 차원 문을 개방해 주었고 정혁은 그런 그에게 감사를 표한 뒤 이제는 제논의 핵심 거점이 된 자유 연맹의 부유성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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