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73화 (73/200)

◈73화

[이미 진군 중일세.]

김창수에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혁의 전음이 전해지자마자 그는 이런 대답으로 응답했다.

[아마도 북동쪽 전선에서의 전투는 승리했겠군, 고생 많았네. 이제는 우리 차례이니 자유 연맹 쪽을 잘 정리해 보겠네. 일단 좀 쉬게나.]

김창수는 정혁이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정혁은 잠시 당황해서 멍하니 있다가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오히려 초조한 쪽은 박달수와 아스칼이었다.

정혁은 그들에게 지금 상황을 전달해 주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여 준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요.”

“먼저 움직였다면?”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자유 연맹 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제논의 군대가 말입니까?”

박달수의 목소리에 약간의 언짢음이 섞였다.

정혁은 그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헛웃음을 지었다.

“뭐, 그럼 다시 물릴까요?”

정혁의 반응에 박달수는 마른기침을 하며 자신의 결례를 사죄했다.

그리고 곧 아린의 곁에 있던 부관에게 부탁하여 까마귀 두 마리를 대여받았다.

다른 인사는 없었다.

박달수와 아스칼은 굳은 얼굴로 뿌연 하늘을 가르며 높이 날아올랐다.

정혁은 다시 김창수에게 전음을 보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에겐 훌륭한 책사가 있지 않은가. 안나가 자유 연맹 쪽에 심어 놓은 자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모양일세. 자네가 이미 전쟁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들었고 안나는 자네가 당연히 이렇게 지시할 것이라 추측하여 나에게 상황을 전달했지.]

역시, 안나 덕분이었다.

정혁은 새삼 그녀의 통찰력에 놀라면서도 그에게 당부를 해 둬야겠다는 생각에 전음을 이어 보냈다.

[상대는 꽤 강할 겁니다. 자유 연맹 본부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것이구요. 피아 구분이 쉽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게. 제논을 믿게. 자네의 동료들 아닌가.]

[…부탁 합니다.]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여기서 마무리하지. 일 보시게, 우리도 우리 일을 보겠네.]

김창수는 차갑게 전음을 닫았다.

그러나 알고 있다.

그는 지금 오히려 정혁의 상태를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많이 지쳤을 그를 멀리서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 연맹에 대한 마음을 조금 접어 놓고 당장에는 휴식을 온전히 누렸으면 하는 마음인 것이다.

정혁은 김창수에게 추가적인 전음을 더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에드리아를 안고 있는 아린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이곳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될 것이다.

은행나무 엘프 전초기지에서 기지를 방어하던 잔여 병력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린의 근처에 있던 살아남은 부관들과 대장군들은 슬퍼하는 국왕의 곁에서 씁쓸한 승리를 만끽했다.

대지는 온통 자줏빛이다.

플레이어들의 시체는 곧 사라지겠지만 오아시스의 태생적 존재들의 시체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썩어 갈 것이다.

정혁은 피를 머금은 축축한 흙을 쥐었다 폈다.

라테는 조용히 그의 곁에 머물렀다.

큰 숨.

찝찝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나간다.

피곤한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려고 한다.

아린을 달래 줘야 할 것 같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온몸이 천천히 굳어지는 것만 같다.

눈을 좀 붙여야 할 것 같다.

***

정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전쟁을 떠나기 전 묵었던 왕궁의 방 안이었다.

정혁은 오랜만에 푹 쉬었다는 느낌으로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기분 좋은 나무 향이 온몸을 훑고 지나는 것 같았다.

라테는 전에 앉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정혁을 보고 있었다.

정혁은 왠지 그 모습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난다.

그는 볼을 살짝 긁고서 헝클어진 머리를 몇 번 쓸어 대충 정리했다.

그의 몸보다 한참 큰 실크 재질의 잠옷이 너풀거리며 팔을 흔들 때마다 움직였다.

“옷은 또 언제 갈아 입혔냐.”

“그 더러운 꼴로 잘 수는 없지 않나.”

라테가 실크 잠옷을 집고 팔락거리는 정혁을 보면서 퉁명스레 대답했다.

“좀 괜찮아?”

“누가 할 소릴 하는 건가.”

정혁의 물음에 라테의 눈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엘라는?”

“꽤 오랫동안 대장간에서 나오지 않았네.”

“오랫동안?”

“이틀 정도는 됐지.”

“이틀?!”

정혁이 당황해서 소리치듯 말했다.

극한의 피로도를 달리고 있었다.

제논을 떠났을 때 이후로 제대로 잠든 적이 없는 것 같다.

제논의 영역 외부에서는 안전한 곳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를 노리는 세력들이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위협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이었을 때 이미 익숙해진 플레이 방향이었지만 그때의 몸뚱이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누적되는 피로도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틀이나 지났다니.

정혁은 깜짝 놀랐다.

은행나무 엘프 왕국이 문제가 아니라 제논과 자유 연맹이 문제였다.

정혁은 급히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신의 옷을 맞춰 입었다.

김창수와 안나의 전음 채널은 막혀 있다.

다른 팀장들도 마찬가지다.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불안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혁 님?”

“아린?”

익숙한 목소리는 아린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죠?”

조금 수척해진 얼굴의 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정혁을 바라보았고 정혁은 허리끈을 마저 조이며 아린을 맞이했다.

그의 수행원들은 옷매무새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국왕을 맞이한 인간에 대해 증오 어린 표정을 문 밖에서 지으며 천천히 문을 닫아 주었다.

아린은 라테의 반대쪽에 앉았다.

그러곤 탁자에 놓인 찻잔에 찻잎을 넣고 물을 따랐다.

아린이 웃으면서 찻잔에 손가락을 탁탁 대자 라테가 알겠다는 듯 찻잔을 뜨겁게 달궈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린은 라테에게 인사를 꾸벅하며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혁은 라테에게 눈치를 주어 의자에서 그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라테는 툴툴거리며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가 섰다.

정혁 역시 서서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앉으셔도 됩니다.”

“아냐, 내가 지금 급히 가 봐야 할 곳이.”

“아닙니다. 앉으셔야 합니다.”

아린이 단호하게 말하자 정혁이 찻잔을 들고 살짝 얼어붙었다.

아린의 눈빛은 상당히 진지했다.

정혁은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찻잔 위로 김이 천천히 올라오고 아린은 김이 사라지는 것은 아련히 바라보다가 몸을 의자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으며 편안하게 앉았다.

“아크가 무너졌습니다.”

“뭐?!”

정혁은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이틀이라고 했다.

정혁이 잠들었던 시간이 두 달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단 이틀이었다.

근데 이틀 만에 뭐가 어떻게 됐다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크 제국의 영토 자체가 이제 다른 존재가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게.”

“그때 정혁 님이 마계의 군주급 악마 둘을 처치하셨죠?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이곳에서 죽어도 마계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러나 이곳에서 온전히 본연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즉 마계의 존재는 오아시스에 세계를 온전히 침범할 수 없다는금제가 풀려 버렸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죽음이 존재의 소멸이 될 수 있었던 거죠. 전례없던 이 사건 때문에 마계의 군주급 악마들과 악마 군단이 아크 제국에 완전히 발을 들였습니다. 멍청한 아크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염원하던 순간이라고 착각했겠지만 매개체가 필요 없어진 마계의 악마들은 그대로 아크 제국의 모든 영토에서 그들을 지워 버렸습니다. 측면 돌파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국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아크 제국은 끝이 나 버렸어요. 이제 그곳은 악마의 땅이 되었습니다.”

“잠깐만, 아니, 일이 그렇게 진행된다고?”

당황한 정혁이 넋을 놓고 뜨거운 차를 많이 들이켰다가 콜록거렸다.

“아크 제국의 남쪽 전선, 그러니까 자유 연맹과의 전선도 급히 정리되었습니다. 자유 연맹은 내부의 분란을 정리하는 게 더 급해 보였고 소수의 방어 병력을 남긴 채 삽시간에 본부로 돌아갔어요. 제가 듣기론.”

여기서부터가 정혁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제논 덕분에 자유 연맹의 수뇌부는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자유 연맹의 본부로 향했던 병력들이 알 수 없는 병력들과 만나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고 해요. 어떻게 어떻게 급한 불은 껐지만 제가 듣기도 더 이상 연맹의 모양을 유지하긴 어렵다고 합니다.”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게?”

아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를 다시 한 모금 홀짝였다.

정혁은 허탈하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곤 역시 몸을 깊숙이 의자 안으로 밀어 넣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일이다.

카탈 대륙의 흐름이 이런 식으로 돌아갈 줄이야.

모르긴 몰라도 악마들의 침공은 카탈뿐 아니라 반대쪽 거대한 대륙에도 동일하게 번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추종자 집단이 강력한 제국까지 형성하고 있던 카탈에 더 큰 데미지가 있었을 뿐.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린이 물었다.

정혁은 그 물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뭘 어떻게 하나.

어쨌든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을.

이 땅을 제논의 것으로 만들기로 다짐한 이상 악마고 자시고 싹 다 밀어 버려야지.

“내 식대로.”

“그러실 줄 알았어요.”

아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몇 걸음 걸어 창가로 다가갔다.

라테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린을 보고 자리를 피했다.

아린은 바깥을 바라보았다.

분주한 엘프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평화로운 모습이다.

“저희는 저희대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준비라면?”

“가만히 둘 수야 있나요. 모두를 갉아먹는 그들을 이 땅에 발 붙이게 둘 순 없죠.”

정혁은 강렬한 의지를 보이는 아린을 보며 들리지 않을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에드리아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구나.’

그의 의지 아래에 섞여 있는 복수심의 저릿한 내음을 정혁은 옅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영토 방위에 최선을 다해 줘. 저들이 왕국의 영토를 우회하지 않도록 막아 주고. 무리는, 하지 마.”

“예. 정혁 님 덕분에 은행나무 엘프들의 마음에도 인간들에 대한, 다른 종족들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적대적인 마음이 있지만 어느 정도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거든요.”

“네 덕분이지, 내 덕분일 리가.”

“아니요. 정말입니다. 엘라 님은 저희에게 정말 소중한 분인데 그런 분이 정혁 님을 따르고 있잖아요.”

아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 공간에서 엘라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아린에게 딱밤을 세게 갈기며 소리쳤다.

“따르고 있다고? 내가!?”

아린이 이마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린 앞에서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저, 성깔머리.”

라테가 엘라에게 한 소리 했다.

엘라는 기계처럼 라테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죽고 싶냐는 살기 어린 눈빛과 함께 말이다.

라테는 어깨를 으쓱할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린이 이마를 문지르며 엘라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하하. 어찌 되었건 지금 저희에게는 측면 돌파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준 정혁님이 영웅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이긴 하지만요.”

정혁은 약간 부어오른 아린의 이마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님? 일어나셨습니까?]

그 순간 막혀 있었던 안나와의 전음 채널이 개방되고 그녀의 전음이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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