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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72화 (72/200)
  • ◈72화

    기분 좋은 상태창의 알람과 함께 정혁은 곧바로 손을 들어 엘라를 회수했다.

    멈출 시간이 없다.

    그는 엘라를 등에 단단히 고정하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제로니막스가 정혁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사력을 다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이아의 결박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그의 사지를 더욱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공중으로 솟구치며 정혁은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린은 에드리아에게 완전히 근접해 있었다.

    이제 정혁에게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유지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2분 남짓, 이 안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제로니막스를 완전히 소멸시켜야만 한다.

    “에드리아.”

    아린이 왕의 검을 굳게 쥐고 에드리아 앞에 섰다.

    에드리아는 거의 탈진한 얼굴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 측면을 치고 들어오는 은행나무 엘프 창 지기를 쓰러트린 뒤 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연달아 아린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기에 그의 앞에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아린은 검을 쥐고 있었으나 에드리아 앞에서 쉽게 그 검을 들지는 못했다.

    그녀를 베어 넘겨야만 저 악마를 같은 타이밍에 쓰러트릴 수 있다고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린은 또 한 번 망설였다.

    그 순간 그의 곁에 있던 박달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마법 같은 것을 시전했다.

    “최상급 정화의 돌입니다.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잠시 그녀를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박달수의 말에 아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원상태로 돌아온다면 아린은 그녀를 죽일 수 있을까? 더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마지막으로 원래의 에드리아를 만나 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밝고 깨끗한 빛이 돌에서 뿜어져 나오다가 돌이 산산이 깨어지면서 그 모든 빛을 에드리아가 흡수했다.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던 그녀가 큰 숨을 들이 쉬더니 길게 내쉬었다.

    잠깐 그녀의 탁했던 눈동자가 돌아왔다.

    에드리아는 쓰러진 채로 아린을 올려다보았다.

    에드리아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여전히 무르구나, 너는.”

    눈물을 흘리며 에드리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아린에게 말했다.

    아린은 검을 떨어트리며 급히 에드리아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쓰러진 그녀를 들어 자신의 몸에 기대었다.

    “에드리아….”

    “그래도 멋지다. 우리의 왕이라니, 그 꼬맹이가 왕이 되었어.”

    그녀의 목소리에 여러 감정이 섞여 느껴진다.

    아린 역시 눈동자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아린.”

    “응.”

    에드리아가 손을 들어 아린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은 찬물에 담겨 있는 듯 얼음장 같았다.

    아린이 다른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마지막까지 우리의 긍지를 지켰어.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은행나무 엘프의 긍지를, 끝까지 지켰어. 알아 줘, 꼭, 알아 줘.”

    에드리아다운 말이었다.

    극도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비운의 소녀.

    도돈치아에서 은행나무 엘프의 승리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부모님 아래 사랑보다는 사상적 교육을 우선적으로 받았던 소녀.

    아이러니하게도 아크 제국에게 붙잡혀 또 다른 사상적 강압을 받아야만 했던 소녀.

    그러나 마음 한편에 그녀만의 따뜻함을 가졌던 소녀.

    “아니, 에드리아, 아니야.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아니, 아린. 중요하다고 해줘. 제발… 중요하다고 말해 줘.”

    아린이 고개를 저었지만 에드리아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작게 발버둥 쳤다.

    “긍지를 지키는 것, 그것이 내 전부였잖아. 내 세계였잖아. 그걸 부정하지 말아 줘. 그들에 붙잡혀서도 끝까지. 끝까지!”

    에드리아의 발버둥이 커졌다.

    그때의 기억들이 계속해서 상기되는 듯 했다.

    아린은 몸부림치는 에드리아를 강하게 안았다.

    “에드리아, 미안해. 그때 너를 그곳에 두고 가서, 그런 말을 해서, 이런 수모를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아린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그제야 에드리아의 발버둥이 멈췄다.

    그러나 작은 경련들이 이어졌다.

    아린은 고개를 들어 정혁을 보았다.

    정혁 역시 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혁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결계를 박살 내려는 제로니막스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에드리아의 마지막 생명력까지도 온전히 흡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화의 돌 유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제로니막스 쪽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박달수가 조용히 아린에게 조언했다.

    아린은 경련하는 에드리아를 다시 한번 꽉 안았다.

    “우리 왕, 나의 왕. 아린. 곤란하구나.”

    에드리아가 작게 말했다.

    그러자 아린이 당황하여 에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에드리아의 다른 손에 그녀의 허벅지에 속에 감춰져 있던 단도가 들려 있었다.

    박달수가 깜짝 놀라서 아린에게 달려들었다.

    아린 역시 그녀의 날이 선 단검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에드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심장에 스스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린은 당황하며 떨리는 손으로 에드리아를 다시 안았다.

    “아, 안 돼. 에드리아, 부, 분명 다른 방, 방법이 있을, 있었을 건데.”

    그의 손길이 에드리아의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에드리아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진다.

    아린이 가슴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에드리아는 단검을 쥔 양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이, 이거 빼 보자. 바로, 바로 치유하면 살 수 있으니까. 잠깐만, 잠깐만 에드리아!”

    아린이 고함을 쳤다.

    그러나 에드리아는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아린. 그, 그곳에서 내가 깨달은 세상은, 지, 진실이었을, 까? 마, 만약, 그, 세상이 지, 진실이라면, 우린 너무, 너무나 안타까운, 삶을.”

    “에드리아, 에드리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에드리아의 차가운 손이 다시 아린의 얼굴에 닿았다.

    “괜찮, 괜찮아. 나의 왕.”

    에드리아의 피가 아린의 얼굴에 묻어났다.

    피조차 차가웠다.

    아린은 서서히 풀려 가는 에드리아의 동공을 보며 절규했다.

    “괜찮… 괜찮아….”

    그녀의 마지막 숨이 가슴 깊이 들어갔다가 나왔다.

    전신에 힘이 풀리고 제로니막스와 연결된 마나의 흐름이 끊어진다.

    ***

    에드리아가 자신의 심장에 검을 꽂았을 때 제로니막스의 엄청난 고함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어때.”

    정혁이 제로니막스에게 물었다.

    그의 두 눈에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계에서 소멸된다는 것 상상해 본 적 있어?”

    제로니막스는 이빨을 갈며 소리쳤다.

    “내가 죽는다고 이 세계의 끝을 막을 수 없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작은 부품 주제에!”

    “부품? 아이구, 어쩌나. 부품 같은 것 때문에 죽게 생겼으니.”

    정혁이 충분히 그를 조롱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래, 실컷 비웃어라. 우물 안에 갇혀 나갈 생각도 못 하는 개구리야.”

    정혁은 다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린은 에드리아를 안고 절규하고 있었다.

    그의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이 불쾌한 기분은 곧바로 제로니막스를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에드리아는 죽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제로니막스는 원래의 마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가 온전히 이곳에서 소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정혁은 두 손을 들었다.

    두 건틀릿에 강한 힘이 모여들었다.

    불덩이가 모이고 잔해가 모여 골렘의 주먹 같은 두 주먹이 생겨났다.

    “기억해라. 우리의 금제가 풀렸다는 사실을 모든 군주들이 곧 깨달을 것이다. 곧이다. 곧.”

    “오라고 그래. 나는 더 강해져 있을 거니까.”

    정혁은 제로니막스의 두 눈을 정확히 쳐다보면서 그의 얼굴 양쪽에 두 손을 댔다.

    업화의 강렬한 화기가 제로니막스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제로니막스는 불타오르며 동시에 강한 힘으로 압박되어 가다가 엄청난 비명과 함께 완전히 소멸되었다.

    [파괴의 군주 악마 제로니막스가 소멸했습니다. 당신을 마계에서 주목합니다. 에고 장비 활성화 스킬의 유지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상태 창을 확인하면서 정혁은 시야가 아른거림을 느꼈다.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과했나…….”

    정혁은 인상을 구기며 작게 한마디 하고는 공중에서 천천히 추락해 갔다.

    에고 장비들이 모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엘라도 라테도 상당히 지친 모습으로 떨어지는 정혁을 겨우 받쳐 들었다.

    라테가 정혁을 부축하여 아린을 향해 걸어가고 엘라는 거의 땅에 끌리다시피 그들의 뒤를 따랐다.

    주변의 적들은 이제 없다.

    측면 돌파 전쟁은 은행나무 엘프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 땅을 집어삼키기 위해 중간계 오아시스에 완전히 강림했던 두 군주급 악마는 전례 없는 공격을 통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이 소식은 곧 전 대륙에 퍼질 것이다.

    아크 제국의 눈은 뒤집어질 것이고 더불어 모든 대륙에서는 마계의 침입이라는 또 다른 대치 국면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쉴 시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이들은 아크 제국의 전복을 위해 힘을 보태야만 한다.

    재정비를 끝내면 다시 더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정혁은 가쁜 숨을 쉬며 아린을 바라보았다.

    에드리아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아린의 두 눈에 이젠 슬픔보다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이빨을 깨질 듯이 강하게 물고 눈물도 울부짖음도 겨우 참아 내고 있다.

    정혁은 지친 얼굴로 측은히 아린을 바라보다가 그의 곁에 묵묵히 서 있는 박달수와 아스칼을 보며 문득 유르겐의 조언이 떠올랐다.

    “박달수 님.”

    정혁이 힘없이 박달수를 불렀다.

    박달수는 정혁에게 다가왔다.

    “자유 연맹 본부가 위험합니다. 당장 아스칼과 함께 잭슨에게 가세요. 그가 어떤 브로치를 들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파괴하고 본부 경계 병력을 보강하셔야 합니다.”

    “예?”

    “미안합니다. 더 자세히는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제 이야기가 늦었다면 이미 자유 연맹 본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말입니까?”

    “네, 그러니 속히 채비를 해서 자유 연맹 본부로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정혁이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제가 마무리하지요.”

    박달수가 뭐라 입을 열어 말을 하려다 말았다.

    정혁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엘라.”

    정혁이 엘라를 보았다.

    엘라는 자기도 힘이 다했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다가 입을 삐죽이며 아스칼과 박달수에게 장기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그리곤 스스로 대장간을 열어 그 안으로 쓰러지듯 사라져 버렸다.

    “꼭 연락하십시오. 전음 채널을 개방해 놓겠습니다.”

    “예.”

    박달수가 비장한 표정으로 가지고 있던 차원석에 힘을 불어넣었다.

    자유 연맹으로 갈 수 있는, 그가 들고 있던 마지막 차원석이었다.

    차원석이 산산조각 나면서 빛을 발했고 동그란 원형이 되어서 사방으로 퍼졌다.

    일렁이는 빛과 함께 너머에 어떤 공간이 비춰 보였다.

    박달수가 어깨끈을 조이면서 무기를 들고 차원 문에 들어가려는 순간, 차원 문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붉게 변했다.

    차원 문이 붉게 변한다는 것은 해당 지역이 차원 문을 사용할 수 없는 강한 결계 속에 있다는 뜻이다.

    대개 우호적인 플레이어들이 아닌 자들이 우연히 얻은 차원석으로 차원 문을 열어 침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박달수가 자유 연맹에서 그런 존재일 수 없다.

    이례적인 상황인 것이다.

    정혁은 당황해 하는 박달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들이 그곳에 있군.”

    정혁은 한숨을 크게 쉬며 전음 채널을 개방해 김창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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