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71화 (71/200)
  • ◈71화

    “아니지! 아직 아냐!”

    검은 마나가 공중에서 물 폭탄처럼 터져 내리고 이는 아린과 에드리아가 있는 공간을 모두 감쌌다.

    제로니막스였다.

    틈이란 틈을 전부 틀어막은 정혁과 엘라의 공격에도 꾸역꾸역 공간을 만든 제로니막스가 전투에서 이탈하여 에드리아에게 향한 것이다.

    그러자 지면에서 거대한 나무줄기가 땅을 뚫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에드리아에게 날아가는 제로니막스를 막기 위함이었다.

    날랜 제로니막스의 움직임은 이를 모두 피해 냈지만 면전으로 내리꽂히는 정혁의 화염 망치는 피하지 못했다.

    두 팔로 망치를 막아 내긴 했지만 제로니막스는 폭발하는 화염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정혁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십 발의 낙뢰를 아래로 던져 댔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폭발음이 아래에서 몇 번이고 울려 댔다.

    검은 마나에 휩싸인 공간에 선조의 영혼들은 산화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약해지자 이를 갈고 있던 에드리아가 성난 얼굴로 아린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흑마법이 온갖 저주를 품고 아린에게 쏟아졌지만 아린의 목걸이가 초록빛 마나를 뿜어내며 그를 보호했다.

    자욱한 먼지를 뚫고 제로니막스가 다시 비상했다.

    그는 계속해서 에드리아를 노리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정혁은 제로니막스를 막으면서 그의 이러한 행동의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아마도 안트로이아처럼 완전히 금제가 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소환사를 처리해야만 본래의 모든 힘이 복구되며 동시에 이 세계에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정혁은 한 차례 더 제로니막스와 부딪치면서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튕겨져 나왔다.

    지면에 착지해서 상처가 난 오른쪽 어깨를 툭툭 털며 몸을 일으킨다.

    제로니막스는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엘라의 은행잎 물결에 휩쓸렸다.

    에드리아는 이미 버티기 힘든 수준에 달하고 있다.

    아린의 형체 없는 공격들을 그녀의 온전한 힘으로 이겨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녀가 어떻게 짧은 시간에 군단장의 자리까지 올랐는지 눈에 훤하다.

    갑자기 공백이 생긴 자리에 강력한 세뇌 작업을 거친, 태생부터 마나에 익숙한 엘프라는 종족을 얼씨구나 하고 급히 앉혔겠지.

    실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마치 그때 만났던 제로니막스의 본래 소환사, 그 흑마법사와 비슷하다.

    그들에게 인간은, 플레이어는 단순히 소환의 매개체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혁은 피어오르는 증오로 이가 갈렸다.

    “돼먹은 생각부터가 악해, 악마 아니랄까 봐.”

    그는 중얼거리며 제로니막스를 바라보았다.

    겨우 은행잎 물결에서 벗어난 제로니막스가 엘라에게 검은 발톱을 적중시키고 공중에서 공기를 차 에드리아를 거의 밀어붙인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을 향해 치고 나갔다.

    검은 마나가 사방을 오염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은 선조의 병력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린은 당당히 에드리아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그녀가 몇십걸음 뒤로 물러섰는데도 불구하고, 아린은 제로니막스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앞으로만 전진하고 있다.

    오히려 애먹고 있는 쪽은 박달수였다.

    정혁은 재빨리 에드리아 쪽으로 향했다.

    쿠웅-

    엄청난 진동이 지면을 울리고 전신에 푸른 화염을 두르고 있는 안트로이아가 허공을 날았다.

    “으익!”

    정혁이 공중을 보며 짧게 탄성을 지른다.

    안트로이아는 정확히 이 난장판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박달수는 급히 아린을 잡아챘고 제로니막스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모습을 숨겼다.

    정혁은 순간 떨어지는 안트로이아의 중심에 있는 에드리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막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려는 선조의 병력을 산화시키고 있던 차였다.

    안트로이아의 추락을 피할 겨를이 없다.

    “엘라!”

    정혁이 엘라에게 소리를 쳤다.

    엘라가 정혁의 부름을 듣고 알겠다는 듯이 두 손을 공중으로 들었다.

    에드리아의 주변에 거대한 뿌리들이 몇 겹으로 뭉쳐서 솟아올랐다.

    정혁은 급히 에드리아의 곁으로 날아갔다.

    “에드리아!”

    아린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안트로이아가 낙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솟아 오른 뿌리들을 다 뭉개 버리며 지면으로 낙하한다.

    라테가 정혁의 위치를 발견하고 안트로이아에게 짓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화강풍을 휘몰아쳐 날렸지만 타이밍이 늦었다.

    안트로이아는 그대로 정혁과 에드리아를 깔아뭉개며 지면을 강타했다.

    아까보다 더 덩치가 커진 안트로이아의 충돌은 지진과 같은 진동을 일으켰다.

    검은 마나의 안개 사이로 안트로이아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비틀었다.

    정혁이 두 손을 들어 망치로 안트로이아의 충격을 막아 낸 듯 보였다.

    다만 정혁의 복부에 에드리아의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 망할.”

    정혁이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어쩌다가 전투의 흐름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에드리아는 표독스런 웃음을 지으면서 정혁의 복부를 찌른 단검을 양손으로 쥐고 비틀었다.

    라테가 다가와 안트로이아를 발로 걷어 차 반대쪽으로 날려 버렸다.

    그 화기에 에드리아가 밀려 달아났고 정혁은 복부에 박힌 저주 걸린 단검을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이래서 뭔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참 거지 같은 거야.’

    엘라가 다가와 자신의 마나로 정혁의 복부에 박힌 단검을 빼냈다.

    그러나 저주의 줄기는 여전히 복부에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어떤 저주인지, 저주를 건 자만이 알 수 있다.

    엘라의 머리카락이 분노로 잔뜩 치켜 올려졌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자.”

    정혁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엘라는 뭔가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혁은 눈을 감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불의 정령왕 라테.

    고대 엔트 엘라.

    둘은 계약 이후에 성장형 에고 장비가 되었다.

    정혁의 숙련도에 의해서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계약은 악마 제로니막스와 안트로이아처럼 제약이 될 수도 있다.

    즉, 본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애초에 그들이 계약된 그대로, 장비가 되었을 때다.

    사용하는 플레이어에 따라서 그 힘이 쟁쟁히 드러날 것이다.

    라테의 주인은 정혁으로 결정되었다.

    엘라는 아직 적절한 주인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여전히 정혁에게 귀속되어 있는 상태다.

    정혁은 이곳까지의 여정 중간중간 이들의 최대한의 힘을 끌어내기 위한 연구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에고 장비.

    자신이 어느 정도의 힘만 다뤄 줄 수 있다면 정혁의 능력으로도 이들의 본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강렬한 화기를 두르고 있던 라테가 빛을 발하더니 정혁의 손으로 돌아왔다.

    엘라 역시 갑작스레 초록빛 마나에 휩싸여 고귀한 지팡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에고 장비 활성화 스킬이 최초 적용됩니다.]

    정혁은 갑작스레 등장한 시스템 창을 급히 치워 버리고 가이아의 심장이 각인된 손으로 엘라를 쥐었다.

    그러자 강렬한 마나가 서로 공명했다.

    역시, 가능했다.

    가이아의 심장을 통한 엘라의 힘의 증폭.

    이로 인해 생성된 강력한 파동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했다.

    검은 마나의 안개는 깨끗하게 정화되었다.

    검붉게 물든 하늘에 더러운 구름들 사이로 강렬한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정혁의 복부에 심겨졌던 저주의 마법이 복부의 상처를 통해 빨려 나와 검은 구체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증발했다.

    아린과 남은 은행나무 엘프 군대는 처음 느껴 보는 자연의 어머니의 힘에 압도되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갑작스레 적을 잃은 안트로이아는 발악하면서 몸을 돌렸고 제로니막스는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이 되어 정혁을 내려다보았다.

    에드리아 역시 혼절할 것 같은 기세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불경한 마법으로 되살아났던 아크의 모든 병력들이 전부 무의 상태로 돌아갔다.

    남은 건 소수의 아크 제국 플레이어들뿐.

    죽음의 군대를 모두 잃어버린 아크 제국의 부대는 이제 전의를 모두 잃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혁은 예측만으로 발동시킨 새로운 고등 스킬 “에고 장비 활성화”에 일종의 유지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인의 숙련도 탓이 클 것이다.

    치워 버린 시스템 창은 사라졌지만 제한 시간이 확인된다.

    이 시간 안에 어떻게든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이다.

    [국왕, 잘 들어. 앞으로 3분 내에 모든 전투를 끝낸다. 제로니막스를 이 땅에서 완전히 소멸시키려거든 녀석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순간에 에드리아의 생명을 끊어 내야 해.]

    […예?]

    당황한 아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정혁은 눈을 감은 채로 마나의 흐름에 집중하며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안트로이아는 제로니막스에 비하면 교활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축에 속해. 제약이 풀린 지금 상태에서도 충분히 상대할 만하지만 제로니막스의 경우 녀석이 에드리아의 숨통을 끊어서 제약을 스스로 풀어 낸다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하기 힘들어.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변수 없이 녀석을 소멸시키려거든 두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해.]

    […결국 어떻게 되든 에드리아는… 죽어야겠군요.]

    [희망을 가졌던 거야?]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래, 아린. 산다는 건, 그런 선택의 연속인 거야.]

    정혁의 전음에 아린은 대답이 없었다.

    정혁은 그것을 아린의 암묵적인 긍정의 표시로 확인했다.

    정혁이 원했던 것은 이런 아린의 마음가짐이었다.

    이 과정이 있어야만, 아린은 강한 왕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회피하지 않는, 문제를 직면하고 꼬인 실타래를 스스로 풀어낼 힘이 있는 왕 말이다.

    더 이상 끌 시간도 없다.

    정혁은 엘라에게 힘을 집중했다.

    가이아의 심장을 통해서 강한 마나가 엘라를 통해 터져 나왔다.

    이는 악마들에게 굉장히 불편한 마나였다.

    그들의 힘에 일시적 제동이 걸렸다.

    그 순간 제로니막스에게 자연의 결계가 허리에서부터 조여 들었다.

    제로니막스는 아차 하며 급히 몸을 움직여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그의 허리를 관통한 마나의 쇠사슬은 그의 전신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정혁은 그를 묶어 놓으며 엘라를 한 바퀴 휘둘러 등에 고쳐 맸다.

    엘라는 계속해서 빛을 발하며 제로니막스의 결박을 강하게 유지했다.

    안트로이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정혁의 양손이 엄청나게 강한 화기를 두르며 불타올랐다.

    주변의 공기조차 불태워 버리는 듯 했다.

    불길은 엄청나게 거대해졌고 이 불길에 가이아의 잔해들이 뭉쳐 거구의 골렘 안트로이아의 주먹보다 더 커다란 주먹의 형태로 변했다.

    정혁은 그대로 양손을 모아 뛰어 오른 뒤 두 주먹으로 안트로이아의 복부를 강렬하게 타격했다.

    안트로이아는 공중을 가르며 한참을 날아갔다.

    그가 날아감과 동시에 사라진 정혁이 공중에 떠 있는 안트로이아의 위에서 나타나 다시 주먹으로 안트로이아의 머리를 여러 번 타격했다.

    첫 번째 타격에 안트로이아는 바닥에 처박혔고 그 뒤에 이어지는 주먹질 한 방 한 방에 굉음과 진동이 터져 나왔다.

    안트로이아의 잔해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는 기세를 몰아 안트로이아의 다리를 붙잡아 들었다.

    그러곤 잠깐 사이에 펼쳐진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넋이 나간 아크 제국의 잔여 병력들을 향해 안트로이아를 집어 던졌다.

    물론 전신에 불덩이를 입힌 채로 말이다.

    아린은 이빨을 깨물며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에게 최후의 공격을 명했다.

    그리고 에드리아를 향해 선조들의 병력을 집중시켰다.

    에드리아는 이미 모든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안트로이아가 몇 번 구르며 플레이어들 여럿을 로그아웃시키고 정혁은 마지막으로 엘라를 꺼내 들어 안트로이아의 복부 중심에 집어 던졌다.

    지팡이가 마치 창처럼 날아가 안트로이아의 복부에 커다란 구멍을 내며 관통했다.

    지팡이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건 아마 정혁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안트로이아의 복부를 뜯어 낸 지팡이는 더 날아가지 않고 공중에서 멈췄고 뜯어진 복부에서 안트로이아의 핵이 보였다.

    저것만 파괴하면 안트로이아는 소멸될 것이다.

    정혁은 고개를 들어 제로니막스를 보았다.

    제로니막스는 이제 거의 사색이 되었다.

    이 정도까지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겠지.

    정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순식간에 안트로이아의 곁으로 이동해 그의 불타오르는 건틀릿으로 안트로리아의 핵을 신체에서 뜯어냈다.

    소리 없는 발버둥이 한참 이어졌다가 끊어졌다.

    [교만의 군주 악마 ‘안트로이아’가 쓰러졌습니다. 당신은 전설급 재료 ‘악마 핵’의 소유권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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