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라테 역시 정혁의 치명타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육탄전으로 버티던 그는 곧바로 자신이 가진 온갖 화염 마법을 안트로이아에게 쏟아 부었다.
정혁은 안트로이아의 다리에 작은 균열이 난 것을 확인하고 특급 필살기, 때린 곳 계속 때리기를 시전했다.
마치 피를 빨기 위해 사람에게 달려드는 모기처럼 안트로이아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쏟아지는 라테의 화염 마법들에도 개의치 않은 채 정혁은 계속해서 다리의 균열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라테의 화염은 염제 칭호를 가진 그에게 뜨끈한 안마나 다름없다.
정혁을 공격하기 위해서 지면이나 공중에서 날아드는 암흑 마법이 실린 돌덩이들, 그리고 각종 저주 마법들 역시 라테의 화염 마법에 모두 상쇄되었다.
이건 온전히 정혁만이 할 수 있는, 남들이 보기엔 자살 작전이라고 여길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전법이었다.
결국 안트로이아는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덩치가 내려앉자 지면이 강하게 울렸다.
엘라와 신나게 놀고 있던(?) 제로니막스도 뒤를 돌아보며 진동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제로니막스는 그의 얼굴로 날아드는 엘라의 나무 주먹을 막아내고 곧바로 그녀의 복부를 내려쳐 바닥으로 처박아 버렸다.
그 순간 검은 빛과 함께 사라진 제로니막스는 의기양양해진 정혁 앞에 나타나 한마디 했다.
“하여튼, 저 덩치, 박박 우기더니 말이야”
정혁은 제로니막스의 갑작스런 등장에 반사적으로 염구를 그에게 날렸다.
그러나 염구는 제로니막스의 사방에서 뭔가에 잡힌 듯 움직임을 멈추고 작게 진동하다가 하나둘씩 바스라져 없어지기 시작했다.
“에헤이, 그, 거 얼마짜린데. 쯧.”
정혁이 인상을 구기며 제로니막스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망치를 피하곤 몸을 붕 띄워 손을 뻗은 뒤 검은 마나를 마구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빨려 들어가듯 안트로이아에게 흡수되었다.
“이이이익!”
어느새 엘라가 벌게진 얼굴로 정혁 옆에 섰다.
그녀는 양손에 주먹을 불끈 쥐고서 부르르 떨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쉽지 않은 전투에 스스로도 짜증이 많이 난 모양이었다.
그에 반해 라테는 여유롭게 다시 작아져서 정혁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엘라는 라테의 모습에서도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튼, 이상한데서 속이 좁다니까.’
“어떻게 하나 보자.”
정혁의 주위에 펼쳐진 은행잎 보호막이 화염에 흩날리며 그들을 완전히 보호해 주고 있었다.
아스칼은 크고 작은 소음을 내며 아크 제국의 병력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있었고 아린의 병력들이 아크 제국의 병력들을 천천히 압도하고 있다.
박달수는 아린을 보호하느라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진작 아크 제국의 병력들이나 공중에서 계속 난사되는 화염에 둘러싸인 돌덩이 때문에 아린이 크게 다쳤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제로니막스는 전과 같은 수모를 겪지 않으려거든 에드리아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야 최정예 병력들이 에드리아를 철저히 지키고 있으며 만나 본 바 에드리아 역시 상당히 강한 흑마법사로 탈바꿈하였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아린이 결국 그녀를 무너트리고 말리라.
결의를 다지고 시작한 전쟁이기 때문에.
교만의 군주 안트로이아는 이름값을 철저히 한 탓에 감히 대장장이 앞에서 돌덩이인 자신의 신체를 들이미는 착오를 저질렀다.
그의 힘은 강하긴 했지만 라테가 버티고 있다면 정혁이 안트로이아를 밀어붙이는 데 큰 어려움을 없을 것이다.
제로니막스가 주입한 검은 마나로 인해 안트로이아의 상처 난 다리는 순식간에 치유됐지만 오히려 치유의 과정이 안트로이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듯했다.
안트로이아의 검은 안광이 살짝 일그러졌다.
안트로이아의 기세가 순간 사방으로 방출되었다.
정혁이 팔을 들어 강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아섰다.
보호막이 울렁거렸고 재가 번쩍이며 흩날렸다.
“멍청한 놈이랑 같이 와서 나도 답답하긴 해.”
제로니막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도가 되었거든. 물론, 성공했고 말이야.”
그의 능글맞은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다.
제로니막스는 자신의 머리에 돋아난 뿔을 쓰다듬다가 공중에 누워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뭘 성공했다는 거야.”
“에이, 알면서 그런다.”
‘혹시, 녀석은 안트로이아의 흑마법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여전히 오아시스에 남아 힘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걸까?’
"알고 있지? 그런 표정이라면 분명 너도 짐작하고 있는 거야."
제로니막스가 싱글거렸다.
만약 이 모든 일이 계획의 일환이었다면 이번 전쟁은 그들에게도 도전적인 시도가 담겨 있었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보기 좋은 실험 쥐 신세인 거고.’
“그래서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정혁이 언짢은 기분으로 제로니막스에게 말했지만 제로니막스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 아니, 우린 이 정도면 됐어.”
그는 안트로이아의 어깨 위에 도도하게 섰다.
그리고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마나 줄기를 보며 그 끝에 있는 에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야. 하등 쓸모없는 필멸자에게 귀속되어서. 안 그래? 노망난 나뭇가지, 그리고 위대에하시인- 불의 정령왕 나으리?”
뭔가, 딱 하고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엘라는 이제 부들거리다 못해 이빨까지 딱딱 거리고 있었다.
“섭리는 어기고 있는 것은 그쪽이다. 우리를 창조한 분의 뜻은 이러하지 않았다.”
라테가 웅장한 목소리로 제로니막스에게 말하자 그가 두 손을 들어 계속 떠들어보라는 듯이 접었다 폈다 하며 라테를 조롱했다.
라테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어차피 너희들은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아크 나부랭이가 마계에서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존재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라테의 말을 끝으로 제로니막스의 주변에 엄청난 동그란 화염구가 수십 개 펼쳐지더니 그것이 점점 커져서 순식간에 폭발했다.
이는 안트로이아의 머리와 제로니막스를 집어삼켰는데 폭발과 더불어 검은 연기를 걷어 내며 멀쩡하게 제로니막스가 등장했다.
안트로이아는 입 밖으로 삼켰던 화염 덩어리를 뱉어냈다.
“어이, 이 양반아. 언젯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제로니막스가 안트로이아의 어깨 위에서 사라졌다.
그의 말이 정혁의 귓가를 스쳐 어딘가로 나아간다.
“이제는 이런 구속도 필요가 없어졌다니까?”
그는 곧바로 에드리아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차.
안트로이아를 통해 이 세계에 통용되던 제약의 해제를 깨닫게 된 제로니막스는 모든 금제를 풀어 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소환사인 에드리아를 죽이려는 속셈이다.
안 된다.
에드리아가 이대로 그의 손에 죽게 된다면 아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지도자가 무너지는 모습을 그를 따르는 자들이 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둬서는 안 된다.
“저 새끼가!”
정혁이 고개를 돌려 손을 뻗어 보았지만 염구가 없다.
일전에 모두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당황한 표정의 에드리아,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에드리아에게 돌진하는 제로니막스.
그 찰나에 아린의 검이 제로니막스와 에드리아 사이를 막아 선다.
제로니막스의 날이 선 손가락은 아린의 검에 막히고 아린은 그 반동으로 한참 뒤로 날아갔다.
금세 선조들의 병력이 주변으로 달려들어 에드리아를 보호하고 있던 아크 제국의 병력을 밀어붙인다.
아린은 사색이 된 박달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에드리아가 아린을 돌아보곤 슬픔과 연민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쯧.”
제로니막스가 살짝 부러진 손톱을 보며 혀를 차곤 아린을 쳐다보았다.
“멍청하긴.”
제로니막스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자 정혁은 틈을 놓치지 않고 제로니막스에게 달려들었다.
망치를 한 번 휘두르자 화염의 물결이 지면에서 터져나와 그대로 제로니막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라테는 다시 거대해져 안트로이아의 주먹을 틀어막았고 엘라 역시 거대한 은행잎 창 수십 발을 상공에서 정확히 제로니막스를 향해 내리꽂았다.
약간의 충격을 입은 아린이 몸을 추스르며 에드리아를 향해 달려갔다.
박달수는 차마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에드리아!”
아린이 고함을 쳤다.
에드리아는 아까의 이상한 표정을 거둔 채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아린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린!”
아린은 하마터면 에드리아를 끌어안을 뻔했다.
그러나 그는 이성을 되찾고 겨우 그녀의 앞에서 멈춰 섰다.
아린의 손에는 양손 검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정신 차려.”
“아쉽네. 내가 그렇게 잘해 줬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한 번 안아 주지도 않고.”
에드리아가 시선을 떨구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아린이 그녀에게 안겼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박달수는 안절부절 못하며 아린의 옆으로 달려가 한 손으로 그를 막았다.
“육탄전으로도, 마법으로도 지금 국왕님의 힘으로는 저 여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물러나시죠! 지금은 국왕님의 호위 병력들이 이곳을 정리해 주길 기다려야 합니다! 전세는 아직 우리에게 유리…!”
아린은 에드리아를 바라보면서 박달수의 손을 밀쳐 냈다.
박달수는 말을 그만 두고 입을 다물었다.
“알아요. 압니다. 그렇지만.”
아린의 눈가가 조금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에드리아의 몰골은 처참했다.
입고 있는 옷부터 행색까지 길지 않은 시간 아크 제국에 있으면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넌 괜찮은 거야?”
아린이 감정을 겨우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에드리아는 아린의 말에 허탈하게 웃다가 갑작스레 표정이 바뀌어서 차가운 낯빛으로 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아린을 보기만 했다.
엘라와 정혁이 제로니막스를 밀어붙이고 있다.
안트로이아와 라테는 서로 온갖 마법과 저주가 섞인 육탄전을 벌이고 주변의 남은 아크 제국 병력들은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에게 쓸려 나가고 있다.
까마귀 편대가 공중에서 창과 화살을 쏘아 대고 불꽃이 일었다가 돌덩이가 떨어졌다가 누군가의 비명과 누군가의 고함과 복잡하고 정신없는 이 전장 한가운데 어린 왕과 그의 안타까운 인연은 정지된 사진처럼 멈춰 있다.
“…내가 깨달은 진실이 더 값지기에….”
에드리아가 입을 열었다.
“네 위로 같은 것은 가치 없어.”
그녀가 두 손 가득 검은 마나를 응집해 아린을 공격했다.
아린은 그녀의 공격 앞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박달수가 그녀의 암흑구를 비틀어 막았고 그와 동시에 눈을 부릅뜨며 아린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돼서는 승산이 없다.
아린은 이미 의지를 잃은 것 같았다.
“…결국은 그렇구나.”
아린은 작게 중얼거리고 검을 놓았다.
그리고 손으로 목걸이를 쥐며 눈을 감았다.
주변에 산개되어 있던 선조들의 영혼이 아린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에드리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 다를 바 없었던 네게 받은 작은 위로 때문에 버티고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 고마워.”
아린은 담담히 에드리아를 바라보았다.
푸른 물결이 일고 선조들의 공격이 에드리아에게 집중된다.
에드리아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공격을 튕겨 내 보지만 역부족이다.
아린은 이를 갈고 버티는 에드리아를 보면서 작게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