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69화 (69/200)
  • ◈69화

    정혁은 인상을 쓰면서도 유르겐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그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유르겐은 뒷짐을 지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군주급 악마 둘에 고대 엔트, 그리고 불의 정령왕, 더불어 이 넓은 범위 전체의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힘. 이제까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뽑아 먹을 수 없었던 강렬함이야. 상상 이상이라니까 진짜.”

    그리고 그는 정혁에게 돌아서며 싱긋 웃었다.

    “역시,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서로 똥줄 타는 건 마찬가진가 봐.”

    무슨 헛소리인지, 정혁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유르겐을 주시했다.

    그는 갑자기 왜 이곳에 온 것일까? 이 난리통인 전장에 말이다.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조용해 졌을 때 와도 충분했을 텐데말이다.

    “궁금하지?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이런 정혁의 심정을 정확히 알았는지 유르겐이 싱긋 웃으며 정혁에게 말했다.

    그의 백색 옷깃이 한 번 펄럭였고 손에서 작은 브로치가 등장했다.

    브로치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몇 번 만나 봤을 거야. 검은 말 문신을 가진 집단, 이니셜이 새겨진 자들 말이야.”

    “우리와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것 정도는 말고 있어.”

    “맞아. 싸워 봤겠지. 그들에게 너는 중심화두니까. 그들이 이제까지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는 자들을 관리하고 처치했었으니까. 세계의 마지막 조각이 등장하고 나서는 더욱 바빠졌을 테고.”

    “마지막 조각?”

    유르겐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정혁의 반응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몰라? 네가 마지막 조각인 거? 이제 더 이상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자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네가 끝이야.”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신이라는 놈이 부여하는 거라면 정혁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일까? 왜 정혁이 제일 마지막이 되었을까? 정혁은 자신이 아직도 모르는 것이 한참 많다는 사실에 조금 좌절했다.

    “아휴, 이건 샌님 만나게 되면 다 알게 될 거고. 어쨌든 이거 받아.”

    유르겐은 정혁에게 브로치를 튕겨서 보내 주었다.

    망치를 바닥에 떨구며 받아 낸 브로치는 기분 나쁜 빛을 계속해서 발하고 있었다.

    “그 검은 말 조직의 하수인들이 위험에 처하면 사용하는 브로치야. 반짝이면 위치를 알려 주고 빛이 강렬해 질수록 지원군이 오고 있거나 자신의 상급자가 도우러 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

    “글쎄?”

    “참, 너도… 그 잭슨인가 뭔가가 이 브로치를 가지고 있어.”

    “…잭슨이 그쪽 사람이라는 건가?”

    “아니, 무슨 소리야. 일전에 너와 함께 전투를 벌이다 뭔지도 모르고 주워갔었던 거야.”

    “잠깐만, 그럼? 자유 연맹에?”

    “그래. 멍청아.”

    유르겐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자유 연맹, 그자들은 당장에 아크 제국만이 그들의 적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이 너를 잠시 받아들였던 이상 그 조직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잭슨이 쥐고 있는 브로치 덕분에 더욱 빠르게 중심부를 타격할 기회를 얻었을 거야.”

    정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좀 다른 전개다.

    자유 연맹이 온전한 상태에서 제논 연합의 구성원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카탈 대륙은 이렇게 통일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더 큰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안전한 기회를 얻게 될 테니 말이다.

    겨우 아크 제국을 밀어냈는데 자유 연맹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채로 형체만 남아 있다면 제논은 빈껍데기를 끌어안고 속부터 채워 나가야 하는 불상사를 떠안게 된다.

    이는 정혁이 그리고 있는 제논의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해 보면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적당히 하고 얼른 여기를 정리하라구.”

    유르겐이 약간 성질을 내며 정혁에게 핀잔을 건넸다.

    “…그래, 이제 좀 이해가 된다. 고마워.”

    “알겠고, 네 마나 더 뽑아 썼다간 오히려 내가 버티기 어려울 것 같으니 이만 나는 물러간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빨리 정리하고 자유 연맹에 가 보는 게 좋을 거야. 아차차.”

    그가 정혁에게 손짓했다.

    정혁은 얼떨결에 손에 들고 있던 브로치를 그에게 다시 던져 주었고 유르겐은 그것을 완전히 박살 내었다.

    “다음엔 저쪽 대륙에서 만나자구. 안나하고 함께 말이야. 마나는 잘 빌려 썼어.”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킴과 동시에 딱 하며 손가락을 쳤다.

    손가락의 마찰 소리와 함께 정지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며 유르겐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전장은 여러 함성과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죽어 가는 어떤 이들이 비명과 광기에 찬 소음들로 가득 찼다.

    정혁은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하마터면 다시 그에게 날아오는 여러 마법과 무기들을 그대로 맞을 뻔했다.

    시간이 없다.

    정혁은 마지막에 유르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보며 곧바로 그곳으로 날아갔다.

    염구가 전방위 모든 공격을 관통하며 상쇄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교만의 자식이자, 군주인 악마 안트로이아와 마나 줄기로 연결된 군단장급 흑마법사가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아크 제국의 병력들이 정혁에게 달려들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정혁은 주변의 모든 적들을 일제히 쓸어 넘기며 당황한 흑마법사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순간 그의 엄청난 흑마법이 사방의 모든 생명들을 앗아갔다.

    정혁은 피아 식별 없이 퍼진 생명력 갈취 마법을 대항해 화염 망치를 회전시켜 격리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모든 생명력을 흡수한 흑마법사는 더욱 강력해진 마나 줄기를 안트로이아에게 공급했다.

    그러자 정혁의 주변으로 땅속 깊숙이 있었던 것 같은 암석들이 지면을 뚫고 튀어나와 작은 골렘들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잔재주는.”

    정혁은 굳은 표정으로 골렘들이 미처 생성되기도 전에 그것들을 낙뢰와 화염으로 분쇄시켰다.

    그리고 염구 8개를 동시에 흑마법사의 몸 안으로 관통시켜 버렸다.

    그는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마나의 줄기는 그렇게 옅어지는 듯했다.

    꾸웅 하는 소리와 함께 뒤를 돌아보니 라테가 한 대 얻어맞고 쓰러져 있었다.

    힘의 원천이 되는 흑마법사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안트로이아의 기세는 꺾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정혁은 잠시 뒷목이 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안트로이아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런 그와 계약을 과연 한 것일까? 정혁은 로그아웃된 흑마법사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시체를 보면서 정혁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크, 이들은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마계의 존재들이 오아시스에 나타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중간 매개체가 없이 바로 이곳에 발을 뻗을 수 있는 방법.

    제로니막스는 아직 그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지만 이 안트로이아는 그런 제약이 없이 이곳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트로이아는 이곳에서 반드시 죽여 없애야만 한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교만의 군주를 완전히 멸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도 이 땅에 발을 디딘 안트로이아 역시 만만치 않은 의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정혁은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엘라의 상황도 썩 좋진 않다.

    엄연히 말하면 아무리 만 년이 된 고대 엔트라 할지라도, 자연의 비호를 받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은행나무 군락지가 아니라 이런 척박한 곳에서 악마 군주를 상대로 본인의 힘만 가지고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박이다.

    실제로 제로니막스는 특유의 허허실실로 엘라를 상대하고 있으나 반면 엘라는 사력을 다하고 있는 느낌이다.

    애초에 존재의 등급 자체로 따져도 제로니막스가 상위에 있다.

    이런 정혁의 추측으로 보면 유르겐의 말처럼 빠른 정리는 쉽지 않다.

    유르겐도 안트로이아를 소환한 흑마법사만 처리하면 될 거라는 생각에 손가락으로 그의 위치를 알려 주고 사라졌을 것이다.

    ‘자식, 똑똑한 척 다하더니 도긴개긴이었으면서.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완력이다. 힘으로 밀어 붙어야 한다.’

    정혁은 침을 한 번 뱉고 어깨를 풀었다.

    저 멀리 아린과 그의 병력들이 분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떻게든 그들이 에드리아에게 닿기를 바랐다.

    ‘엘라야 조금 더 고생해도 괜찮아.일단 안트로이아부터 완전히 세계에서 지워 버리자.’

    라테를 돕는다면 금방 해결 될 일이었다.

    “정혁 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몇 번 진동했다.

    그의 곁에 다가온 자는 자신의 손보다 몇 배는 큰 건틀릿을 끼고 있는 아스칼이었다.

    건틀릿 여기저기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조각들이 붙어 있었다.

    정혁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싸우는 걸 보는건 또 오랜만이네요!”

    어째,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키야, 언제 이렇게 대단해지셨답니까? 소문보다 더하시네. 염구도 그렇고!”

    아드레날린이 폭주해도 엄청나게 폭주한 것 같은 느낌.

    그래도 정혁은 잘됐다는 생각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바쁘지 않으면 주변 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스칼은 호탕하게 웃고는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바쁘긴 한데, 저놈 잡으러 가시는 거면 제가 도와드리죠.”

    아스칼이 고개를 까딱하며 안트로이아를 가리켰다.

    정혁은 옅게 웃으면서 그의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스칼 역시 주먹을 돌리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크 병력들과 분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활로를 열어 준다.

    정혁은 주변의 방해를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안트로이아에게로 거침없이 전진했다.

    [할 만한 거지?]

    정혁이 라테에게 전음을 보냈다.

    라테는 아무 대답 없이 안트로이아와의 전투를 계속 이어 나갔다.

    주변은 거의 불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화염의 고위 마법사나 펼칠 수 있는 메테오를 시시각각 떨어트리는 통에 사방은 뜨겁고 떨어지는 돌덩이를 계속해서 피해야만 했다.

    물론 정혁에게는 화염 내성이 완벽히 적용되어 있어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다른 병력들은 라테와 안트로이아의 전투 반경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혁은 즉각 염구를 안트로이아에게 날려 봤다.

    순간적으로 라테의 화기를 흡수한 염구가 엄청난 고열과 함께 안트로이아를 관통할 기세로 날아갔지만 큰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쳐 추락했다.

    염구는 소용이 없다.

    방법이 있을까? 그러다 정혁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며 자신의 망치를 보았다.

    자신의 망치는 대장장이의 작업 도구.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전투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장간에서는 불과 전기를 마음껏 써서 최고의 무기와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다.

    대장장이인 정혁은 저런 광물 조각들에 사족을 못 쓰는 직업이기도 하다.

    안트로이아도 마계 특수 광물로 이루어진 신체.

    엄청난 강도를 자랑한다고 해도 광물은 광물이다.

    이 망치와는 완전 상극일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니 참, 너 잘 걸렸다.’

    정혁은 특유의 잔혹한 미소를 완연히 띠며 안트로리아의 다리 쪽으로 접근했다.

    라테와 안트로이아가 부딪치면 그때마다 크고 작은 충격파가 일었다.

    피부로 와 닿는 이 충격파 때문에 접근은 쉽지 않았으나 그것들을 뚫고 정혁은 안트로이아의 다리에 두 망치를 그대로 내리쳤다.

    강력한 전력과 화기가 안트로이아의 다리를 감쌌다.

    평소에 정혁이 자주 들었던 뭔가를 제련하거나 연마할 때 나는 소리가 익숙하게 귀에 들렸고 안트로이아는 뜻밖의 치명타에 놀라 그 큰 덩치를 뒤로 물렸다.

    “넌 인마,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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