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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68화 (68/200)
  • ◈68화

    에드리아는 거의 넝마에 가까운 구멍 난 가죽 옷을 입고서 긴 검은 망토를 걸쳤다.

    다른 고위 흑마법사들처럼 망토에 딸린 모자를 머리끝까지 올려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붉은 안광을 지니고 있는 것은 똑같다.

    구멍 난 가죽 옷 사이로 크고 작은 상처들이 비쳐진다.

    엄청난 고문의 흔적이다.

    얼굴은 거의 잿빛에 가깝다.

    원래도 어두운 톤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 엘프이지만 유독 더 어두워 보인다.

    그녀는 오른손에 작은 마법봉과 왼손에 긴 철퇴를 쥐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이미 익숙해 보였다.

    더불어 엘라와 대난투를 벌이고 있는 제로니막스를 향해 이어진 검은 마나의 줄기가 어렴풋이 보였다.

    “내 꼬맹이를 데리고 가더니 왕을 만들어 버렸네?”

    전보다 더 가늘어진 목소리가 정혁의 귀를 불쾌하게 간지럽혔다.

    그녀는 정혁을 밟고 있는 채로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완력으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마도 찰나의 순간에 결박 마법까지 걸린 모양이었다.

    결박 마법은 주변의 흑마법사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 그에게 적용되고 있었고 정혁은 발버둥 치려 해 봤지만 마치 현실 세계에서 경험해 본 가위처럼 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중요시하던 은행나무 엘프로서의 긍지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정혁이 인상을 구기며 조롱하듯 말하자 가슴을 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긍지? 하, 내가 마주한 진실 앞에 그런 단어는 하찮기 그지없었지.”

    에드리아는 표독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서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전쟁, 공포, 환희, 전율. 모든 것이 다 그분의 뜻이라면, 하긴 너 같은 인간 따위가 그 넓은 그분의 지혜를 따라 갈 수 있을까?”

    “더러운 악마 추종자 주제에”

    “악마 추종자? 아, 제로니막스? 아니면 아크?”

    에드리아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정혁을 바라본다.

    “그래, 인간 따위가 생각해 봐야 겨우 거기서 거기겠지.”

    그녀는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말했다.

    “이 세계, 이 모든 구성, 이 모든 흐름. 마치 과거에서부터 영광으로 쌓여진 아름다운 삶의 조각이라고 생각하는 현실. 실은 허구, 거짓, 연극이자 장난일 뿐.”

    ‘무슨 개소리야.단단히 미쳐 돌았구먼.’

    정혁은 그녀가 말에 힘을 줄 때마다 강렬해지는 안광을 보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도움이 필요하나?]

    라테가 정혁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라테는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다행히 은행나무 엘프의 전력은 한참 뒤에 있고 이곳은 적의 최후방, 이미 주변에 더 강한 힘을 가진 흑마법사들이 정혁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라 틈을 만들기 어렵다.

    결국은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가장 명확한 해답이 될 것이다.

    이 마법에서 풀려나기만 한다면 다시 주변을 빠르게 제압할 수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의 손으로 에드리아를 정리할 수는 없다.

    에드리아의 생을 끝낼 수 있는 건 비참하겠지만 아린에게 맡겨야 한다.

    [도와줄 수 있겠어?]

    [물론이다.]

    순간 정혁의 건틀릿이 빛을 발했다.

    에드리아는 이에 놀라 뒤로 물러섰고 빛은 곧 엄청난 화염으로 변화해 사방으로 솟구쳐 올랐다.

    지면을 뚫고 올라온 화염의 용오름은 일대의 흑마법사들 여럿을 일격에 로그아웃시켰고 거센 열기와 함께 불의 정령왕 라테가 위용을 자랑하며 땅 위에 섰다.

    에드리아는 라테를 올려다보며 자지러지게 웃어 넘겼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오랫동안 염원했던 어떤 것을 이룬 듯한 느낌이었다.

    라테가 주변의 흑마법사들을 압살하고 있는 순간에 공중에 마계로 통하는 문이 갑자기 생기더니 곧바로 완전히 열려 그 속에서 엄청난 기세와 함께 검고 탁한 돌덩이들로 이루어진 거대 골렘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교만의 자식이군.”

    라테는 불타오르는 손을 두둑거리며 풀었다.

    거대 골렘이 지면에 닫자마자 충격파가 사방을 덮쳤다.

    정혁은 이제야 반응하는 몸을 재빨리 일으켜 라테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불타오르는 등갑 위에서 충격파가 주변의 모든 플레이어와 악마들, 그리고 흑마법 창조물들을 모두 터트려 증발시키는 모습을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제로니막스보다 더 무지막지한 놈이 온 것 같았다.

    ‘이 자식들, 사실 여기가 본대 아냐?’

    정혁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등 뒤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안트로이아.”

    라테는 골렘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녀석의 외형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라테만큼의 크기에 준하는 거대한 돌덩이의 집합이었다.

    양손에는 짧은 양날 도끼가 쥐어져 있었으며 불결한 마나를 전신에 두르고 엄청난 투기를 발산하고 있다.

    “난 처음 보는데?”

    “그럴 테지. 녀석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과의 계약이 이루어져야 오아시스를 밟을 수 있는 군주급 악마들의 특성상 말이 통하지 않는 저자와 계약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러나 놈들은 어떻게든 해낸 모양이군.”

    “이길 수 있는 거야?”

    “저 나무때기와 나는 태생 자체가 다르다.”

    라테가 뒤를 힐끔 보며 말했다.

    공중에서 여전히 격돌 중인 엘라가 보였다.

    그녀는 제로니막스에게 수천 발의 은행잎 창을 연사하며 라테를 노려보았다.

    “다 들려!”

    엘라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라테는 어깨를 으쓱한 뒤 곧바로 안트로이아와 격돌했다.

    둘이 격돌하는 순간 공기를 찢어 버리는 자잘한 충격파들과 폭발하는 불길이 사방으로 파괴의 합주를 시작했다.

    정혁은 자리를 피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에드리아는 둘째 치더라도 이 안트로이아라는 악마의 숙주, 군단장급 흑마법사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는 재빨리 안트로이아와 연결되어 있는 흑마법의 마나 줄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사방에서 암흑구가 날아들었다.

    정혁은 결박 마법이 풀리자 온전히 제어가 되기 시작한 염구를 암흑구를 향해 날렸다.

    미처 상쇄시키지 못한 암흑구들은 그의 두 망치가 각각 타격시켜 공격을 봉쇄했다.

    어둠 속에서 철퇴가 날아든다.

    매끄럽게 철퇴를 피하며 정혁은 그것을 던진 위치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화염의 망치를 집어던져 그곳에서 불길을 폭발시켰다.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사이 주변에서 역겨운 언데드 무리가 정혁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염구를 사방으로 펼치며 모두의 머리를 완전히 관통시켰다.

    공중에서 엄청난 수의 크고 작은 돌덩이가 지면으로 맹렬히 쏟아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강한 흑마법을 두르고 있다.

    정혁은 가까스로 그것들을 완전히 피해 내며 라테와 안트로이아를 바라보았다.

    둘은 말 그대로 치고받고 있었다.

    다행히 라테의 중갑옷은 모두 대지의 정령왕의 잔해들로 이루어져 있어 주변으로 비산되지는 않았지만 라테의 일격을 맞을 때마다 안트로이아의 잔해들이 마치 메테오 마냥 사방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제로니막스도, 안트로이아도 모두 광범위한 공격을 서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상에서 혈투를 이어 가고 있는 은행나무 엘프의 병력들과 아크 제국의 병벽들의 어처구니없는 손실도 피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공중의 까마귀 편대들은 가끔 엘라의 공격을 피하지 못해 지면으로 처박혔고 박달수는 저 멀리서 이 난전 속에 사력을 다해 아린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린은 왕의 검을 쥐고 있긴 했지만 아직 기본기가 한참 부족해 보였다.

    그래도 투지를 이어 가며 박달수의 곁에서 응전하고 있다.

    가끔 들리는 아스칼의 신난 고함 소리를 통해서 그가 아직 살아 있구나를 짐작할 뿐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멀리서 홀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개판이구만.”

    정혁은 피식 웃으면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암흑의 비수들을 낙뢰의 망치로 쳐 냈다.

    그리고 아직도 불길을 뿜어내고 있는 화염의 망치를 거둬들였다.

    염구는 반경 10m 내의 모든 적들을 모두 관통시키며 그의 주변에 적이 쉽게 돌파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혁이 여러 수를 판단하는 데 조력하고 있었다.

    [난리가 났구나.]

    순간.

    개방해 놓지 않았던 전음 채널이 갑작스레 열리더니 어떤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굵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가뜩이나 정신없는 와중에 이상한 전음이 난입하자 정혁은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는 곧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게도 안나에게 받았던 일전의 팔찌가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정혁은 안나가 그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팔찌가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은 ‘오아시스’라는 칭호를 가진 누군가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건데.’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긴 하네.]

    전음은 다시 날아들었다.

    정혁은 염구를 막아내고 그에게 덤벼드는 데스나이트 둘의 머리를 으깨 버리고 한 바퀴 굴러 암흑구들을 피해 냈다.

    집중이 흐트러진다.

    당황스러운 상황 속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망설이는 가운데 손가락을 마주치 는 “딱” 소리가 강하게 들렸다.

    순간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멈췄다.

    “어?”

    시간이 멈췄다.

    이 일대의 모든 것들이 멈춰 버렸다.

    전쟁터의 범위 전부를 집어삼킨 마법이다.

    ‘세상에, 이정도로 넓은 범위를 모두 정지시킬 수 있다니.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저 멀리서 젊은 남자가 백색의 깨끗한 로브를 입고 지면을 밟지 않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장발의 검은 머리가 양 갈래로 어깨까지 내려온다.

    머리에 백색 띠를 차고 있어서 이마까지 새는 머리카락이 없다.

    맑은 눈동자에 눈썹은 정갈했고 오뚝한 코에 밝은 색의 입술까지 여러모로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정혁과 같은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의 팔찌는 정혁의 팔찌와 동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띵 하는 알림음과 함께 그의 칭호가 눈으로 식별되었다.

    ‘오아시스의 강탈자’

    ‘칭호만 보면 완전히 악역인데?’

    남자가 손을 들자 그의 손에 정혁의 황금빛 마나와 동일한 색의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동그란 구의 형태로 응집시켰다가 자신의 몸으로 빨아들여 흡수했다.

    ‘아, 강탈자? 그렇다면 그는 정혁의 마나를 이용해 이렇게 광범위한 시간 정지 마법을 시전 시켰다는 건가?’

    “이런 마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 정도밖에 사용을 못 하는 거야?”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전쟁으로 인해 상당히 지저분해진 정혁에 비해 깔끔하고 상쾌해 보이는 그가 앞에 서자 엄청 대조되어 보였다.

    “하긴, 본래 모습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긴 하지.”

    ‘딱 느껴진다.이 자식은 겁나 재수 없는 타입이다. 확실해.’

    “야, 너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어. 왜 말이 없냐?”

    “아, 너무 싸가지 없어서 그냥 죽여 버릴까 고민 중이었거든.”

    정혁이 아무 생각 없이 속마음을 뱉었다가 아차 했다.

    그의 말에 남자는 호탕하게 웃어 재꼈다.

    정말 웃겼는지 그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하, 하. 아이고, 그래, 들었던 ‘한’의 성격은 그대로 있구나?”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었다.

    “알고 있으면 적당히 개겨라.”

    “어이구, 무서워라아-”

    남자는 두 손을 들어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곤 다시 손가락을 딱 하자 정혁의 전신이 완전히 굳어졌다.

    다른 이들처럼 시간이 멈췄다기보단 아까의 결박 마법과 같은 느낌이었다.

    “뭐, 뭐야,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거냐?”

    정혁은 놈에게 욕을 한 사발 먹여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술은 꿈틀거리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열 받은 그가 망치를 휘두르는 순간 그의 몸도 동시에 굳어졌다.

    눈동자만 굴러갈 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이렇게 딱 묶어 놓고 데리고 다니고 싶은데. 정말 최고다, 네 고유 마나는. 하, 이런 걸 나를 주지, 강탈자가 뭐냐. 하긴... 너도 대장장이인데 뭐.”

    그는 정혁의 주위를 돌며 정혁의 손에든 두 망치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손가락을 탁 하고 쳤다.

    멈췄던 정혁이 움직이며 아래로 쓰러졌다.

    남자는 손을 두 바퀴 돌려서 넘어진 정혁에게 내밀고는 말했다.

    “반가워, 난 유르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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