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67화 (67/200)
  • ◈67화

    정혁은 망치를 들고 손을 풀었고 대신 엘라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사방으로 은행잎 장벽을 펼쳐 냈다.

    하늘을 뒤덮었던 엄청난 수의 화살은 노란색 장벽에 의해서 단 한 발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 채 공중에서 막혔다.

    엘라는 뒤를 힐끔 보더니 갑자기 조그맣게 벽에 구멍을 냈고 그 사이로 화살 하나가 쑥 하고 통과해 정혁의 오른발 바로 앞으로 떨어져 박혔다.

    정혁은 깜짝 놀라서 엘라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엘라는 마치 머리에 꽂히지 않아 참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밀었다.

    ‘조걸, 그냥.’

    정혁은 한숨을 쉬면서 손에 장비된 건틀릿을 바라보았다.

    곧 도착할 은행나무 엘프들의 군대를 위해서 정혁은 이번엔 웬만하면 라테를 불러내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그의 파괴적인 불의 기운은 은행나무 엘프의 태생적 힘에 상반되기 때문에 혼전을 빚을 수 있다.

    또한 이 전쟁에서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아린의 활약이 더 강조되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엘라만 활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일 수 있다.

    이런 정혁의 의중을 들은 라테가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혔고 그는 조용히 건틀릿으로 변해서 정혁의 손에 장비되었다.

    확실히 왼손에 가이아의 심장이 각인된 이후로 착용했을 때 보다 더 안정감 있고 강해진 느낌이 많이 들었다.

    칭호의 힘이 조금 더 몸 속 깊이 심겨진 느낌이랄까?

    정혁은 대장간에서 의자를 꺼냈다.

    은행잎 장벽이 걷히고 엘라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곤 대열을 갖추고 모여드는 아크 제국의 군대를 기다리면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박달수는 공중에서 그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으나 곧 그를 향해서 날아드는 암흑 마법에 재빨리 고삐를 돌려 전초기지 장벽 안으로 피신했다.

    “우리가 아무리 계약 관계라지만 주종의 관계까지는 아니지 않아?”

    뜬금없는 엘라의 물음에 정혁이 고개를 돌려 그의 옆에 떠 있는 엘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주종의 관계지.”

    정혁은 양손이 조금 뜨거워짐을 느꼈다.

    라테 역시 불편했던 모양.

    “무슨! 주종의 관계라니! 감히 인간이 나 같은 고귀한 엔트나 말썽꾸러기에 사고뭉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령왕 정도 되는 존재를 하인으로 부릴 수 있다는 거야?”

    엘라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말썽꾸러기에 사고뭉치는 에고 장비가 되고 나서 봤을 땐 엘라, 네게 더 맞는 수식어인 것 같은데….’

    정혁은 상큼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계약서에 서명할 땐 계약서를 잘 봐야 한답니다. 고귀하신 엔트 나으리.”

    다리 꼬고 앉아 있는 포즈, 비열하게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에 조롱 섞인 눈망울까지 삼박자로 완벽한 정혁에게 엘라가 또 한 번 분노를 표출하려던 찰나 정혁이 벌떡 일어나 엘라의 양손을 잡았다.

    “어이, 고귀한 엔트 양반. 이제 난 그 허접한 인간나부랭이가 아니거든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스태프로 만들어서 저 더러운 땅 위에 던져 꽂아 버릴 거야!”

    정혁이 버럭 소리치자 양손을 붙잡힌 채 뿌리치지도 못한 엘라가 당황해서 빠져나가려 발버둥 쳤다.

    ‘어림도 없지.’

    이럴 때야말로 그녀와 상극인 라테의 힘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변태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약간의 희열을 느끼고 있는 정혁이었다.

    그 순간 엄청난 흑마법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정혁도 엘라도 이를 느끼고 재빨리 각자의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익숙한 기분, 익숙한 느낌이었다.

    전방의 아크 제국 병력들은 이제 웬만큼 정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전열의 제일 앞에는 시체의 여러 부위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거대 오우거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스켈레톤 워리어들과 그들을 부리는 암흑 소환사들, 아크 제국의 신봉자들, 검은 화살 아처들과 광전사들까지 빽빽이 들어서 있다.

    중간 이후부터는 간부급들에 해당하는 흑마법사들이 즐비해 있고 그 중심에 에드리아가 있다.

    이 강력한 흑마법의 근원은 에드리아였다.

    그녀의 전신에서 검은 오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익숙해.”

    정혁이 느끼고 있는 것을 엘라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지?”

    “제로니막스.”

    엘라는 이골이 난다는 표정으로 그 증오스러운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하나가 아니다.

    정혁은 그날을 떠올렸다.

    제로니막스와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던 날 말이다.

    제로니막스는 자신의 소환사였던 로디아의 모든 것을 흡수해 잘린 팔을 재생했다.

    그리고 정혁이 ‘한’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혼자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었다.

    그렇다는 건 군주급 흑마법사가 더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땅에 군주급 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자가 한 명 더 저 무리들 가운데 있다.

    지금은 단연 에드리아의 기운이 강하다.

    왠지 제로니막스가 그와 엘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몸 안에서 더욱 발악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에 에드리아를 또 다른 숙주로 삼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 볼 수 있다면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군주급 악마를 소환하는 힘을 이어 받았다면 에드리아에게 더 이상 정상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혁의 이런 생각에 반응이라도 하듯 저 멀리 군대의 중앙에서 잔뜩 힘을 뿜어내던 에드리아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마계의 문이 천천히 허공을 찢고 등장했다.

    온갖 해골과 고통에 찬 비명,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영혼으로 가득 장식된 마계의 문은 공중에서 삐걱거리면서 열렸고 그 속에서 결코 반갑지 않은 얼굴, 이죽거리는 악마, 자연의 파괴자 제로니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전과 달리 이 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것처럼 단단한 중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여전히 날름거리는 뱀의 혀와 포자 같은 것이 달린 꼬리는 징그럽고 꼴 보기 싫었지만 말이다.

    그는 정확히 정혁과 엘라를 바라보며 고함을 치듯 웃어 재꼈다.

    그리곤 순간 모습을 감췄다가 정혁의 코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다.

    정혁은 그의 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몸을 비틀어 그가 나타날 곳을 향해 양손을 동시에 모아 쳤다.

    두 망치가 깡 하는 소리로 맞닿았다.

    정혁의 눈앞에 다가온 제로니막스는 양손을 교차하여 두 망치를 막아 냈다.

    “호오.”

    제로니막스의 이죽거리는 웃음이 정혁의 눈 안 가득 들어왔다.

    정혁 역시 그를 보며 같이 웃어 주었다.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왔네?”

    제로니막스는 정혁의 말에 마치 전처럼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와서는 속삭이듯 말했다.

    “좀… ‘그’다워 졌다는 건가?”

    정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녀석은 자신을 ‘한’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제로니막스가 쥐고 있는 망치와 그의 팔이 동시에 떨렸다.

    곧 낙뢰와 화염이 동시에 퍼부어진다.

    그러나 제로니막스는 순식간에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고 정혁의 공격을 가뿐히 피한 채 공중에 떠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 나 진짜. 공중에 떠 있는 새끼들이 제일 싫다니까.”

    정혁이 인상을 구기면서 중얼거렸고 엘라는 그런 정혁의 눈치를 잠깐 보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 한바탕해도 되는 거지?”

    하긴, 엘라도 저 녀석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다.

    그때야 긴 세월 뚜렷한 목적 없이 살았던 삶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진작 포기했던 엘라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에고 장비는 주인과 함께 성장하는 속성을 가진 특별한 장비.

    정혁이 강해지는 것에 비례해 엘라의 각종 자연계 마법 역시 상당히 강해졌다.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뭘 물어. 가서 눌러 버려.”

    정혁의 말에 엘라는 곧바로 제로니막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의 전투를 시작으로 전방에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곧 아크 제국의 전 병력이 일제히 정혁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소리에 대지가 우렁차게 울렸다.

    어느새 정혁의 곁으로 박달수가 완전 무장을 한 채 다가왔다.

    “가, 같이 싸웁시다!”

    박달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더불어 오랜만에 보는 아스칼 역시 박달수와 함께 있었다.

    “지랄 났네.”

    여전히 걸걸한 성격이다.

    정혁은 박달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몇 대 몇까지 상대해 보셨어요?”

    박달수는 지금 이 마당에 그런 질문이 무슨 소용이냐는 표정을 지었고 정혁은 그의 표정으로 이미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요. 오늘은 질 생각 없으니까.”

    정혁은 두 망치를 굳게 쥐고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그의 두 망치는 사방으로 낙뢰와 화염을 퍼부어 댔다.

    박달수와 아스칼 역시 각자 최선을 다해 적들을 밀어 붙였다.

    염구 역시 사방에서 적들의 신체 곳곳을 관통하고 지져 댔다.

    거대한 살점 오우거 따위는 정혁의 한입거리도 되지 못했다.

    아니 그곳에 있는 모든 적들이 정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미 ‘염제’ 칭호를 통해 극도로 상승된 신체 능력과 현재 유지 중인 ‘채광 활성화’는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경이롭게 만들었다.

    어차피 앞에서 버티고 있는 탱커 역할의 적들은 필요없다.

    아크 제국의 가장 강한 중심 직업군은 흑마법사들이기 때문에 정혁은 정면을 뚫어내며 병력의 후미를 향해 거침없이 돌파했다.

    이미 스켈레톤 워리어나 하급 악마들을 소환하던 소환사들 대부분은 정혁의 손에 도륙이 났다.

    순간 날카로운 검기가 정혁의 앞길을 막았다.

    옆을 보니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아크 제국의 광전사 플레이어가 붉은 저주 마법을 잔뜩 두른 양손 검을 들고 잔인하게 웃으며 그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케헥, 쉽게 보내 줄 성….”

    “뭐래.”

    정혁은 간단히 염구로 그의 두 다리를 관통시켜 무너트린 뒤 전력의 망치로 그의 정수리를 그대로 내리쳐 한 번에 로그아웃시켜 버렸다.

    ‘귀찮은 엑스트라 1 같은 놈이네.’

    정혁은 비슷하게 그를 막아서는 수도 없이 많은 플레이어들을 모두 일격에 하나하나 쓸어 버리며 계속해서 상대 진영 후미를 향해 나아갔다.

    이미 박달수와는 멀어진 상태였다.

    알아서 잘 버티려니 생각은 들었지만 조금 걱정이 되려던 찰나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의 고함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다.

    전초기지의 방벽이 마법에 의해 무너지고 그 방벽을 밟으며 은행나무 엘프의 병력들이 위용 넘치게 진격한다.

    방벽을 쓰러트렸다는 것은 뒤로 숨지 않겠다.

    즉, 후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의 표시와 같다.

    그와 동시에 아린의 죽일 수 없는 군대, 은행나무 엘프 선조들의 힘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

    거리가 멀어지다 보니 은행나무 군락지 때보다는 많지 않은 수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존재만으로 은행나무 엘프들에게 힘을 준다.

    “한눈팔기엔 아직 이른데?”

    “아이씨, 또 무슨 엑스트라…!”

    정혁은 순식간에 가슴 안으로 밀려드는 암흑구에 직격으로 맞고 한참을 밀려 나가떨어졌다.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려 하는데 그런 그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 날카로운 하이힐이 암흑구를 맞은 가슴에 내리꽂혀 압박했다.

    “큭!”

    입으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다행히 체력 소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지속 내출혈 데미지를 입은 것 같았다.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정혁은 정신을 차리며 자신을 밟아 누르고 있는 건방진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에드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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