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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66화 (66/200)
  • ◈66화

    대화를 끝내고 수행원들의 다소 불평이 섞인 안내와 함께 방으로 향하는데 박달수가 달라붙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정혁은 그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뿐더러 이 왕국까지의 여정이 꽤나 피곤했기 때문에 그의 말들을 가뿐히 무시했다.

    박달수는 이내 의지를 꺾고 그의 방문 앞에서 씁쓸한 얼굴로 좋은 밤이 되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정혁은 작은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금세 샤워실 너머로 수증기를 뿜어 댔고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는 샤워기 물속으로 들어가 벽에 몸을 대고 섰다.

    낯설다.

    정혁의 말대로 이전 같았다면 아린의 현재 상태 따위 안중에도 없이 그 스스로 해 볼 만하다는 판단하에 아크 제국의 측면 돌파를 강행했을 것이다.

    에드리아? 알 게 뭔가.

    어차피 베어지거나 혹은 태워지거나 얼굴도 모른 채 죽어 가는 적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 본연의 몸으로 플레이하게 되고서는 주변을 조금 더 챙기게 되는 것 같다가도 이런 자신이 불쾌해지는 마음이 가끔씩 고개를 들게 된다.

    이 마음은 오히려 아무런 힘이 없었던 때에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점점 ‘한’과 비슷한 궤도에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마다 불쾌감은 더 심해진다.

    두 개의 마음이 한 곳에서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것만 같다.

    [연합 지도자님?]

    “으에이어엑!”

    정혁이 화들짝 놀라서 샤워장 밖으로 뛰쳐나왔다가 자신이 알몸인 것을 자각하고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곤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곧 이 목소리가 전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고 곧바로 열이 머리까지 뻗쳐오름을 느끼며 샤워기의 물을 꺼 버렸다.

    전음의 주인공은 하늬안이었다.

    [자나여?]

    ‘존대도 아니고 반말도 아니고.’

    정혁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잠시 혼자 투덜거리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 자.]

    [세상 열심히 날뛰고 있다는 소식은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고 안나 님께서도 말씀하시구여.]

    [그, 그 ‘여’ 자는 좀 불쾌한데 안 쓰면 안 될까?]

    [왜여?]

    ‘진짜.한결같은 여자다.’

    [아니다.]

    정혁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꼬맹이 만났다면서?]

    장난기 가득했던 하늬안의 목소리가 조금 진중해지고 정혁은 그녀가 어떻게 방금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 꼬맹이랑 가끔 전음으로 대화를 했었어. 친히 국왕께서 전음을 허락해 주셨거든. 보통은 꼬맹이가 먼저 연락을 해야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긴 했지만.]

    그랬구나.

    둘은 종종 대화를 나누고 있었구나.

    어쩌면 그 편이 아린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박달수야 급히 만난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해도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겠지.

    연고도 없고 사방이 적밖에 없는 이곳에서 홀로 왕의 직무를 감당해야 했던 어린 아린이었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뭐라디?]

    [좀 웃기긴 했는데, 뭐 위로를 해 줬다며?]

    하늬안의 목소리에서 황당함과 어처구니없다는 뉘앙스가 잔뜩 느껴졌다.

    맘 같아서는 코앞에다 데려다 놓고 꿀밤이라도 때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심란한 마음이 들던 차였는데.’

    [고맙다고. 그냥, 그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

    곧바로 하늬안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혁은 뿔난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그대로 침대 안으로 몸을 뉘였다.

    침대 위에는 달빛이 잔잔히 그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고 정혁은 눈을 감으며 콧속으로 들어오는 오래된 나무의 향기와 주변의 옅은 바람과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달빛을 마음껏 감상했다.

    [안나 님에게 자주 보고받고 있겠지만 연합은 네가 구상한 대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고 있어. 내부에 이미 꽤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여기에 8할은 모두 전설과 같은 네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야. 또한 썩었던 제논이 무너지고 다시 길드로 돌아온 사람들도 많아. 이들은 각 부서에 알맞게 배치되어 최고의 효율을 보여 주고 있어. 모두 같은 마음으로 같은 미래를 그려 나가는 중이야.]

    정혁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오랜만에 평온함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네가 최전방에서 노력해 주고 있는 덕분이라고 우리 모두는 생각해. 그리고 언젠가 네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날 우리는 아마 최선을 다해 너의 목표이자 우리 연합의 목표를 위해 응전하게 될 거야.]

    정혁은 조금 나른해지는 기분과 함께 하늬안의 전음이 옅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말라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르겠다.

    정혁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정혁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정혁은 ‘한’을 만났다.

    그의 양손은 피 범벅이었고 악몽의 비수에 칼날에 맺힌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이 표독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나에게서 벗어난 거라 생각해?’

    정혁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네가 아무리 나와 같다고 해도 결코 나일 순 없을 텐데?’

    섬뜩한 칼날이 정혁의 심장 앞에서 멈춰 선다.

    가슴 앞에 악몽의 비수가 금방이라도 깊숙이 찌를 듯 버티고 서 있다.

    ‘한’의 잔혹한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모든 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너라는 가짜는 사라지게 될 테지.’

    한의 목소리가 옅어진다.

    불쾌한 꿈이라고 정혁은 꿈속에서 생각했다.

    ***

    “정혁 님!”

    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혁은 잠에서 깼다.

    박달수의 목소리였다.

    개운하게 잤다고 느끼면 좋으련만 생각보다 상쾌하지 못한 아침이었다.

    정혁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일어났다며 잠시 기다리라는 외침을 전하고 기지개를 켰다.

    창문 밖에는 어느새 엘라가 걸터앉아 정혁을 보고 있었고 침대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라테가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자는 거 구경하는 게 취미냐, 다들.”

    정혁의 툴툴거림에 라테도 엘라도 어깨를 으쓱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입고 채비를 하는 정혁에게 엘라가 소리 없이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다들 번잡해.”

    “전쟁을 준비하는 거야.”

    보지도 않고 알고 있다는 것처럼 정혁이 대답했다.

    “전쟁?”

    “그래, 아크 제국과의 전쟁.”

    엘라는 이빨로 작게 까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미 그 대상만으로도 엘라의 사기는 충분히 충전된 것 같았다.

    파괴왕 라테야 뭐, 전쟁이라는 단어에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고.

    “아크 제국이라면 건방지고 더러운 작자들을 이야기하는 거군. 마계의 악마들을 숭배하는 인간 집단.”

    라테가 말하자 엘라가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한다는 듯이 손뼉을 치다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정혁은 왠지 이전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이 서로를 노려보던 작자들이 맞나 싶어서 피식 실소를 흘렸다.

    엘라는 그의 웃음에 정신이 들었는지 민망한 얼굴로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박달수의 재촉이 계속되었다.

    정혁은 곧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었다.

    앞에는 중무장하고 있는 박달수가 서 있었다.

    그의 무장에 비하면 편안한 가죽옷 차림인 정혁의 상태는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있는 두 존재의 존재감만큼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왜 이렇게 보채십니까. 준비는 끝났습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뭐라 막 쏟아 내려던 것 같았던 박달수가 급히 입을 막았다.

    그는 엘라와 라테를 번갈아 보고는 다문 입 사이로 숨을 내쉬더니 작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이미 은행나무 엘프의 군대는 진격하고 있습니다. 새벽같이 병력을 모아 최초 전초기지를 세웠던 곳으로 향했어요. 이미 까마귀 편대들은 전초기지에 도착했을 거고 한 시간 안에 지상 병력들도 모두 전초기지에 도착 할 겁니다. 우리도 어서 가야죠!”

    “지금... 제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닙니다. 자유 연맹엔 어제 뭐라고 보고했나요?”

    발을 떼려던 박달수가 제동이 걸린 것처럼 우뚝 섰다.

    정곡을 찔린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가만히 서서 잠시 침묵했다.

    “거짓말은 굳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잭슨 사령관이나 데릭 의회장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그들의 이름이 정혁의 입에서 나오자 박달수는 몸을 돌려 정혁을 보며 대답했다.

    “전쟁이 재개될 것 같다고 이야기 했고 새벽에 진군하는 군대를 보며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재보고 했습니다. 북쪽에서 지루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던 자유 연맹의 병력들에게 이 소식은 조금이나마 떨어진 사기를 보충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자유 연맹이 북쪽 영토를 수복할 수 있을 테니까?”

    열변을 토로하던 박달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오늘 잘 지켜보고 똑바로 보고해 주세요.”

    “예?”

    “보이는 그대로 보고하기만 하시면 됩니다. 과연 당신네들이 아크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고 제논까지 넘볼 수 있을지 말입니다. 아니, 당신네들이 아크 제국의 영토를 집어삼킬 만한 그릇이 되는지에 대해서 먼저 논해 보면 좋겠군요.”

    정혁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박달수에게 고마운 점은 충분히 많다.

    그 덕분에 아린이 왕정의 기본을 다질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들은 모두 수지에 맞는 장사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지극히 비즈니스적 결과다.

    자유 연맹의 똑똑한 수뇌부는 그를 전적으로 도왔을 것이고 어차피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은행나무 엘프들이기에 이런 이례적인 상황에서 그들을 잘 이용해 먹고 치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심정이었겠지.

    만약 전선에서 밀리더라도 둘로 양분된 아크 제국의 병력들의 허점을 이용해 총공세를 쏟아 부을 작정이었을 수도 있다.

    정혁의 뒤를 따라오는 박달수의 발소리가 무겁다고 느껴졌다.

    불쾌했을 것이다.

    정혁은 엘라와 라테에게 잠시 대장간으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중앙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최상층 비행장까지 올라간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까마귀에 올라탔다.

    까마귀를 타고 왕궁을 벗어나 왕국의 도성을 지나자 여기저기 엘프 마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곧 저 멀리서 진군하고 있는 군대의 후미가 눈에 들어왔다.

    엘프 왕국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미까지는 금방 따라 잡을 수 있었고 어림잡아 5만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군대의 긴 행렬이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졌다.

    까마귀의 비행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그들은 곧 군대의 선두에서 백색 말을 타고 당당히 나아가고 있는 아린을 발견할 수 있었고 아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혁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정혁은 그를 지나 더욱 빠르게 전초기지로 향했다.

    한참을 나아가 견고하게 짜여진 나무 방책이 둘러져 있는 전초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전초기지 바깥으로 아린의 군대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 아크 제국의 군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 역시 전쟁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더불어 정혁은 그 먼 곳에서도 한눈에 가장 중앙에 사람의 뼈들로 만들어진 커다란 왕좌에 다리를 꼬고 손가락 깍지를 낀 채 앉아 있는 에드리아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까마귀는 저공비행으로 전초기지에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정혁은 그런 까마귀의 등을 밟고 도약해 전초기지의 방책 바깥으로 착지했다.

    그런 그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박달수가 까마귀의 고삐를 잡아채 다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난데없이 전방에 이상한 남자가 등장하자 순식간에 아크 군대의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곧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찢어지게 들려왔다.

    하늘을 가득 메운 화살 세례가 정혁을 반겼지만 그는 가볍게 웃으며 두 망치를 꺼내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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