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65화 (65/200)
  • ◈65화

    표정을 보니 추측이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고 확신했다.

    에드리아.

    아린이 정혁과 함께 떠날 때 그를 붙잡았던 유일한 은행나무 엘프이자 어쩌면 그의 친구였을지 모르는 엘프.

    모르긴 몰라도 잊고 싶은 기억만 남았을 은행밤 여관에서 나름 아린에게 잘 대해 주었던 유일한 존재였을 거라고 정혁은 생각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위엄 있는 국왕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린은 엘프 나이로 치면 아직 어린 왕이다.

    적통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은행나무 엘프의 왕도를 그는 아직 배워 보지도 못했다.

    지금 아린에게 이 전쟁에서 물러섬은 그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 걷어 냈다 할지라도 수천 년 이어진 국민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국민의 여론은 곧 아린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에게 힘이 될 것이다.

    이미 임팩트는 주었다.

    예언의 남자, 예언의 실현.

    그것으로 그는 왕의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자격은 언제나 빼앗을 수 있기 마련이다.

    이제는 당위성을 얻어야 할 차례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이 전쟁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의 왕이 보여 주지 않았던 또 다른 비전을 돌연변이 왕이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녀석에게 지금 필요한 말이 이것일까.’

    정혁은 달빛 아래 그의 왕좌를 기대고 선 아린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은 표정과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정혁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혹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 모르게 감았다 뜨고만 있다.

    정적 속에서 정혁은 눈을 감았다.

    “대화는?”

    그는 눈을 감고 아린에게 물었다.

    아린은 고개를 까닥 들어 초점을 찾은 눈동자로 정혁을 보며 말했다.

    “그저, 멀리서 보기만 했습니다.”

    ‘낭만을 찾고 앉았구나.’

    정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역시 어리다는 것이 이런 곳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국왕을 위한 왕궁.

    호화로운 왕좌를 둘러싼 이 거대한 공간.

    모두 왕을 위한 것.

    저 안타까운 어린 왕을 위한 것.

    녀석의 어깨가 많이 무거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까.

    “입고 있는 옷부터 분위기까지 모든 게 달라져 있었어요.”

    정혁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토 내의 모든 아크 병력들을 몰살시키고 물러 낸 뒤였습니다. 박달수 대장님의 조언과 작전 참모의 토의를 거쳐 우리는 멈추지 않고 아크 제국의 측면을 돌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며칠의 시간이 있었고 최대한 많은 병력들을 끌어모았어요. 물론 대부분은 영토를 수복하며 제 힘을 본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모두의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죠.”

    아린은 그날이 생생히 떠오르는 마냥 큰 숨을 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크 제국은 남하를 결정하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모든 전력을 몰아붙이고 있었어요. 자유 연맹도 사력을 다해 이들의 남하를 막아 내고 있었죠. 우리의 측면 공격이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했었습니다. 저 역시 아크 제국을 상당히 증오하고 있고 우리 병력들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왕국의 영토와 멀어질수록 선조들의 힘이 약해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크 제국의 병력을 마주하자 전의를 상실해 버렸구나, 우리 위대한 왕께서.”

    “여전하시군요. 그런 말투는.”

    “그럼, 너랑 다를 것 없지.”

    아린이 날이 선 목소리로 정혁에게 툴툴거렸다.

    그의 말을 정혁이 바로 받아쳤다.

    “예. 아크 제국의 병력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자가 에드리아였습니다.”

    아린이 몇 걸음 옮겨 왕좌에 앉았다.

    그가 앉자 자연의 마나가 왕좌에서 천천히 스며 나와 그를 감싸고 올라왔다.

    달빛에 반짝이는 초록빛 마나의 물결은 아름답고 찬란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왕의 얼굴엔 근심만이 가득했다.

    “어째서일까요. 어째서 그녀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아크 제국의 군사가 되어 버린 걸까요. 은행나무 엘프의 자긍심은 정혁 님도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니, 그들은 웬만해선 다른 종족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요. 목숨을 잃는 것보다 싫어합니다.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는 한 같이 밥을 먹고 생활하지도 않습니다. 거기다 은행밤에 있었던 은행나무 엘프들은 극도의 보수 세력이자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딸이었던 에드리아는 더욱 보수적이었어요. 아엘프인 제게도 은행나무의 긍지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던 아이였는데.”

    이마를 감싸고 있던 아린이 고개를 들어 정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가슴에 응어리가 가득 맺힌 목소리로 고함을 치듯 소리쳐 울분을 토해 냈다.

    “그런데! 왜 거기에 걔가 서 있냔 말이에요! 왜! 여기저기 찢어진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얼굴에 가득 어두운 화장을 하고서 더럽고 불결한 기운이 가득 찬 마나를 전신에 휘감고! 무엇에 취한 듯 잔혹한 미소만을 머금고서 말입니다! 그녀는 그 멀리서도 저를 정확히 보고 있었어요! 제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단 말입니다!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마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그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가득 맺혔다.

    “…그날 왜 자신을 도돈치아에 두고 갔냐는 듯이 말이에요.”

    다시 왕좌 깊숙이 몸을 밀어 넣고 고개를 떨구는 아린을 바라보며 정혁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대신 이공간을 열어 멋들어지게 제작된 의자 하나를 꺼내 그의 왕좌 옆에 놓고 앉아 팔짱을 꼈다.

    아린이 눈을 훔치며 정혁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왕의 단상 위에는 왕좌 말고 다른 물건은 금지예요.”

    ‘이 자식이 이럴 때도.’

    정혁은 뜬금없는 그의 말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서 오히려 더 크게 껄껄거렸다.

    ‘이거, 알고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닌가?’

    그는 속으로 생각하곤 훌쩍이는 어린 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만약에 내가 알고 있던 은행밤의 잡일꾼 아린이었다면 이런 상황에 보다 인간적인, 뭐야, 엘프적인이라고 해야 되냐? 어쨌든 그런 위로를 전했겠지만 지금은 입장이 다르니.”

    그의 말에 아린은 정신을 차리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정혁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각오 단단히 하고 들어.”

    정혁은 큰 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병력을 뒤로 물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에드리아 때문일 거라는 짐작을 했어. 도돈치아는 아크 제국에게 먹힌 상태였고 그곳에 남아 있던 몇몇의 은행나무 엘프들을 포로로 잡아 여러 실험을 하며 아마 새롭게 왕이 된 너의 역린을 찾아보려 했을 거야. 그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테니까. 네 힘은 실로 대단해서 너를 직접 타격하기 전까지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상태라 그들에게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거고 또 지금 상황을 보면 그들의 방법은 정확히 적중했다고 봐야겠지.”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린의 표정은 천천히 이성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크 제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며칠. 그들이 자유 연맹의 측면을 칠 수 있는 그 시간. 그 시간 동안만 은행나무 엘프들이 왕국의 영토 내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그렇게 자유 연맹을 집어삼키고 나면 더 큰 군세로 은행나무 엘프 왕국을 침공하겠지. 글쎄, 그땐 너의 능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이 이 영토에 군주급 악마를 풀어 놓는다면?”

    정혁의 말에 아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내가 준 목걸이가 아무리 강하고 지금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러도 압도적인 적 앞에서 마음의 강도는 물러지기 마련이야.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잡일꾼 아린이 아니라 국왕 아린이라면 이런 무른 마음은 인정할 수 없어야 해. 너 스스로.”

    정혁이 손가락을 들어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쿡쿡 찔렀다.

    아린은 그와 목걸이를 번갈아 보았다.

    “자, 내가 진솔하게 이야기해 볼까? 사실 은행나무 엘프 왕국? 너희가 전쟁에서 빠지겠다고 하면 내가 아크 제국의 측면을 밀어붙이면 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생각엔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봐.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충분해. 나는 시간을 벌어 줄 거야. 자유 연맹이 보다 효율적으로 아크 제국을 밀어붙일 때 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너를 찾아온 건.”

    ‘윽. 입이 턱하고 막히네. 이런 말을 잘하는 성격이 못 돼서.’

    정혁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돌리고서 작게 말했다.

    “그냥, 걱정되더라고.”

    그의 말에 아린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정혁을 보며 말했다.

    “그 의자가 거기 있는 건 오늘만 봐드리겠습니다.”

    “얼씨구. 그런 거 애초에 신경 안 쓰거든.”

    그의 말에 아린이 씩 웃었다.

    정혁은 몸을 일으켜 의자를 툭 쳐서 이공간으로 넣어 버리고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연이 뭔지, 어찌 되었건 네 덕분에 내 여정의 길을 찾았고 처음으로 나 자신의 가능성을 보기도 했으니까. 나도 너에게 뭔가를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목걸이를 받았잖아요.”

    아린이 목걸이를 손에 쥐며 말했다.

    “야, 그건 애초에 네 거였다니까. 내가 얼마나 아까워했는지 알아?”

    “정혁 님이라면 당연히 그러셨겠죠.”

    “어쭈.”

    ‘이 녀석은 선을 참 잘 타는 능력이 있다니까.’

    조금 풀어진 분위기.

    정혁은 다시 진중한 얼굴로 아린에게 말했다.

    “어찌 되었건 결정은 네게 맡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같이 모색하든지 아니면 나에게 맡기든지.”

    “….”

    대답이 없다.

    ‘녀석도 고민이 많겠지.’

    정혁은 고개를 들어 이 왕좌를 비추는 달빛을 담은 하늘을 보았다.

    밤이 깊다.

    밤은 밤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 향이 아련하게 정혁의 코를 간질인다.

    정혁은 알고 있다.

    악바리 꼬맹이 아린은 국왕이어도 여전히 그의 안에 남아 있다.

    또한 도돈치아에서 보여 준 날카롭고 이성적인 판단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계산을 치루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단지 혼란스러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이해해 줄 한 사람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게 하늬안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있나.공감 능력이 제로에 가까운 그라도 아린의 속사정을 이해해 줄 사람이긴 하니. 그나마 이렇게라도 그의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 그는 결정 했을 것이다.

    정혁이 아는 아린이라면 아마 결정을 했을 것이다.

    “야. 그러고 보니까 너무하긴 하네. 나 좀 쉬면 안 될까? 이거 뭐, 손님 대우가 좀 그렇다?”

    “아, 예. 맞네요. 제가 경솔했군요.”

    ‘아니, 경솔까진 아니고.’

    아린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잠시 비춰진다.

    정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단을 내려갔다.

    아린이 잠깐 눈을 깊게 감았다 뜨자 거대한 나무문이 열리고 왕궁을 관리하는 수행원들이 다시 우르르 들어왔다.

    아린은 그들에게 정혁을 위해 마련한 방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혁이 그를 향해 쉬러 가지 않을 거냐고 물었으나 아린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아린에게 긴 밤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아마 내일. 우리는 함께 전장에 나가 에드리아의 아크 제국 병력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겠지. 그렇게 될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