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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64화 (64/200)
  • ◈64화

    까마귀에 올라 뒤쪽에 따라오는 은행나무 엘프들의 눈치를 살폈다.

    정혁이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었다면 아마 정혁을 보자마자 역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아린이 집권하고 박달수나 아스칼 같은 인간들이 정치적 고문으로 함께함으로써 은행나무 엘프의 꽉 막힌 보수적 마인드에 어느 정도 숨구멍이 트인 것 같았다.

    은행나무 엘프의 까마귀 편대는 그들의 완전한 자랑으로 은행나무 엘프의 고귀한 전사들 중에서도 엘리트들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이며 그만큼 명예로운 자리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도 아무나 쉽게 탈 수 없다.

    그런 까마귀를 감히 인간이 타고 왔으며 더불어 거기에 다른 인간까지 같이 태워 간다는 것은 이전의 그들의 사상과 맞춰 봤을 때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것만 봐도 정혁은 충분히 은행나무 엘프 전체의 변화가 짐작이 갔다.

    물론 약간의 불쾌한 표정이 남아 있긴하다.

    원래 역사라는 굵직한 줄기는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강줄기 같아서 분파되어 작은 갈래로 뻗어 나갈 순 있지만 강줄기 자체의 경로를 바꾸기란 어렵다.

    어쩌면 은행나무 엘프의 역사는 이제 완전히 다른 국면을 향해 강줄기의 경로 변경 공사를 들어간 시점이라고 봐도 좋겠다.

    정혁은 만족했다.

    이 정도면 박달수도, 아린도, 꽤나 짧은 시간에 엄청난 변화를 촉진한 셈.

    역시 어린 아린의 곁에 박달수라는 노련한 정치꾼을 심어 둔 것이 좋은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제 말 듣고 계신 겁니까?”

    박달수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귓가에 꽂혔다.

    정혁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면 고개를 돌려 박달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힐끔 정혁을 쳐다보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안 들으셨군요?”

    그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조금 묻어난다.

    정혁이 그에게 미안함을 표시하기도 전에 이공간에 들어가 있었던 엘라가 빼꼼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얘는 지 마음대로 대장간을 들락날락이다.

    어느 순간부터 제 집이 된 것 마냥 정혁의 통제 같은 것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은행나무 군락지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까마귀 편대 위에서 정혁에게 윙크를 찡긋하더니 그대로 은행나무 군락지를 향해 날아갔다.

    하마터면 정혁은 비행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울렁거림을 윙크 앞에서 크게 느껴 구토를 할 뻔했다.

    어쩌다 보니 더불어 하늬안의 역겨운 윙크 장면까지 떠올랐다.

    엘라가 은행나무 군락지를 떠나기 전 애착을 가지고 돌보았던 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게 가는 모양이었다.

    당장에는 고향에 돌아왔으니 내버려두기로 하고 정혁은 멀어지는 엘라를 보다가 정신을 바로 잡으며 박달수에게 물었다.

    “다시 말씀해 주시죠.”

    “이번엔 집중해서 잘 들어 주십시오. 그래도 어느 정도 굴러가는 상황은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여 국왕에게 실례를 끼치면 여론이 번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뭐, 네. 알겠습니다.”

    정혁의 대답을 시작으로 박달수는 장황히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엘라의 강대한 존재감 앞에 은행나무 엘프들은 고개를 숙였다.

    예언의 현장에서 누구도 반항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그들이 천하게 여기던 아엘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잔인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오를 역모의 싹은 모두 지워 버렸다.

    왕권의 교체는 항상 혁명의 불씨와 피의 역사를 같이 안고 가는 법이다.

    아린의 즉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무너졌던 국경이 엄청난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도성을 제외한 모든 왕국의 영토가 아크 제국의 더러운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고 그 속에서 고통 받던 은행나무 엘프들은 그들을 외면한 왕정을 비난했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구원자가 정말 순식간에 그들을 해방해 주었고 이는 아엘프 국왕에 대한 인식의 완전한 변화와 더불어 범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낸다.

    아크 제국을 섬멸하는 데 국왕 아린은 자비가 없었고 이런 모습은 더욱 국민의 신뢰를 극대화시켰다.

    아린은 예언의 인물답게 선조의 힘으로 영토 내에서 분전했고 은행나무 엘프의 잔존 병력을 모두 지키면서 그들의 피없이 완벽한 승리를 달성했다.

    아스칼은 박달수의 조언 아래 국경 수비대의 각 지역별 대장들을 훈련시켰다.

    내노라하는 왕국의 용장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만 알았던 전 지도자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상태여서 지금의 대장들에겐 전투경험이 부족했다.

    그래도 다행히 자신들의 오랜 편견보다 왕국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이들은 아스칼의 지도에 순순히 따랐고 순식간에 많은 것들을 흡수했다.

    이들이 국경 수비대를 온전히 통솔하기 시작하자 국왕 아린에 의해 해방을 맛보았던 젊은 은행나무 엘프들이 왕국의 수호를 위하여 군대에 자원했다.

    이 물결은 꽤 거세게 왕국 전체를 관통했고 많은 병력들이 새로 보충되었다.

    아스칼은 더욱 바빠졌다.

    그 사이 아린이 왕궁을 비우면 박달수는 그의 명령 아래 왕궁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비록 인간이긴 했지만 엘프들이 아린의 존재를 일차적으로 받아들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박달수의 지시를 수렴하는 데 큰 마찰은 없었다.

    반쯤은 체념한 분위기라고 정의해야 맞긴 하겠다.

    소통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국의 보호만 최우선으로 해 왔던 왕국의 모든 시스템을 박달수가 뜯어 고치기 시작했다.

    각 부서장들과 마라톤 회의를 통해서 현재의 문제점을 꼬집었고 다행히 아크 제국의 거대한 위협 아래 많은 부분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박달수도, 아스칼도 짧은 시간에 크게 성장하고 있는 은행나무 엘프 왕국을 보면서 뿌듯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 찰나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잔존 병력을 박살 내고 이제 영토 확장까지 노리고 있었던 젊은 국왕 아린이 병력들을 응집하고 반격의 뿔피리를 울리려던 때였다.

    갑작스레 그들의 전초기지 앞으로 아크 제국의 엄청난 군세가 들이닥쳤다.

    아스칼이 보고한 바로 아린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에게는 여전히 선조의 힘이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박달수도, 아스칼도 예상한 일이었다.

    도돈치아의 붕괴와 아크 제국의 남하.

    자유 연맹과의 영토 전쟁의 시작.

    여기서 은행나무 엘프들이 지켜 줘야 할 것은 북동쪽의 그들의 영토 수호와 더불어 측면 압박이었다.

    측면 압박이 없다면 자유 연맹의 허리가 위험하기 때문에 그들의 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국왕 아린도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린에게 아크는 그의 백성들을 난도질한 증오의 적이었기 때문에 동기부여는 국왕에게도, 국민들에게도 동일하게 발휘되었다.

    또한 지속적인 승전으로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의 사기 역시 쟁쟁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여자가 등장하고 모든 상황이 뒤집어졌습니다.”

    역시.

    정혁은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그 일이 기정사실화 되자 조금 막막한 심정이 들어 아린을 보기가 꺼려졌다.

    이런 분야는 정혁이 취약한 쪽이라 그에게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왕궁의 비행장에 다다른 편대는 천천히 고도를 낮춰 비행장 곳곳에 설치된 까마귀 둥지에 안착했다.

    왕궁의 위용은 대단했다.

    엘라보다 훨씬 더 거대한 나무가 왕궁 중앙에서 뻗어 올라가고 나무 최상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들이 즐비했다.

    아래로 고대 양식의 석조 왕궁 건물들과, 나무 내부에 마련된 각 기능을 가진 방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했다.

    까마귀 둥지는 최상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까마귀에서 내려 나무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마중 나온 국왕 아린을 발견했다.

    정혁은 아린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분명 어렸던 그였는데 잠깐 사이에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키도 조금 더 컸고 앳된 얼굴도 없다.

    장성한 청년의 모습이 되어 이제 정혁만 해진 그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린은 성큼성큼 걸어와 정혁의 손을 냅다 잡았다.

    다소 거칠어진 그의 손이 정혁의 마음 한편을 아프게 했다.

    정혁과 아린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린의 두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끼고 정혁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린은 큰 숨을 깊게 들이쉬며 눈을 오래 감았다가 떴다.

    작게 충혈된 눈이 할 말이 많다는 뜻을 담아 정혁을 보고 있다.

    “하늬안 님도 뵙고 싶었는데.”

    “하긴, 나보다야 하늬안이 더 보고 싶겠지.”

    아린의 말에 정혁이 차갑게 대답하자 그때서야 아린이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가실까요? 엘라 님은 은행나무 군락지로 향하셨군요?”

    “어떻게 알았어?”

    “이제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습니다.”

    정혁은 많이 컸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아린의 등을 툭 쳤다.

    그리곤 갑작스레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들에 주위를 둘러보자 사색이 된 박달수와 더불어 두 눈이 거의 찢어지다시피 하며 살의를 띄고 있는 국왕 아린의 수행원들이 보였다.

    박달수는 양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며 입모양으로 “예의”라는 말을 거듭 뱉었다.

    ‘아차…는 개뿔.’

    “그럼 뭐 어쩔 건데.”

    정혁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이번엔 아린과 과감히 어깨동무를 했다.

    아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와 함께 걸었지만 오히려 죽음의 위협을 느낀 박달수가 사력을 다해 짧은 엘프어로 주변의 수행원들에게 이 상황을 납득시키기 위한 말들을 뱉어 댔다.

    “아, 나는 제논의 지도자가 되었어.”

    아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정혁을 보며 말했다.

    “예? 그런 자리 안 어울리는데요?”

    ‘너는, 예나 지금이나.’

    정혁이 혀를 한 번 차더니 빈정 상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 땐 축하한다거나, 놀랍다거나, 뭐, 어떻게 그렇게 된 거냐 같은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러게요. 박달수 님이 가끔 해 주시는 말인데 처신이 참 쉽지 않네요.”

    “아냐, 이게 너다운 거지 뭐.”

    정혁은 그와 함께 나무 중앙부에 위치한 은행나무 엘프의 상징이 새겨진 거대한 원반 위에 섰다.

    그러자 원반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투명한 원형 통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원반은 엘리베이터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나무 내부의 각 부서가 하는 일들을 스쳐 가며 볼 수 있었다.

    꽤 바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내가 지도자의 위치이기에 너와 동등할 수 있는 거야.”

    “그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아니셔도 정혁 님은 저보다 더 존경받아야 할 분인걸요.”

    ‘존경이라….내가 이런 위치까지 갈 그릇은 아닌데. 어찌되었건 뉘앙스는 나쁘지 않네.’

    어느 한 층에서 멈춘 원반에서 내린 그들은 길게 이어진 복도 끝 거대한 목재 문을 향해 걸었다.

    복도 사이사이마다 왕의 기사들이 중장갑을 착용하고 근엄하게 서 있었다.

    정혁은 어깨동무를 풀고 그에게서 한 보 물러서 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래도 왕은 왕이니.그의 병력들 앞에서의 위상은 세워 줘야 마땅하지.’

    그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수행원들에게 정혁의 존재감을 심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육중한 목재 문이 열리고 국왕 아린의 왕좌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높은 단상 위에 나무 의자를 비추는 은은한 달빛.

    넓은 공간에 양 벽면에는 은행나무 엘프의 역사가 그려진 커다란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붉은 카펫이 길게 왕좌의 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린은 자신의 왕좌를 작게 쓰다듬으며 멋쩍다는 웃음으로 정혁을 보았다.

    ‘그래, 많이 컸네, 녀석.’

    정혁의 입에 훈훈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린은 정혁의 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의 수행원들을 물리고 박달수 역시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쉬고 있으라고 명했다.

    이곳에 이제 아린과 정혁만이 남았다.

    아린은 씁쓸한 눈동자로 정혁을 보고 있다.

    고민이 많은 얼굴.

    어떻게 이 참담한 사실을 정혁에게 알려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아내고 있었다.

    정혁은 모르고 있으리라, 자신이 왜 병력을 물려야만 했는지를.

    그러나 예상을 빗겨 가며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정혁이었다.

    “에드리아 때문이지?”

    그의 말과 동시에 아린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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