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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의 랭킹 1위-63화 (63/200)
  • ◈63화

    히포그리프를 타고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도시가 어느새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여관은 다소 외곽에 위치했기에 화가 조금 늦게 미친 듯했지만 여기저기 불꽃이 일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은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경계 아래에 위치한 도시이다.

    정혁이 은행나무 군락지에 진입하기 위해 북동쪽에 위치한 은행나무 왕국을 거치지 않으려 아래부터 진입하기 위해 택한 루트에 걸친 도시였고 아크 녀석들이 침입하기 전이었던 방금까진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던 도시였다.

    아크, 저 녀석들이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분명 은행나무 엘프 왕국의 외곽을 지나쳤다는 말이 된다.

    외곽 수비대가 이들의 진군을 보고도 눈을 감았다는 뜻이다.

    정혁은 이를 부득 갈았다.

    아린을 만나면 왕이고 나발이고 머리 한 대 쥐어박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편 엘라 역시 조금 화가 나 보였는데 은행나무 군락지와 가까운 만큼 그들이 행여 군락지를 지나쳤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미 한 번의 공격으로 꽤 많은 은행나무들이 손실되었고 영험한 대지가 파멸의 기운에 반 이상이 타락했었다.

    엘라가 그곳을 떠나며 대다수 복구시키긴 했지만 그곳의 은행나무들에겐 꽤나 큰 충격적인 사건이자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정혁이 엘라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거기까진 안 갔을 거야.”

    엘라는 정혁의 말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성난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거릴 것 없잖아? 그치?”

    그녀의 말에 정혁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는 옆에 족히 4m는 넘게 거대해진 라테를 보고서 자신을 보더니 갑작스레 자연의 마나를 전신에 두르고서 본래의 은행나무 엔트의 모습으로 변화 시켰다.

    [질 수 없지.]

    그녀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전해지고 정혁은 양손에 든 망치를 두어 번 휘둘렀다.

    알고 있다.

    지금 이 여관을 박살 내고 등장한 불의 정령왕과 고대 엔트 앞에서 여관까지 밀고 들어온 아크 제국의 암살 집단과 흑마법 군대는 아연실색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혁과 엘라가 편안하게 대화하고 있을 때조차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 거야.”

    순간 사라진 정혁이 아크의 군대 분대장 정도로 보이는 자의 오른쪽 측면에서 등장했다.

    정혁은 그의 귀에 살벌하게 한마디 하고는 관자놀이를 정확히 노려 전격의 망치로 강타했다.

    그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더 거대해진 낙뢰에 전신을 불태우며 산화했다.

    동시에 염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도시에 가서 다 처리해, 여기는 내가 정리할게.”

    라테와 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100여 명 정도 되는 아크 군대를 완전히 무시한 채 도시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분대장을 잃은 병력들은 생각보다 혼비백산하지 않고 정혁 앞에 다시금 결의를 다지는 듯했다.

    역시 정신 세뇌는 무서운 법이지.

    정혁은 목을 돌려 근육을 풀며 그들에게 둘러싸여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장장이치곤 제법이지?”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공중에 흩뿌려졌던 염구의 일제 공격과 함께 정혁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공격들이 이어진다.

    불을 뿜고 태우고 녹이며 전기가 강타하고 낙뢰가 떨어진다.

    염구에 관통된 적들이 초 단위로 시체가 되어 가는데 염구의 속도보다 적을 압살하는 정혁의 속도가 더욱 빠르다.

    아크 제국의 암살자 링링은 결국 두 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내려놨다.

    처음 아크 제국에 병사가 되어 군주급 악마들을 마주하고 대악마 아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전율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저 남자를 보며 동일하게 느껴지고 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

    어차피 다시 접속하게 될 게임.

    이곳에서의 인생이 저곳에서의 인생보다 더 중요하다.

    악마 아크에게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정혁은 무릎을 꿇고 단검을 내려놓은 여자 암살자 플레이어의 앞에 섰다.

    주변은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이제 이쪽으로 밀고 들어온 아크의 병력의 남은 사람은 이 여자 한 명이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정혁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피부에 군데군데 고문의 자국들이 남아 있다.

    옷가지조차 제대로 걸치지 않아 잔뜩 헤져 있고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은 단검에는 여러 부정적인 마법과 독약들이 발라져 있다.

    “포기인가?”

    정혁의 말에 여자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포기라니, 그런 건 없다. 어차피 곧 다시 너를 만나게 될 테니.”

    “여기서 죽고 반년 뒤에 네가 다시 접속하게 되면 아크 제국이 남아 있으리라 보는 거야?”

    정혁의 말에 여자가 껄껄 웃었다.

    “아둔하구나. 우리 제국은 무너지지 않는다. 대지? 건물? 그런 건 필요치 않아. 한 명만이라도 아크 님의 신념을 가진 채 살아 있다면 그것이 제국이며 그것이 우리다.”

    정혁은 혀를 내둘렀다.

    이걸 신념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일까.

    “그럼 마지막 하나까지 찾아내서 죽여야겠네.”

    여자는 정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죽이며 말했다.

    “너는…모르는구나.”

    “악마니 뭐니, 개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어차피 그들도 잡아 죽이면 그만이니까.”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그런 소리가 아니지. 너는 진짜를 모르고 있는 거야.”

    정혁은 마주친 여자의 눈 속에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무엇을 더 알고 있는 것일까.

    갖은 고문을 통해서 고통에 익숙해지고 지속적인 세뇌를 통해 믿음이 굳건해진다.

    사리 분별이 가능한 성인이며 게임 속의 세상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곳에서의 믿음이 현실까지 이어진다.

    다만 그것뿐일까? 악마의 지시가 이 많은 플레이어들을 이런 길로 인도하는 것일까?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어떤 포인트.그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여자가 말하는 내가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그 포인트인가?’

    “그래, 이해가 되지 않기는 했지. 악마가 마법을 써서 인간들을 홀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크 제국이 순식간에 거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는, 네가 말하는 내가 모르는 한 가지 때문인가?”

    그의 말에 여자는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보. 돌란이 아닌 주제에 그 정도까지 추측했다면 훌륭한 거야.”

    그녀가 말하는 돌란은 아크 제국의 기초를 닦은, 그들이 칭송하는 위대한 성자다.

    홀연히 돌란이 사라지고 나서 아크 제국은 그를 기리기 위해 아크 제국의 사상을 완전히 깨달은 자들을 돌란이라 칭했고 아크 제국의 대다수는 돌란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플레이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돌란이라고 부르기 때문이었다.

    “그래. 예언의 서에 대해 공부할 때 지금의 너의 모습과 비슷한 자의 이야기가 나왔던 적이 있었지. 어쩌면….”

    여자가 말을 줄이며 음흉하게 웃어 댔다.

    정혁은 마치 웃음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졌다.

    “어쩌면 더욱 빨리 아크 님을 알현할 날이 올 수도 있겠구나.”

    여자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정혁은 더 많은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여자는 그저 하급 병졸에 불과하다.

    아는 것도 제한적일뿐더러 어차피 아크 제국은 짧은 시일 내에 정혁이 묵사발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급할 것도 없다.

    예언의 서인지 뭔지 가서 직접 들여다보면 그만이고 여차해서 아크가 튀어나온다 해도 반으로 갈라 죽이면 된다.

    정혁은 그대로 여자를 로그아웃시켰다.

    그리고 라테와 엘라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아, 히포.’

    정혁이 다 박살난 여관 근처를 돌아다니며 그의 귀한 탈 것인 히포그리프를 찾았지만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녀석은 난리 통에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진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조금 아래의 도시를 본다.

    굳이 저 아래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

    저들만 있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때 어두운 하늘 위를 빠르게 비행하는 무리가 정혁의 눈에 들어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까마귀 편대 같았다.

    까마귀 편대는 은행나무 엘프의 주요 병력이다.

    총 다섯 마리의 까마귀들은 불타오르는 도시 위를 빙빙 돌며 비행하다가 갑자기 경로를 틀어 정혁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정혁은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자신의 곁으로 날아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거대한 까마귀들은 강한 하강풍을 일으키며 지면에 착지했다.

    제일 선두에 있던 까마귀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박달수였다.

    그는 반가움과 괴로움이 뒤섞인 얼굴로 정혁에게 한달음에 달려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계셨군요!”

    정혁은 다소 떨떠름하게 그의 인사를 받으며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맞잡는 박달수에게서 기쁨이 살짝 느껴졌다.

    “아니 근데 불의 정령왕이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엔트 님과 싸우고 있는 건가요?”

    박달수가 도시를 보며 당황한 듯 말하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 일단 어서 여기서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녀석의 악명은 익히 들어서 알고 계시겠죠?”

    박달수가 그의 팔을 붙잡고 끌었으나 정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박달수를 호위하던 은행나무 엘프들은 애초에 까마귀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여차하면 도망가려는 심산이었다.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 있지만 라테는 제 친구가 됐습니다.”

    정혁이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아 내리며 최대한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달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도 그의 말에 당황한 듯 서로 엘프어로 뭐라 대화하고 있었다.

    “정리는 금방 끝날 겁니다.”

    정혁의 말대로 정리는 금방 끝이 났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순식간에 도시에 퍼진 불길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라테가 모든 불길을 집어삼킨 것이다.

    엘라는 곳곳에 펼쳐 놓은 은행잎 보호막을 거뒀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시민들과 플레이어들이 그곳에서 당황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라테와 엘라는 동시에 크기를 줄였다.

    라테는 이전의 귀여운(?) 정령의 모습으로, 엘라 역시 작은 인간형 정령 모습으로 돌아왔다.

    라테에게는 대지의 힘 역시 있었기에 갈라지고 패인 땅을 복구하고 엘라는 그곳에 다시 자연의 힘을 불어 넣었다.

    도시의 건물들은 붕괴되었지만 그것까지 그들이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엘라와 라테는 이번 전투를 통해 나름대로 괜찮은 합을 맞췄고 다시 여관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면서 그들이 주먹 인사를 나누는 것을 정혁은 얼핏 볼 수 있었다.

    묵은 때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라테가 다가오자 은행나무 엘프 병력들은 기겁했다.

    까마귀 역시 두어 걸음 총총 뒤로 물러서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나 반대로 엘라가 다가옴에 또 다른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조화로운 반반이면 좋으련만 이건 너무 극과 극이라 그들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박달수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50레벨에 정혁과 그의 새로운 동료, 불의 정령왕인 에고 장비를 보며 박달수는 다시 한번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정혁은 까마귀를 타야 했기 때문에 라테를 건틀릿으로 변화시켰고 라테도 이제 적응한 듯 불길에 휩싸여 정혁의 손에 안착되면서도 군말이 없었다.

    다섯 명은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시죠, 일단.”

    정혁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들은 박달수의 까마귀 뒤에 정혁을 태우고 밤하늘을 높게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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